# 135
레벨업 속도는 9.8m/s^2 135화
약 40분 후.
협회와 백마, 세인트의 상급 헌터들은 카메라를 통해 작전실에서 용산 게이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 상공에 완성된 게이트를 보면서 탄식을 뱉었다.
불안한 예감은 왜 틀리질 않는 걸까.
게이트가 완성되자마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역시 급성형이었다.
타입은…….
“마계다!”
카다시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게이트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은 황소를 닮은 거대한 마수였다.
머리에는 코끼리 상아 같은 크기의 뿔을 달고 자동차 한 대만 한 해머를 들고 있었다.
라비린토스. 그룬헤잘드가 부리는 마수 중 하나다.
기사들을 투입하기 전, 적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대열을 붕괴시키는 마계 최강의 생물종.
서울의 명운이 걸린 전투의 시작이었다.
라비린토스 다음으로 게이트에 입장한 것은 그룬헤잘드.
그 이후로 그의 사병 100명이 쏟아져 내렸다.
게이트 너머에는 훨씬 많은 수가 있었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이동할 수 없었다.
너무 막대한 마력을 지닌 그룬헤잘드가 이동하면서 게이트의 파장이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룬헤잘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한 백 명은 모두 영지 내의 최정예다.
A급 병사 70명과 S급 기사 30명.
게다가 라비린토스 같은 예외적인 경우는 평범한 S급과는 질이 다르다.
그들 모두가 그룬헤잘드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백전의 전사들이다.
군대는 게이트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삼각지 앞 도로에 열과 오를 맞추어 섰다.
카메라로 모니터링하던 헌터 작전 통제실에서 탄식이 나왔다.
“리얼 개 에바……. 실화인가요 이거?”
신차민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앗! 움직입니다!”
헌터 중 하나가 소리쳤다.
정말이다. 라비린토스를 선두에 세우고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열을 다듬는 것 같은데요.”
차예빈이 마족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며 말했다. 아직 군대가 이동을 시작한 건 아니다. 다만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대열을 새롭게 조직하고 있을 뿐.
“꼭 진군하기 직전에 부대를 사열하는 것 같군요.”
김성인이 말했다.
“잠깐만, 저놈 갑자기 앞으로 나오는데? 저 녀석이 지휘관인가?”
김성인이 모니터에서 그룬헤잘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룬헤잘드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라비린토스 앞에 섰다.
“긍지 높은 마계의 전사들아!”
그가 소리쳤다.
후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룬헤잘드는 단순히 강력한 기사이기만 한 게 아니다. 그는 마계 최고의 지휘관이다.
“우리는 천계와의 전쟁에서 라파엘을 꺾었고 리바이어던의 목을 쳤다. 엘리지아와의 전쟁에선 퀸의 진입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룬헤잘드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우리는 종말을 불러일으키는 마계의 넷째 짐승이다. 우리가 가진 뿔의 행진을 그 무엇이 막을 수 있겠느냐!”
그룬헤잘드의 눈에서 푸른빛이 퍼져 나왔다.
“전군!”
그의 검이 백마 길드를 향했다.
“진격!”
“우오오오!”
마족들이 일제히 함성을 쏟아냈다. 스피커를 꺼도 작전 지휘실까지 그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저 방향은…….”
차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토리를 구출하러 윤성이 마계로 떠난 후 나타난 S급 마족들이다.
저들이 이동하는 방향에 목적지로 선정될 만한 것은 하나뿐.
“백마 길드 쪽입니다!”
차희가 외쳤다.
“다행히 예상대로예요! 헌터들 전부 작전 위치에 있죠?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죠?”
“도착해서 지금 하급 헌터들이 작동 설정하는 중입니다. 곧 준비가 다 될 겁니다.”
홍창민이 답했다.
“그때까지 시간 끌 수 있겠어요?”
“목숨 걸고 해야죠.”
홍창민이 무기를 챙기며 말했다. 이미 김성인과 차예빈은 현장으로 뛰쳐나간 후다.
겨우 사람 백 명이 달린다고 땅이 훼손되진 않지만, 그 백 명이 A급 이상의 강력한 군대라면 얘기가 다르다.
굉장한 마력을 담아 ‘질주’ 스킬을 발동시킨 마족들의 발걸음은 아스팔트 바닥에 발자국을 쿵쿵 찍었다.
인도 블록들은 거듭 밟힘에 따라 쪼개지고 부서지고 가루가 되었다. 그 아래에서 흙과 먼지가 튀어 오른다.
하지만 이윽고 행진이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협회와 세인트, 백마가 연합된 상급 헌터 연대.
“후우.”
선두에서 김성인이 검을 꽉 쥐며 한숨을 뱉었다. 그 옆엔 비타민이 서 있다.
범람했다는 소식을 듣고 밴에서 내려 그대로 헬기를 탄 최수혁도 이미 합류했다.
하지만 그래도 열세다.
저쪽은 S급 마계 기사들이 수두룩하니까.
글로디안이나 샐리단, 요르진 같은 중역 기사들만큼은 아니지만 옛날 아르동 이상의 실력자들이다.
“미치겠구만.”
최수혁이 초조한 듯 도낏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룬헤잘드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전황을 지켜보며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대신 라비린토스가 선두에 나섰다.
“크아아아!”
마수의 끔찍한 포효 소리가 효창공원 앞 도로에 울려 퍼졌다.
“우오오오오!”
마족 병사들이 다시 한번 함성을 지르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김성인은 라비린토스를 보면서 바짝 긴장했다. 저 생물은 다른 기사들과 격이 다르다.
솔직히 일대일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예빈 씨는 아직이야?”
김성인이 비타민에게 물었다. 비타민은 대답 없이 양팔을 번쩍 들고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쾅!
비타민의 펀치가 마족 기사 하나를 날려 버렸다.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기사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엘리지아나 천계와는 많이 싸워왔지만 메탈 계열의 인형은 처음이니까.
하지만 비타민의 전투는 거기까지가 한계다.
콰아앙!
라비린토스가 휘두른 해머가 비타민의 어깨 한쪽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렸다.
파직파직 튀어 오르는 전파. 윤활액이 줄줄 떨어진다.
비타민은 라비린토스를 향해 손바닥을 펴고 파괴광선을 쏘았지만 라비린토스는 잠깐 움찔할 뿐이다.
다시 한번 휘두르는 해머를 김성인이 간신히 막아냈다.
“크아악!”
그러나 힘이 버겁다.
김성인은 S급 헌터 중에서는 근접전으로 한국 최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괴수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최수혁! 도와줘!”
“남는 손 없습니다!”
최수혁이 S급 기사 둘을 상대하면서 말했다.
숫자는 헌터 쪽이 훨씬 많지만 전세는 불리하다. S급 기사 30명을 감당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차예빈! 빨리 좀 와라!”
김성인이 비타민과 함께 라비린토스를 막아내며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
쿵, 쿵, 쿵!
신창동 방향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룬헤잘드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차예빈에게 마력을 주입받은 아리였다.
***
게이트가 완성되기 전, 차희는 윤성의 집에 있는 아리를 불러냈다.
이미 서울의 마력 파장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아리는 전투를 결심한 상태였다.
“전에 마스크맨의 친구라던 인형술사가 부리던 건가요?”
작전 회의실에서 아리를 만난 차예빈이 깜짝 놀랐다.
“그 인형술사도 혹시 이곳에 있나요? 그 사람이 도와주면 전력에 굉장한 보탬이 될 텐데요.”
김성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차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이미 외국으로 떠나셨고, 여기에 이 로봇을 두고 가셨습니다. 대표님께서 맡아두고 계셨던 것이에요. 하지만 이 로봇은 자동 전투가 가능합니다.”
차희가 말했다.
“인형술사가 외국에 있는데도요? 그 거리에 있는데도 로봇이 자동 전투를 한다고요?”
차예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뭐, 저도 잘 모르지만 그렇대요. 아무튼 이 로봇한테 모든 마력을 주입해 주세요. 일산에서 그렇게 했다면서요? 대표님께 들었어요.”
“알겠습니다.”
차예빈은 그 길로 아리를 데리고 이동해서 마력 주입을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최고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소각 발동!>
아리의 손아귀에서 발사된 화염이 A급 마족 세 명을 불살랐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 철덩어리가!”
놀란 기사 하나가 달려들어 검을 날렸지만 아리에겐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리는 맨주먹으로 기사 둘을 가볍게 쥐어패고는 라비린토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건 쉽지 않겠군.’
아리가 라비린토스의 전투력을 빠르게 진단했다.
그러고는 라비린토스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쩍!
강렬한 마력을 실어 힘껏 주먹을 날렸다. 라비린토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지만 이 강력한 마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크르르르.”
오히려 화가 나서 아리를 떠밀고는 해머로 내려찍은 것이다.
콰앙!
그 박력이 엄청나서 김성인은 아리가 파괴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해머 끝이 아리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메탈로이드계에 가서 파츠를 더 모으자고 해야겠어.’
아리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쾅!
이번엔 아리가 라비린토스의 가슴팍을 발로 힘껏 차버렸다.
두 헤비급의 싸움은 헌터들과 마족들의 전쟁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메인 무대였다.
그룬헤잘드는 흥미로운 듯 아리를 지켜보았다.
‘어째서 메탈로이드가 저쪽에 붙어서 싸우고 있는 거지?’
김성인은 힘겨운 사투 끝에 병사 넷과 기사 하나의 목을 벴다. 최수혁도 간신히 기사 하나를 처치했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여전히 기사들은 많이 남아있고 코르소 같은 최상급 A급 헌터들은 그들을 상대하기 버겁다.
상급 헌터들은 숫자가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기사 하나에 두세 명 이상이 달려들었지만 그래도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다.
“Shit!”
코르소가 기사 하나의 검을 힘겹게 받아냈다.
옆에서 카다시안이 보조를 맞춰주지 않았다면 진즉에 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 기사의 전투력은 압도적이라서 결국 코르소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악!”
쓰러진 코르소의 목을 똑바로 겨냥하고 기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옆에서 날카로운 검격이 날아들었다.
핏!
갑작스러운 습격이라 회피가 늦었다. 기사의 목 아래가 조금 찢어졌다. 그는 목을 움켜쥐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코르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러블레이드?”
코르소의 주특기인 상급 근접 스킬 중 하나다.
“우와, 오졌따리……. 처음 써본 건데. 효과 지리네.”
스킬을 발동한 신차민이 중얼거렸다. 최근 길드 내 상급 헌터 지원금으로 경매장에서 샀던 스킬이다.
“앗! 코르소예요?”
신차민이 코르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코르소가 한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신차민은 초등학생이었다.
나이 차이만큼 경력의 차도 크다. 코르소는 신차민을 몰랐지만 신차민에게 그는 동경하는 선배 중 하나였다.
“땡쓰.”
코르소가 간단히 감사를 표하며 일어났다.
<근력 상승 발동!>
<지구력 상승 발동!>
<재생 발동!>
카다시안이 두 사람에게 강력한 버프를 걸었다.
“버프 개이득이죠.”
“왓?”
“저 이제 코르소 형님하고 같이 레이드하는 부분인가요? 앙 기모띠.”
코르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신차민을 쳐다봤다.
“코르소 카다시안이면 솔까말 마족 S급이래도 잡을 수 있는 거 인정? 어 인정~.”
“카다시안! 얘 한국말 하는 거야?”
“……맞을 거야. 저놈 다시 온다! 집중해!”
카다시안이 소리쳤다. 목의 상처를 돌보던 기사가 검을 치켜들고 코르소 팀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러블레이드 발동!>
<오러블레이드 발동!>
코르소와 신차민이 동시에 스킬을 날려 보냈다. 십자 모양의 검격이 마족 기사를 덮쳤다.
콰앙!
놀랍게도 기사는 마력을 전면에 분출하면서 그 공격을 몸으로 뚫어버렸다.
‘상당히 우직하고 강력한 놈이군.’
코르소가 골치 아픈 듯 이를 꽉 깨물었다.
신차민이 칼을 날카롭게 세우며 전투를 시작하려던 순간.
쿠우웅!
거대한 형체가 날아와 기사의 몸을 깔고 앉았다. 그건 라비린토스였다.
“캬아악!”
라비린토스의 아랫배에 무언가에 뚫린 구멍이 있었다.
콸콸 쏟아지는 피.
그 맞은편에서 아리가 손바닥을 펼쳤다.
<소각 발동!>
뜨거운 화염이 라비린토스와 그 아래 깔린 마족 기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후우.”
김성인은 전황을 돌아보았다.
상당히 많은 적을 제압했지만 이쪽의 피해도 크다. A급 헌터가 벌써 열 명 이상 전투불능이 되었다.
게다가 비타민도 이미 파괴됐다.
김성인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6분이 지났다.’
작전 시간은 충분히 채웠다. 이대로 전투를 계속 벌이면 결국은 이쪽의 전멸이다.
아직도 기사들은 20명 이상이 남아있고, 상급 헌터들은 무력하게 쓰러지고 있다.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니 다음은 마스크맨의 비서에게 맡긴다. 계획대로 모두 잘되었길 바랄 뿐.
“퇴각!”
김성인이 소리를 질렀다.
“전부 도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