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레벨업 속도는 9.8m/s^2 127화
로비로 돌아온 윤성 일행은 소득을 분배하고 있었다. 윤성은 사실상 레이드를 통째로 이끌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신입의 몫만을 주장했다.
자신의 몫을 받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윤성은 클리앙이 내미는 계약서를 읽었다.
<길드 입단 계약서>
월 보수는 500씰. 레이드를 통해서 벌어들인 수입의 10%를 길드 발전 기금으로 내야 함. 격전지에서 얻은 것은 전사 개인의 소유. 길드에서 동원령을 내리면 협력해야 함. 동원령 이전까지는 자유 활동 보장.
간단히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계약이다. 특히 자유 활동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주 좋았다.
본판이 핏빛야수가 아니라 인간 헌터인 윤성으로서는, 꺼삐딴 길드에 대한 의무를 최소화하는 것이 움직이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윤성은 계약서 두 장에 각각 서명하고 한 장을 받았다.
‘핏빛야수의 조직에 잠입하는 데는 성공했다.’
윤성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클리앙의 길드는 핏빛야수들 사이에서 매우 잘나가는 모양이니 여기서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정확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적인지, 아군인지.
핏빛야수들과 던전에서 몇 번 충돌하긴 했지만, 구스타프나 마계 등의 던전을 레이드하다가 마주쳐서 싸움이 벌어졌던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과 인간이 협력할 수 있다면?
잘만 이용하면 인계를 탐하는 그룬헤잘드나 마더 같은 다른 차원의 강자들을 막는 데 핏빛야수를 가져다 쓸 수도 있을 것이다.
***
“휴우.”
집에 돌아온 윤성은 침대에 몸을 길게 뻗고 드러누웠다.
기진맥진한 상태다. 시계는 저녁 7시.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윤성은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핏빛야수들과 함께 움직이려니 휴식을 취할 때도 가시방석 같아서 레이드를 하면서 진이 다 빠져 버렸던 것이다. 하루가 꼭 일주일 같았다.
“버프 리셋.”
숙면을 위해서 버프를 모두 제거했다. 감각 능력을 좀 낮출 생각이었다. 윤성은 죽은 듯이 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침 8시에 눈이 번뜩 떠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쑤시는 몸 구석구석을 주무르던 윤성은 그제야 핏빛야수와 관련된 정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계 종족이다. 콜로라 행성에서 온 콜로라성인.
윤성의 출신지로 되어 있는 ‘롬펠’은 콜로라의 위성 중 하나다.
아직 핏빛야수들의 세력 규모를 파악하진 못했다. 그들이 노리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꺼삐딴 길드 본사에 찾아갔다면 뭔가 더 고급진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지만, 레이드 팀원들이 모두 로비에서 묵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윤성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와서 순간이동석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모든 걸 한번에 알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으니 괜찮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리고 성과는 하나 더 있다.
“자가 진단.”
<강윤성>
<칭호 : 없음>
<힘 : 1,095, 순발력 : 1,095, 감각 능력 : 1,095, 지능 : 1,095>
<버프 : 없음>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0>
<스킬 : 힐링(사용 가능), 폴리모프(사용 가능) 빛의 탄환(사용 가능), 급속 냉각(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용조(사용 가능)>
이제는 버프가 하나도 없어도 모든 능력치가 S급의 커트라인을 넘었다.
게다가 레벨은 70. 랜더의 전투화와 시계를 이용해 1,400점을 기본으로 얻을 수 있고, 탑 220층의 높이인 1,875점도 쉽게 획득 가능하다.
순간이동석을 충전하는 건 꽤 숙달되어서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어느 순간에서든 3,275점의 버프를 쓸 수 있는 셈이다.
띵, 띵!
현관벨이 울렸다. 누가 왔나 싶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내가 나갈게!”
갑자기 다윤이 방에서 튀어나오더니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인데 예쁘게 차려입은 옷과 손질한 머리카락.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가 왔는지 짐작이 간다.
다윤이 현관문을 열어주자 신차민이 나타났다.
그는 윤성을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혹시 형님 길드 들 생각 없으신지?”
“없다.”
“형님 D급이라고 하셨나요? E급이랬나? 아무튼 형님 요새 저희 백마 길드가 하급 헌터도 대우 엄청 잘해주거든요. 솔직히 이직 각인데.”
“괜찮아.”
“왜요? 심지어 우리 길드는 대표님이 마스크맨인데?”
어리둥절한 신차민을 보며 다윤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윤성이 그녀를 살짝 째려보았다.
‘얘기해 주면 안 된다.’
눈빛으로 하는 말을 다윤은 잘 알아들은 듯 눈을 찡긋했다.
“근데 둘이 데이트하러 가니?”
“네! 저희 놀이공원 가려고요.”
“다윤이 돈 있어?”
윤성이 물었다.
“오빠가 전에 준 용돈 아직 남아 있어.”
“좋아. 없으면 차민이한테 사달라고 해. 쟤 월급 많이 받을 테니까.”
“응!”
신차민과 다윤을 내보낸 후, 갑자기 아리가 신이 난 표정으로 윤성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드디어 끝났습니다.”
“뭐가?”
“레지스탕스 위치 해독이요.”
“아!”
윤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맡겼었지.
“그리고 추가로 몇 가지 정보를 더 알아냈습니다.”
“어떤 거지?”
“마더의 군대가 인계를 침공하는 게 원래는 한 달 후였는데, 레지스탕스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답니다.”
“그래?”
“근데 원래는 엄청난 대군을 끌고 와서 한 번에 인계를 엎어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씩 점령전을 벌일 모양입니다.”
“점령전?”
“뉴욕부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몇 주 안에요.”
“엘리지아도 뉴욕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던데.”
“아무래도 강대국의 큰 도시니까요. 거길 점거함으로써 갖게 되는 메리트가 좀 있겠죠.”
윤성은 고민에 잠겼다. 마계도 언제 움직일지 모른다. 그룬헤잘드는 한 번 실패로 꺾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샐리단이나 요르진 같은 충직한 부하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더욱 맹렬히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룬헤잘드는 한반도를 노리고 있으니까 더 큰 문제다.
바토리가 뭔가 정보를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직접 찾아가 볼까?’
윤성은 마계로 가는 순간이동석을 꺼냈다가 관두었다.
그룬헤잘드의 저택에 가봤자 그곳에 바토리가 있을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보다 메탈로이드가 뉴욕을 노린다는 정보를 미국 헌터들에게 전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차희 주인님이 몇 번 주인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리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용무는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핏빛야수 조사하는 것 끝나면 길드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
탑 로비의 빠뜨에게 공물을 바치기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윤성은 핏빛야수들에 대한 조사 때문에 한동안 탑과 로비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백마 길드에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을 ‘출장’으로 처리해 두었지만 정확한 위치나 기간은 명시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표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앗!”
사무실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차희가 벌떡 일어났다.
“돌아왔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응. 그간 별일 없었어?”
대답 대신 차희는 소파로 두다다 뛰어가더니 그 위에 풀썩 쓰러졌다.
“뭐 하는 거야?”
“시위하는 거야. 어떤 나쁜 대표님이 나한테 모든 업무를 떠넘기고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웠거든.”
“미안. 하지만 나도 엄청 고생했다구.”
윤성이 소파 옆에 앉았다.
“알아. 그냥 징징거려 본 거야. 탑에 가서 좀 성과는 있었어?”
차희가 물었다.
“나 이제 강윤성, 마스크맨 말고 신분 하나 또 생겼다.”
“뭔데?”
그녀의 눈이 커졌다.
“롬펠 출신 콜로라성인 꺼삐딴 길드 신입, 윤성.”
“뭐야 그게?”
“콜로라는 행성 이름이야. 우리가 핏빛야수라고 부르던 게 콜로라성인들이고, 롬펠은 콜로라의 식민 위성 같은 거야. 꺼삐딴은 핏빛야수들의 길드고.”
“핏빛야수의 길드에 들어간 거야?”
“응. 놀랐어?”
“아마 널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놀랐을 수도 있어.”
차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미 면역이 되어 있지. 왜냐면 우리 윤성이는 마계 귀족과 친구 사이고, 메탈로이드를 가정 로봇으로 부리는 사람이거든. 난 네가 재포니카로 오징어 물회를 떠도 안 놀랄 자신이 있어.”
“칫. 재미없네. 나 없는 동안 뭐 다른 일은 없었어?”
윤성의 물음에 차희가 뭔가 생각난 듯 펄쩍 뛰었다.
“맞아! 중요한 일 있어.”
“뭔데?”
“어떤 마족 남자가 널 만나려고 했었어.”
“마족 남자?”
“하인스라는 이름이었는데, 바토리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어.”
“아.”
윤성이 골치 아픈 듯 손바닥으로 미간을 짚었다.
“걔 지금 어딨는데?”
41. 마계 용병
하인스는 인근 모텔에서 차희가 준 돈으로 장기 투숙하고 있었다.
윤성이 차희와 함께 찾아가자 그는 재빨리 튀어나와 무릎을 꿇었다.
“기사님의 힘을 믿고 무리한 부탁을 드립니다. 바토리 아가씨를 구해주십시오.”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설명해봐.”
“북한 옆에서 던전이 범람하고 기사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믿은 바토리 아가씨는 그룬헤잘드에게 그 문제를 따지셨습니다.”
“그래?”
“네. 마왕님께 모든 것을 고발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룬헤잘드는 그걸 용서하지 않았고, 바토리 님은 구금됐습니다.”
“그럼 바토리는 아직도 내가 죽은 줄 아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런. 곤란하네. 아, 근데 넌 그룬헤잘드 쪽이잖아?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지?”
뜻밖에도 하인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게, 저……. 바토리 님은 제게 잘해 주셨던 분이라…….”
“그 싸가지가 사람한테 잘해주기도 하냐?”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입니다!”
“바토리가 어디 갇혀있는데?”
“그룬헤잘드 님의 저택 지하입니다.”
그룬헤잘드를 지금 꺾어버리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한반도를 노리는 그 근심거리를 제거해 버리면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더 자유로워질 테니까.
여차하면 메탈로이드나 엘리지아가 뉴욕에서 던전 범람을 일으켜도 그걸 막으러 갈 수가 있다.
“차희, 이번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유, 그래요. 무사히 다녀오시죠, 대표님.”
차희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하인스,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저도 기사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룬헤잘드와 싸울 거야? 그 사람은 네 주인 아닌가?”
“마계의 법은 승자독식입니다. 만약 기사님이 그룬헤잘드를 꺾는다면 기사님이 그룬헤잘드의 영지를 갖게 되는 겁니다.”
“정말이냐? 그럼 나 이미 아르동 영지는 가진 것 아냐?”
“아르동이요?”
하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동은 바토리 님이 꺾으신 것 아닙니까?”
“아냐. 바토리는 걔랑 싸우다가 탈탈 털렸다고. 내가 그놈을 죽여 버렸지.”
“그렇군요. 그럼 기사님의 것이 맞습니다. 저는 바토리 님께서 아르동의 영지에 자주 가시기에 바토리 님의 소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럼 바토리가 그 영지를 쓰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룬헤잘드 님의 영지에 계신 날이 더 많으니까요.”
“그렇군. 사실 바토리가 그걸 써도 상관은 없는데.”
“아무튼 기사님께서 그룬헤잘드를 꺾으면 제 주인은 기사님으로 바뀝니다. 저는 그룬헤잘드의 가신이니까요.”
“그럼 내가 널 바토리한테 주겠다.”
“헉!”
하인스가 바토리를 흠모하는 듯한 눈치여서 해본 말이었는데 뜻밖에 하인스는 깊이 감동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기사님께서 그룬헤잘드를 꺾을 수 있도록 제 목숨을 바쳐 돕겠습니다!”
“좋아. 몇 가지 필요한 걸 챙겨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바로 출발할 수는 없다. 그룬헤잘드 영지에 간 후에 얼마나 오랫동안 전투를 벌일지 모른다.
게다가 차희가 그동안 길드 업무를 전부 봐주었다고 하더라도 대표의 승인이 필요한 서류들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윤성은 차희와 함께 모텔 밖으로 나왔다.
“앗.”
마침 앞을 지나가던 신차민과 다윤을 딱 마주쳤다. 신차민이 얼떨떨한 눈으로 마스크맨, 차희, 모텔 간판을 차례로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