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레벨업 속도는 9.8m/s^2 125화
주위를 둘러본 윤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탑이 아니잖아?”
210층대는 ‘방’이 아니라 필드형이었다.
미로처럼 꼬인 가상 도시의 골목이 구불구불 꼬인 채 나타났다.
3,900점의 버프를 아직 가지고 있는 윤성의 전투력은 S급 중에서도 상위권. 예민한 감각 능력에 미세한 소음이 잡혔다.
“취이익.”
고전 판타지 명작에서 나올 것 같은 숨소리.
그 뒤를 잇는 아스팔트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 땅의 진동을 통해 가늠해 보건대 적의 숫자는 약 30.
덩치가 크고 무거운 녀석들이다.
윤성은 그들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골목길을 따라 맞은편으로 이동했다.
곧 윤성의 앞에 놓인 직선 골목에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녹색 피부에 멧돼지 같은 엄니, 거대한 근육질의 몸. 오크 군단이었다.
오크들은 도끼와 망치 등으로 무장한 채 윤성을 향해서 위협적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검 투척 타깃>
오크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윤성은 그들을 향해 힘껏 단검을 던졌다.
-쐐애액!
“끄아악!”
“크어!”
순식간에 일곱의 오크가 직선형의 단검에 꿰뚫렸다. 분출하는 피가 골목을 적셨다. 윤성은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크들을 도륙하고 뚫고 지나가 버린 단검은 저 끝에서 다시 윤성을 향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크악!”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둔한 녀석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단검을 피할 수 있었으나, 상황은 조금도 호전된 게 아니다.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윤성이 오크들을 향해 돌진하면서 양손에서 빛의 탄환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오크들과의 근접전도 생각하면서 단검을 다시 투척하지 않고 지니고 있었으나, 시시하게도 윤성이 20여 미터를 돌격했을 때 오크 군단은 이미 전멸한 후였다.
윤성은 단검을 빙글 돌리면서 다음 사냥 대상을 물색했다.
처음 계산으로는 두 시간이면 210층대를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윤성은 다섯 시간이 지난 후 겨우 한 층을 올라서 212층에 서 있었다.
‘이건 무슨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군.’
구글 지도가 이렇게 절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210층대는 특정한 위치에 발도장을 찍어서 활성화를 시켜야 다음 층으로 진행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길을 몰랐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오크 대학살을 벌인 윤성은 피곤함과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X발.”
더 이상은 무리다.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써서 지구로 귀환했다.
***
백마 길드의 에이스 중 하나인 A급 마법 계열 이정민은 뛰어난 보조 계열 헌터였다.
그녀의 하루 일과에는 던전 탐색조가 찾아 온 정보들을 토대로 팀을 배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C급 던전에 B급 헌터 송민구와 C급 헌터 길사현, 최희영, 박남두를 배정했다. 하지만 더 집어넣을 만한 C급 헌터가 없었다.
요즘 경기권에 던전들이 무수히 터지고 있었다.
백마 길드에서는 이미 많은 수의 C급 헌터가 차출되어서 던전에 배속된 상태였다.
‘인원이 한 명 모자라는데.’
이런 경우 보통 B급 헌터를 한 명 더 집어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정민은 B급 헌터 명단에서 헌터 하나를 찾아냈다.
“황명수.”
이정민이 남자의 프로필을 열었다.
“새터민이네?”
“탈북민이라고 해야죠.”
이정민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대표님!”
마스크맨이었다.
“새터민이라는 단어, 사실 탈북민들은 안 좋아한대요. 새로운 터전에서 산다, 뭐 이런 의미로 지어진 이름인데 꼭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2등 시민 취급하는 것 같다고. 차라리 탈북민이 낫대요.”
윤성은 북한에서 나온 후에 탈북민들에 대해 좀 공부를 해봤다.
“아무튼 이 사람은 꽤 할 테니까 넣어주세요.”
윤성이 황명수의 이름을 가리켰다.
“네. 그렇게 할게요.”
이정민이 황명수의 이름을 레이드 팀 명단에 넣었다.
“혹시 정민 씨, 이거 충전할 수 있어요?”
윤성이 순간이동석을 내밀었다. 사실 용건은 이것이었다.
이정민의 실력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정에 비해 순간이동석 충전 경험이 부족한 이정민은 될 듯 말 듯하면서 자꾸 실패했다. 순간이동석의 마력은 조금밖에 차지 않았다.
윤성은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요령을 좀 알것 같았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윤성이 순간이동석을 건네받았다.
전체적으로 얼음 틀에 물을 붓는 것과 비슷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콸콸 부었다간 넘쳐흐른다.
각 칸마다 고루 물이 들어가게 하려면 유량을 정확히 재야 했다.
이정민 같은 경우에는 물을 따라내는 능력이 충분한 마법 계열이며, 가지고 있는 물의 양 역시 얼음 틀 수백 개를 채울 만큼 많았다.
하지만 유속을 조절 못 해서 물이 자꾸 넘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들고 빛의 탄환을 쏠 때처럼 마력을 집중해서 모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순간이동석 위에 그것을 덧씌웠다.
-치지직.
순간이동석에서 마력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됐다.”
“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감싸서 넣듯이, 이렇게, 이렇게.”
설명하기는 어렵군.
윤성은 이정민과 인사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 윤성은 매일같이 탑을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210층대를 클리어하지는 못했다.
210층대의 오크들과 싸우는 난이도가 A급이라면 길 찾기 난이도는 SS였다.
그러나 아무리 길이 복잡하고 어려워도 자꾸 가면 눈에 익고 발이 기억하는 법이다.
뻔질나게 210층대 레이드를 시도한 윤성은 결국 219층에 이를 수 있었다. 거의 하루 열 시간씩을 레이드에 쏟아부은 결과였다.
걸어 다니면서 지도라도 만들었으면 아마 211층부터 219층까지 지도가 세 장은 나왔을걸?
그런데도 여전히 220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찾을 수 없었다.
209층과 달리 219층에는 중간 보스 같은 게 없는 걸로 봐서 219층에서 위로 올라가는 데는 다른 조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3,900점의 버프가 모두 바닥났다.
그동안 일일 랜딩으로 210층 발코니에서 수없이 뛰어내렸는데,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곳보다 더 높은 랜딩 포인트가 현재는 없으니까.
난간을 박차고,
<랜더의 전투화 발동!>
하늘로 솟아오른 윤성은 그 레벨에 맞게 650미터를 치솟았다.
이윽고 정점에 도달한 후에는,
<랜더의 코트 발동!>
몸무게를 보정했다.
윤성의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최종 속력=207㎧, 낙하 거리=2,382.51m, 낙하 시간=22.37s>
<랜딩 성공!>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힘과 순발력,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3,032.51점. 남은 시간 86,400초. 일시적 랜덤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 폭격, 남은 시간 86,400초>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근력과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20점>
<낙하 거리 임계 돌파. 영구적 스킬 획득 : 현재 레벨이 낮아 이 낙하 구간에서는 두 번째 스킬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스킬 : 중금속 폭우를 ‘강철 갑옷’으로 바꾸시겠습니까? Y/N>
‘이번엔 꼭 성공한다.’
윤성이 결심을 다졌다.
아 참, 그 전에 물건부터 좀 팔고.
윤성은 빠뜨의 귀금속 숍에 들렀다.
빠뜨와의 관계는 앞으로도 중요할 듯싶었다. 일단 아직까진 호의적인 핏빛야수가 빠뜨 하나뿐이니까.
윤성은 매일같이 마법 잡화를 사다가 빠뜨의 숍에 팔았다.
우수 고객 윤성의 무수한 판매 공세에 빠뜨의 재정도 제법 좋아진 모양이었다. 인테리어가 조금씩 바뀌고 2호점까지 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윤성 씨.”
윤성이 숍에 들어서자 빠뜨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나왔다.
“오늘도 평소처럼?”
“네. 이거 전부 처분할게요.”
윤성은 자루를 내밀었다. 빠뜨는 싱글벙글하며 마법 물품들을 하나씩 감정하기 시작했다.
현미경과 마력 탐지기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빠뜨가 윤성에게 말했다.
“윤성 씨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네. 놀라지 마십쇼. 그중 한 분이 콜로라 최고의 신인입니다. 겨우 87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B급이에요.”
“87…… 세요……?”
“믿어지지 않죠?”
당연히 믿어지지 않지. 그 나이에 아직 은퇴를 안 했단 말이야?
“빠뜨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윤성이 슬쩍 질문했다. 은근히 걱정됐다. 시민 등록할 때 나이 어떻게 했더라? ‘출생 연도’를 썼던 것 같은데. 빠뜨한테 이것저것 물어서 적당히 8,400년도인가 그쯤 썼지 아마?
“저는 341세입니다. 아, 342던가? 300 이후로는 잘 안 세어서.”
“하하, 그렇죠. 보통 300살 넘으면 안 세죠…….”
못 세지, 보통은.
큰일 났네. 진짜 나이 어떻게 했더라? 만 나이로 스물다섯, 이딴 식으로 써놓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그 신인이 들어간 공격대가 있습니다. 꺼삐딴 길드의 2군 공격대죠. 2군이라고 해도 다른 길드들의 1군보다 낫잖아요? 거기서 데려갔어요. 그리고 윤성 씨를 데려가려 하더군요. 제가 계속 뛰어난 전사님이 있다고 영업했거든요.”
“고맙습니다.”
“신인 이름이 클리앙입니다. 아시죠? 엄청 유명한 사람이니. 그분도 윤성 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요. 200층대를 깬 전사 중 자기보다 어린 사람은 처음이라며.”
“켁.”
“왜 그러십니까?”
“저기…… 제가 전에 시민 등록할 때 몇 살로 했었죠?”
“엥? 저야 그건 모르죠. 허허. 왜요? 제가 볼 때는 전사님은 한 60살쯤 되어 보이십니다만. 그때 전사님이 출생 연도 기입하실 때 제 생각이랑 비슷했던 게 기억이 나는군요. 그쯤 아니십니까?”
“음. 아마 그럴 겁니다.”
큰일 날 뻔했네. 대단히 어리지만 ‘생후 2개월에 직업 군인’같이 말도 안 되는 나이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클리앙 씨가 오늘 저희 가게에 들른다고 하셨으니 좀 기다리면 올 겁니다.”
빠뜨의 말대로 윤성은 가게 한쪽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렸다.
약 30분 후, 빠뜨가 윤성이 가져온 모든 마법 물품을 감정해서 2,420씰에 구매한 후였다.
-철컥.
현관이 열리면서 전투복을 입은 전사 네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빠뜨가 양팔을 벌리면서 환영했다. 그는 곧바로 윤성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여기 계신 분이 강윤성 전사님입니다. 강윤성 님, 이쪽이 꺼삐딴의 공격대. 그리고 이분이…….”
빠뜨가 공격대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를 소개하려던 순간, 그가 말을 자르며 튀어나왔다.
“당신이 강윤성?”
“그렇습니다.”
“탑을 210층까지 클리어하셨습니까?”
클리앙이 물었다.
“했죠.”
“좋습니다. 그럼 당신 전투 스타일에 대해 테스트도 해봐야 하고. 함께 탑 레이드를 한번 해보죠. 저희도 210층까지만 진행했으니, 그리로 갑시다.”
“길 잘 아시나요?”
윤성이 물었다.
“길이요? 길이야 알죠. 매뉴얼이 있으니까요.”
“그런 게 있었구만.”
“네?”
“아닙니다. 219층까지 바득바득 갔는데 220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못 찾아서 한참 고생하고 있거든요.”
“뭐야? 219층까지 갔다고요? 이미 소속된 공격대가 있습니까?”
“공격대요?”
윤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 없는데. 혼자 했습니다.”
“혼자?”
클리앙 일행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혼자 219층까지 갔다고요?”
“안 되나요?”
“실례지만 레벨이……?”
“잠깐만요.”
‘일일 랜딩’과 레이드를 꾸준히 해온 그는 짧은 기간 사이에 제법 많은 파워 업을 이루었다. 지금 어느 정도더라.
“자가 진단.”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강윤성>
<칭호 : 없음>
<힘 : 896(+3,032.51),
순발력 : 896(+3,032.51)
감각 능력 : 896(+3,032.51)
지능 : 896(+3,032.51)>
<버프 : 랜딩, 82,225초>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20>
<스킬 : 폭격(사용 가능, 82,225초), 힐링(사용 가능), 폴리모프(사용 가능) 빛의 탄환(사용 가능), 급속 냉각(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용조(사용 가능)>
“671입니다.”
윤성의 답을 들은 클리앙의 얼굴이 해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