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레벨업 속도는 9.8m/s^2 130화
하인스와 바토리는 성문을 빠져나가 마을을 질주하는 중이다.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성 입구의 보초들이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순발력으로 돌파해 버렸다.
그들은 두 사람을 곧장 뒤쫓았지만 상대는 병참관과 귀족 기사다. 일반병들로서는 따라잡기 버거웠다.
댕!댕!댕!
비상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이제 영지의 각 성벽을 맡고 있는 병력은 경계를 굳힐 것이다. 모든 문은 굳게 잠겨서 어떤 영지민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을에 숨죠.”
하인스가 말했다.
“숨는다고 해결될 일이냐?”
“제가 준비해 둔 안전 가옥이 있습니다. 그곳에 숨어서 경계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벽을 넘읍시다. 마왕이 계신 곳까지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겁니다.”
“윤성은?”
“강한 분이니 알아서 살아남으실 겁니다.”
바토리는 초조한 표정이 되었다.
이전에도 그녀가 정보를 잘못 줘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윤성이 뜻밖의 전투에 휘말렸었다.
‘또 내가 그 인간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가.’
“바토리 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인스가 바토리의 손을 꽉 쥐고 이끌었다. 손바닥이 미끄럽고 뜨겁다. 잘린 손목을 움켜쥐었을 때 묻은 피 때문이다.
“손은 괜찮으냐?”
“버틸 만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앗. 병사들이 옵니다. 고개를 돌리세요.”
하인스는 바토리를 좁은 골목으로 데려갔다. 골목 입구 쪽을 자신의 등으로 가리고, 마치 숨어서 스킨십을 즐기는 젊은 연인처럼 바토리를 껴안았다.
마족들의 기감이 예민해도 바토리나 하인스 정도 되면 자신의 기척을 줄일 줄도 안다.
게다가 바토리는 이미 체력이 빠져 마력이 그리 많이 발산되지 않는 상태였다.
병사들이 지나간 후 하인스는 조심스럽게 바토리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갑시다.”
그가 바토리의 손을 잡고 영지의 남쪽, 쓰레기 처리장 근처의 안전 가옥을 향했다.
***
글로디안은 윤성을 상대로 오랫동안 버텼지만 그의 변칙적인 공격은 너무 예상하기 어려웠다.
단검이 주 무기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손가락에서 빛을 발사하고, 냉기도 뿜고, 그러더니 손가락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몰려서 닿는 것마다 다 찢고 부숴 버린다.
심지어는 그 단검조차 허공에서 저절로 움직이며 글로디안을 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헉, 헉.”
글로디안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거리를 벌렸다.
“대체 어디서 온 놈이냐? 네 이름이 뭐지?”
“마스크맨이라고 한다.”
“마스크맨?”
글로디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해의 해저에서 던전 범람이 일어났을 때 요르진이 긴급 마력 송신으로 보내온 정보가 있었다.
분명히 ‘마스크맨에 의해 팀이 궤멸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놈은 이상한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거 말이야?”
윤성은 인벤토리에서 방독마스크를 꺼냈다.
마스크를 쓰는 게 당연히 전투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꽤 강하다. 게다가 계단 위에도 많은 적이 몰려든 것 같다. 발소리가 수없이 들렸으니까.
‘전투를 하다가 여차하면 바로 인계로 빠진다.’
윤성은 방독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글로디안이 이를 부득 갈았다.
“네가 요르진을 죽인 놈이냐?”
장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이 개자식!”
글로디안은 샐리단에게 검술, 요르진에게 마법을 배웠다. 글로디안은 뛰어난 두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고 말았다. 직선적으로 달려든 글로디안의 움직임은 윤성에게 완벽하게 읽혔다.
쾅!
윤성은 타이밍에 맞춰 글로디안을 힘껏 걷어찼다. 빛의 탄환을 쏘았다.
퓽!
섬광이 글로디안의 복부를 뚫었다.
“웬 놈이냐!”
“도련님!”
마침 감옥 밖에 몰려들었던 병사들이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윤성은 천장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내려올 때 두께를 가늠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빛의 탄환 발동!>
먼저 천장을 파괴한 후,
<랜더의 전투화 발동!>
점프해서 단번에 감옥을 탈출해 버렸다.
“적이다!”
“침입자다!”
하지만 지상에도 마족 병사들 수십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윤성을 발견하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윤성을 향해 뻗은 날카로운 창칼.
<중금속 폭우 발동!>
윤성이 스킬을 사용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특히 효과적인 스킬이다.
쏟아지는 빗방울 줄기 하나하나는 치명적인 마력을 품고 있다. 빗물은 순식간에 그들의 갑옷과 무기를 부식시켰고, 이윽고 피부로 파고들었다.
“크으으!”
“끄아악!”
마족들이 머리와 어깨, 가슴 등의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들의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인스와 바토리는 무사히 탈출했을까?’
윤성은 서둘러 성을 나섰다. 보초들이 계속해서 막아섰지만 그리 대단치 않았다. 성문 입구는 문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지만 그 역시 랜더의 전투화를 가진 윤성에겐 문제 되지 않는다.
후작의 성을 나와 민간 지역.
윤성은 내리막길을 질주하며 남쪽으로 달렸다. 처음에 하인스가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었던 방향이다.
킁.
‘쓰레기 냄새가 난다.’
쓰레기 처리장이 가까워 오는 모양.
여기 어떤 골목에서 손수레와 이끼 낀 돌인지 뭔지 사이에 집이 있댔는데.
문제는 골목이 여러 개라는 것이다. 윤성은 대로에서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윤성!”
골목 한쪽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토리.
“뭐야?”
그녀의 표정이 매우 안 좋다. 어울리지 않게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하인스는?”
“큰일 났다. 날 좀 도와다오.”
바토리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뚝 흘러내렸다.
“뭔데?”
“그룬헤잘드의 군대가 안전 가옥으로 밀어닥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발각되었고, 하인스가 그곳에 남았다. 내게 도망치라고 했다.”
“맙소사. 어딘데?”
“바로 이 앞이다. 그런데 적들의 수가 너무 많다. 좁은 골목을 막아서서 하인스가 쉽게 길을 내주진 않았지만.”
바토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섰다.
“혹시 무기가 있으면 내게 빌려주지 않겠느냐? 내가 직접 하인스를 구하고 싶다.”
“잠깐만.”
윤성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아르동 남작의 검을 꺼냈다.
“이건?”
“아르동의 검이다. 내가 어쩌다 보니 갖고 있게 됐어.”
“윤성! 혹시 아르동의 루비 목걸이도 가지고 있는가?”
“루비 목걸이?”
윤성은 인벤토리에서 루비 파편이 들어있는 보석함과 목걸이 줄을 꺼냈다.
“됐다!”
바토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최근 아르동 남작의 영지를 자주 찾아갔다. 하인스는 바토리가 아르동을 죽이고 그 영지를 차지한 줄 착각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룬헤잘드가 인계를 침공해서 힘을 키우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토리는 그룬헤잘드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3일씩 아르동의 성에 틀어박혀 남작이 했던 연구 일지들을 뒤졌다. 어떻게 루비에 사람의 마력을 담고 그것을 꺼내 쓸 수 있었는지.
이제는 제법 안정적인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아르동의 연구가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마족과 인간, 천인 등의 일부 종족들은 마력의 파장대가 유사하여 서로 중첩이 가능하다.
상쇄되지 않도록 잘 배치하여 정돈하면 그 힘을 가져다 쓸 수 있다.
화아아악-
바토리가 목걸이를 집어 들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와아.”
그러자 부서졌던 루비의 조각들이 다시 붙고 단단하게 굳었다.
“아르동의 힘을 내가 쓸 수 있게 되었다. 가자.”
“잠깐만.”
윤성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던 바토리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성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분출하고 있었다. 2미터 장신의 중년의 마족이 말 한 필을 타고 내리막을 내려오는 중이다.
“그룬헤잘드…….”
바토리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바토리!”
윤성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가서 하인스를 구해라. 그룬헤잘드는 내가 처치할 테니까.”
“무리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네 실력으로 그룬헤잘드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절대 무리하지 마라.”
바토리는 윤성에게 행운을 빌어준 후 골목을 향해 달려갔다.
그룬헤잘드는 사실상 마계의 서열 2위에 해당했다.
그의 강력함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는데, 우선은 그가 마왕의 사촌 동생이라는 점이 있다. 인간 헌터의 각성이 핏줄을 좀 타는 것처럼 마족들의 힘도 핏줄을 탄다.
하지만 그룬헤잘드의 힘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그 정도 친인척은 마계에 수두룩하니까.
루비에 타종족의 마력을 담는 아르동의 방법은 사실 아르동이 혼자 개발한 게 아니다.
오리지널 기술이 아주 오래된 마계의 금서에 적혀 있다. 오히려 오리지널이 더 발전해 있는 상태다.
‘마력을 담은 루비를 먹으면 그것을 체내에 흡수할 수 있다.’
그룬헤잘드는 이미 오래전에 금서를 읽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계를 돌면서 마력을 모아왔던 것이다.
다각. 다각.
말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윤성의 앞에 멈춰 섰다.
라센 북부 지역을 지배하는 최강의 마족이 윤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42. 그룬헤잘드(1)
쓰레기처리장 골목 인근. 마족 병사들 몇 명이 대로변을 향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놓친 마스크맨과 바토리를 수색하는 중이다.
“앗?”
병사 중 하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골목 코너를 손으로 가리켰다.
바토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무기는 언제 찾은 거야?”
병사들이 속닥거렸다.
“하인스는 어떻게 됐느냐?”
바토리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미 죽었습니다.”
병사 하나가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감히……. 네놈들이…….”
바토리가 장검을 꽉 움켜쥐었다.
“뭘 그리 분해하십니까? 애초에 바토리 님께서 후작님께 대들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하인스 병참관님은 바토리 님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죠.”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바토리가 장검을 치켜들었다. 병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봤자 당신 마력 고갈된 것 압니다. 검술이야 물론 뛰어나시겠지만 당신 혼자서 어떻게 하실…….”
병사들의 말이 멎었다.
바토리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루비가 붉게 빛났다. 아르동 남작이 그 안에 쌓아놓은 힘은 가히 웬만한 귀족 기사들 이상이었다.
쓰걱-
순식간에 달려든 바토리의 검이 병사 하나의 목을 쳤다.
나머지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바토리는 차례로 적들을 쓰러뜨리고는 곧장 골목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