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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속도는 9.8ms^2-129화 (129/260)

# 129

레벨업 속도는 9.8m/s^2 129화

그룬헤잘드의 영지는 여의도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어두운 암색 흙과 말라비틀어진 나무들. 땅 곳곳에서 샘솟는 물은 마족에겐 괜찮지만 인간에겐 독성이다.

영지의 주민 수는 약 2만. 군대는 1,300명 정도.

그룬헤잘드의 땅은 마계에서도 매우 큰 축에 속한다.

영지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중세 도시의 전경과 비슷하다. 종교적인 색채가 없을 뿐.

윤성은 얼굴을 가리는 천 안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려 주위를 관찰했다. 꼭 고즈넉한 시골에 요양 온 기분이군.

“도시 남쪽에 쓰레기장이 있는데 그 근처에 제가 만들어둔 안전 가옥이 있습니다.”

하인스가 말했다.

“안전 가옥?”

“이끼가 잔뜩 낀 커다란 바위와 부서진 손수레 사이에 있는 집입니다. 들어가서 책장 옆 카펫을 들추면 그 아래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 거기 가서 숨으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찾아갈 자신은 없네. 난 여차하면 순간이동석을 써서 튈게.”

“그러셔도 되고요. 그런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질 않았으면 좋겠군요.”

마족 병사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다. 훈련을 마치고 마을에서 노닥거리는 듯 보였다.

“하인스 병참관님?”

그들 중 하나가 하인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룬헤잘드의 군대 내에서 하인스의 지위는 기사들 바로 아래다. 평민 출신 중에서는 꽤 고위직인 편.

“그래. 다들 훈련은 잘 하고 있겠지?”

하인스가 유연하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샐리단 기사단장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데 옆에 계신 분은?”

병사들이 윤성을 힐끔거렸다. 윤성은 얼굴이 완전히 가리는 천 덕분에 실루엣만 드러났고, 정수리는 완전히 모자에 가려 있어서 뿔의 유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후작님의 손님이다. 후작님께선 저택에 계시느냐?”

“아마 계실 겁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하인스는 윤성에게 깍듯하게 행동하며 마을을 쭉 가로질렀다.

약 10여 분 후.

이윽고 그들 앞에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입구의 경비들이 하인스를 확인하고 경례를 올렸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후작님을 뵈러 왔다.”

“옆에 계신 분은?”

“손님이다.”

“출입 수속을 하셔야 합니다. 신분 확인부터 하시죠.”

“손님께서 먼 데서 오셔서 피곤하실 것이다. 즉시 들어가야겠으니 문을 열어라. 출입 수속은 나중에 내가 작성할 테니 생략해도 좋다.”

“그럼 안 되는데…….”

“꼭 후작님께 경을 쳐야겠느냐?”

갑자기 윤성이 톡 쏘아붙였다.

“나는 돌아가신 샐리단 경과 요르진 경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인계의 바닷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 분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후작님께 고해야 한다. 썩 길을 열어라!”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계에서 던전 범람을 일으켰던 것은 비밀리에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게 실패해서 샐리단과 요르진이 죽었다는 것은 더욱 극비 사항이다.

아무래도 심상찮다. 정말 예삿일로 온 손님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모든 책임은 하인스가 질 테니.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이 묵례하며 말했다.

성지 안에는 그룬헤잘드의 대저택과 영주의 집무실, 손님을 접대하는 귀빈실 등의 건물들이 있다. 물론 그룬헤잘드의 저택이 가장 규모가 크다.

또한 성지 동편 장벽 앞에는 감옥이 있다.

감옥의 정원은 딱 세 명까지다. 이 거대한 영지에 감옥이 그렇게 작은 이유는 영지민들이 모두 착해서가 아니다. 죄를 지으면 그룬헤잘드가 전부 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토리 같은 귀족까지 막무가내로 처형할 순 없다.

윤성과 하인스의 작전은 감옥으로 직행하여 보초들을 쓰러뜨리고 바토리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병참관님.”

감옥 앞의 보초 둘이 하인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죄수를 봐야겠으니 문을 열어라.”

“병참관님은 장부에 이름만 작성하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한데 옆에 계신 분은?”

“손님이다. 함께 들어갈 것이다.”

“저희는 하달받은 바가 없습니다.”

하인스는 윤성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차피 바토리를 탈옥시키려면 전투를 벌이긴 해야 한다.

‘윤성 님을 여기 세워두고 나 혼자 들어가면 어떨까?’

하인스는 잠깐 고민해 보고 금방 포기했다.

감옥 문은 마법 차단이 걸려있고 웬만한 힘으로 부술 수 없다. 바토리조차 못 여니까. 열쇠가 필요하다.

‘윤성 님이 아르동 남작의 성에서 감옥 문을 부숴버린 적이 있다고 바토리 님께 들었는데.’

결국 윤성을 안으로 들이는 방법이든 열쇠를 얻어내는 방법이든 불가피하게 눈앞의 보초를 때려눕혀야 했다.

“갑시다.”

하인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에서 샘솟는 마력을 느낀 윤성이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빛의 탄환 발동!>

하인스의 주먹이 보초 한 명의 턱을 돌려놓았고, 윤성의 빛의 탄환이 다른 보초 하나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쾅!

윤성이 힘껏 감옥 문을 박차고 안으로 난입했다.

***

바토리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룬헤잘드의 장남, 글로디안.

제 아비의 마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최상급 마족 중 하나다. 또한 오래전부터 바토리에게 구혼해 왔던 남자이기도 하다.

“바토리,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께서 널 처형하실 거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느냐?”

글로디안이 말했다.

“고집 그만 부리고 내 처가 되어라. 그룬헤잘드 가문의 일원이 되면 네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몰락한 네 가문의 힘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글로디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바토리가 차갑게 대꾸했다.

“나 엘리자베스 바토리.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내 몸을 팔지 않을 것이다.”

“대체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지?”

글로디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 글로디안이다. 바토리! 글로디안이라고! 그룬헤잘드 영지의 제1 상속자다. 돈도, 힘도, 명예도, 우리 또래 중에서 나만큼 가진 사람이 또 있느냐? 대체 왜 내가 싫다는 거야?”

“처음부터 다 갖고 태어나서 편하게 살아온 남자는 재미없으니까. 난 좀 더 자수성가하는 사람이 좋다.”

“인계에 자주 놀러 가더니 이상한 바람이 들었군.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 아버지께서 이미 처형인의 샘을 열었다.”

바토리의 표정이 싸해졌다.

처형인의 샘.

귀족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 그룬헤잘드가 사용하는 것이다. 마계의 대기 중에 흐르던 마력들이 수억 년의 세월 동안 한 곳에 쌓여서 생긴 천연의 샘이다.

샘 안의 마력 파장은 그 진폭이 굉장히 크고 진동수가 몹시 커서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강력한 마력을 지닌 존재라도 샘에 빠지면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룬헤잘드는 자신의 마력으로 샘 위에 투명한 막을 씌워서 사람들이 그곳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이제 그 샘의 뚜껑이 열렸다.

바토리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이게 마지막 기회다. 이번을 놓치면 네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내 처가 되어라, 바토리.”

글로디안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토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절하마.”

콰직!

그리고 갑자기 감옥 입구에서 들린 소음에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추었다.

뒤이어 들리는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

“바토리 님!”

나타난 것은 하인스였다.

“뭐냐? 병참관?”

하인스에게 인사하려던 글로디안은 갑자기 마력을 분출하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하인스의 등 뒤에서 정체불명의, 굉장한 실력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족 특유의 기감으로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이 자의 전투력은 샐리단보다도 더 강하다. 그리고 매우 호전적인 마력이다.

“뭐야 저놈은?”

윤성이 글로디안을 가리키며 하인스에게 물었다.

“그, 글로디안입니다. 그룬헤잘드의 장남입니다.”

하인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예상외의 전개다. 글로디안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일명 리틀 그룬헤잘드.

마계의 귀족 가문 기사 중에서도 최고 실력자 중 하나다.

저 남자의 힘은 샐리단을 가볍게 웃돈다.

“이런 적이 있는 줄은 몰랐네.”

윤성이 감탄하며 말했다.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말 끝나기 무섭게 윤성은 양손에서 섬광을 쏘며 글로디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검 투척 타깃.>

엄청난 공격들이 일제히 퍼부어졌으나 글로디안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빛의 탄환 두 발은 글로디안에게 적중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팅!

그리고 단검은 글로디안이 자신의 장검으로 쳐내 버렸다. 놀라운 반응 속도다.

하지만 공중에 뜬 종단속도의 단검이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윤성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챙! 깡!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치는 사이 하인스는 입구의 보초에게 빼앗았던 열쇠를 재빨리 꺼냈다.

“탈출합시다, 바토리 님!”

“저자는…….”

윤성은 아직도 천으로 얼굴이 가려진 상태였지만 바토리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눈치챘다.

손가락 빔과 단검술.

윤성 외에는 저럴 사람이 없다.

“순간이동석입니다. 우선 대피하십시오.”

하인스가 품에서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글로디안이 윤성과의 전투 중에 도약했다.

콰직!

그리고 그의 장검이 하인스의 손목을 쳐버렸다.

“끄아아악!”

하인스는 손목이 잘려나간 오른손을 쥐고 비명을 질렀다.

“흥.”

글로디안이 떨어진 순간이동석을 집어 들었다.

“글로디안!”

분노한 바토리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라센 북부에서 알아주는 강자라고 하더라도 투옥되어 있었던 바토리는 체력도 없고 무기도 없다.

“일단 여기서 나가! 피해 있어라.”

윤성이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가 빛의 탄환을 쏠 듯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움찔하는 글로디안.

하지만 페이크다.

<급속 냉각 발동!>

윤성의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글로디안의 움직임이 굳자 하인스가 남은 손으로 바토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나갑시다! 일단 성 밖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글로디안이 전투태세에 들어간 것을 다른 마족들도 느꼈을 것이다.

병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전부 전멸이다.

윤성은 혼자서도 글로디안을 상대할 수 있고 여차하면 순간이동석을 써서 도망칠 수도 있을 거다.

‘윤성 님에게 드렸던 순간이동석은 1인용이다.’

그걸 타고 셋 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일단 하인스와 바토리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먼저 도망쳐!”

윤성이 외쳤다.

하인스는 바토리를 데리고 곧장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파칭!

마력을 끌어올려 열을 발산한 글로디안이 몸에 들러붙던 얼음들을 제거했다.

“별 특이한 잡재주를 다 부리는구나.”

글로디안이 윤성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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