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속도는 9.8ms^2-124화 (124/260)

# 124

레벨업 속도는 9.8m/s^2 124화

39. 클리앙

마스크맨은 심해에서 살아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출근했다.

그는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에 앉아서 그간의 밀린 업무들을 처리했다.

대부분 홍창민과 차희가 처리해 두었기 때문에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시간이 좀 생기자 윤성은 그간 궁금했던 것을 꺼내 보았다.

-편지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것이다. 핏빛야수의 소지품.

펼쳐 보았더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통역 스킬을 가지고 있는 윤성의 눈에 문자 하나하나는 익숙했다.

그것들은 핏빛야수의 글자였다.

하지만 알파벳을 알아도 그걸로 만든 암호문은 쉽게 해독할 수 없다. 이도 그와 같았다.

이것은 핏빛야수의 암호 문서였다.

“곤란하군.”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

윤성은 편지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오후에는 에어포스가 찾아왔다.

그녀는 차희의 안내를 받아 마스크맨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핏빛야수로 폴리모프 한번 해주실 수 있습니까?”

에어포스가 물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군.

어차피 에어포스한테는 짧게나마 얘기를 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핏빛야수가 아무리 인간인 척 이 땅을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설마 에어포스겠는가?

차희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이니 걱정 없었다.

<폴리모프 발동!>

에어포스가 경악했다.

완전한 핏빛야수로 변한 윤성을 본 차희는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윤성은 다시 탑에서 보았던 모든 것과 핏빛야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충격적이군요.”

에어포스가 한숨을 쉬었다.

“핏빛야수에 대해 기존에 알려진 어떤 정보들보다도요.”

“중요한 건 그 녀석들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마 이 폴리모프 마법을 개발한 게 그들일 테니까요.”

“놈들이 인간에게 적대적인가요?”

“적대적이긴 하죠. 저하고도 여러 번 싸웠으니까. 그리고 아주 옛날부터 얘기한 거지만, 포천 던전에서 D급 헌터 둘과 E급 헌터 둘을 사살하고 절 기절시켰던 것도 핏빛야수였어요.”

“흠.”

에어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사실은 공개하지 마십시오. 계속 정체를 감추고 두 개의 신분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시겠지만, 섣불리 오픈할 만한 내용은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만약 핏빛야수들이 지구의 던전들을 털어서 마정석이나 수집하는 정도라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계 자체를 침공하려고 든다면 어떨지 모르겠군요.”

에어포스가 골치 아픈 듯 말했다.

“그들이 침공한다면 엘리지아 이상의 위협이 될 것 같습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들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한 건 아니기 때문에.”

“제가 한번 확인해 보죠.”

에어포스는 윤성에게 탑으로 가는 순간이동석을 받았다.

“하지만 충전이 안 되어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보조 계열 헌터 중에는 이런 걸 충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어포스가 순간이동석을 전투복의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는 적들이에요. 조심하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에어포스는 순간이동석을 충전하기 위해 협회를 향해 날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윤성은 폴리모프를 풀었다.

“업무도 거의 다 봤고. 퇴근할까?”

윤성이 서류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 순간.

-슉!

무언가가 윤성의 코앞에 튀어나왔다.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조그만 돌이었다.

“악!”

놀란 윤성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그걸 날려 버렸다.

-쾅!

사무실 문을 박살 내고 복도로 나가떨어진 그것은 순간이동석이었다.

“뭐야?”

윤성이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 에어포스가 백마 길드를 향해 다시 날아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곧장 대표 사무실로 들어왔다.

“급해서. 미안합니다. 혹시 순간이동석이 여기로 왔나요?”

“네.”

윤성이 순간이동석을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백마 길드를 나와서 약 1킬로미터 정도 갔더니 갑자기 순간이동석이 슉 하는 소릴 내면서 사라지더군요.”

“어떻게 된 걸까요?”

“아마 그 돌은 귀속된 물건인 모양입니다. 윤성 씨한테요.”

“귀속이요?”

“가끔 그런 물건들이 있습니다. 주인 외에는 쓸 수도 없고, 주인의 품에서 멀어지면 저절로 자동 소환되는. 그중 가장 급이 높은 물건은 아예 파괴되어도 일정 시간 후에 부활해서 주인의 곁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종단속도의 단검이 그런 경우였다.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신기한 듯 관찰했다.

“그럼 어떡하죠?”

“미안하지만…… 제가 하려던 일을 윤성 씨가 해주셔야겠군요.”

“이런.”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저도 더 이상 당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마스크맨이 아니면 누가 또 이런 일을 하겠어요.”

윤성이 포기한 듯 웃었다.

“순간이동석 충전이나 해주세요.”

다음 날 오전, 에어포스는 A급 힐러 이유정을 데리고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을 찾아왔다.

“문은 왜 이래요?”

구멍 난 문짝을 보고 이유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오늘 수리할 거예요.”

차희가 설명했다.

순간이동석의 충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간 요령이 필요해요. 근접전 헌터들은 이런 걸 잘 못 하지만, 힐링 스킬을 쓸 때나 인형술을 할 때처럼 사물에 마력 자체를 주입하면 돼요. 작은 상자를 이리저리 기울여서 안에 들어 있는 공을 바닥의 구멍으로 떨어뜨린다는 느낌으로, 마력 흐름을 잘 맞추다 보면.”

-치지직.

순간이동석이 파랗게 빛났다.

“이렇게 마력이 차오르죠.”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시도해 봐야지.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받아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윤성은 두루뭉술한 계획을 짜고 몇 가지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 차희와 에어포스가 보는 앞에서 윤성은,

<폴리모프 발동!>

핏빛야수로 변신했다.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요.”

에어포스가 소름 돋은 팔을 문질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윤성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순간이동석을 작동시켰다.

탑 로비.

윤성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귀금속상이었다. 씀푸와 함께 갔던 그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숍 주인이 사근거리며 물었다. 윤성은 배낭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뭐죠?”

숍 주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며칠간 윤성은 인터넷 헌터 용품 경매장에 1,000만 원 미만의 마법 아이템을 모조리 사들였다. 세텔론의 반지에 비해서도 훨씬 격이 떨어지는 그것들은 효과도 애매했다.

예를 들면 마법 공격력을 3% 증가시키는 목걸이, 하루에 한 번 라이트(D급) 시전할 수 있는 암릿, 순발력을 14점 증가시키는 귀걸이, E급 수준의 디버프 제거 스크롤, D급 보호막 마법을 쓸 수 있는 메이스.

지구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대단치 않은 물건들로, 하급 헌터들이 주로 쓰는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탑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세텔론의 반지를 보고 호들갑 떨던 이들을 생각해 보라.

“와아.”

예상대로 숍 주인의 눈이 커졌다.

“이것들을 어디서 얻으셨나요?”

“격전지에서요.”

“크. 대단하십니다, 전사님. 지금 판매하실 겁니까?”

“네. 그런데 그 전에 사장님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그걸 해결해 주시면 싼값에 드리죠.”

“도움이요?”

“저는 불법 이민자예요. 신원을 증명할 만한 게 없고 카드도 없습니다. 거래하기 전에 콜로라의 주민이 되고 싶어요.”

윤성은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전에 씀푸가 사용했던 카드에는 분명 씀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였지만 핏빛야수의 언어를 이해했던 것처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세계는 금융 시스템이 발달해 있고 이름이 새겨진 카드를 쓴다. 금융실명제를 운영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신분증’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 테지.

처음 씀푸를 만났을 때 그녀는 ‘강윤성’이란 이름을 두고 재밌어하면서, 삐츄아 대륙이나 롬펠 대륙에서 왔냐고 물었다.

작명법이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 ‘대륙’ 단위로 나누어져 있는 세계라면 ‘이민’이라는 개념도 있을 테고, 그럼 자연히 이민 관련법도 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반쯤 도박이지만.

“신분증을 만들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법을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혹시 불이익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어서…….”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은 전사들 보충으로 콜로라가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지 않습니까? 전사님처럼 강력한 분이면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그럼 어디로 가면 시민 등록을 할 수 있죠?”

“여기서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좀 가시다 보면 행정사무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면 됩니다. 근데 어느 대륙에서 오셨나요?”

“음……. 제 이름은 강윤성입니다. 어디쯤인지 감이 오시죠?”

“특이한 이름이군요.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롬펠! 맞죠? 저도 옛날에 롬펠의 챰실정 강가 방면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사귀었던 친구 이름이 금수박밀러였죠. 비슷하군요.”

아니, 뭐가 비슷해?

윤성은 황당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히 웃으면서 고향 생각에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행자가 보시기에 챰실정은 어떻던가요?”

“아름다운 곳이었죠. 끝없이 이어진 황록색 강물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요. 충설이 너무 많아서 고생하긴 했지만.”

“충설?”

“그 왜, 거대한 벌레들 있잖습니까.”

“아아, 그렇죠. 기억납니다. 제가 고향을 나온 지 오래되어서.”

윤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몇 개의 정보를 얻었다. 좋아, 앞으로 롬펠의 챰실정 강가 방면에서 넘어온 핏빛야수인 척해야지. 충설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암.

“혹시 제가 지금 시민 등록을 하면 페널티가 있을까요?”

“무슨 이유로 불법 이민 하셨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그렇죠.”

“왜 그러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음……. 그때는 제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어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뇌까렸다.

혹시 추궁당할까 봐 지레 겁먹은 윤성은 저도 모르게 자루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지금은 격전지에서 이런 걸 쉽게 수확할 정도의 힘이 있지만, 그때는 제 앞가림하기가 힘들었죠. 자, 이건 선물입니다. 받으세요.”

그가 목걸이를 내밀었다. 꽤 뜬금없는 선물이었다. 환심을 사서 어색한 대화를 무마해 볼 셈이었다.

다행히 숍의 주인은 의심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성이 내뱉었던 헛소리를 알아서 깔끔하게 소화해 주었다.

“비자를 발급받을 돈이 없었던 모양이죠? 롬펠 쪽에서는 뛰어난 전사가 아니면 돈을 벌 수단이 거의 없다고 듣긴 했습니다. 뭐, 그런 경우라면 지금은 뛰어난 전사니까 돈만 내면 쉽게 시민으로 받아줄 겁니다. 특히 요즘은 전사들 보충이 시급한 실정이니까.”

윤성은 숍 주인의 말을 잠깐 곱씹었다. 롬펠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군.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지금 돈이 전혀 없고 이 마법 물품들만 있는데, 이걸로 시민 등록에 필요한 돈을 대신 낼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내드리죠! 대신 전부 저한테 파셔야 합니다.”

주인이 신나서 윤성의 팔을 잡아당기며 앞장섰다.

숍 주인의 이름은 ‘빠뜨’였다.

귀금속을 파는 사람답게 점잖으면서도, 묘하게 헤프고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 자주 비즈니스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알아두면 좋겠지.’

윤성은 그와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기로 맘먹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행정사무소로 직행했다.

시민 등록은 정말로 어렵지 않았다. 이민에 필요한 돈은 50씰. 빠뜨가 카드를 긁었다.

이후에는 피를 뽑았다. 유전자 감식 및 등록을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다음엔 홍채 등록. 이 종족도 홍채 인식을 이용한 보안을 사용하는 모양이지?

마지막으로 서류를 몇 가지 작성했는데 윤성은 롬펠 대륙에서 온 것으로 썼고, 모르는 것 대부분은 빠뜨가 알려주었다.

“혹시 은행 카드 만드는 것도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음.”

빠뜨의 얼굴에 약간 난처한 기색이 보였다.

“지금 가면 대기 시간이 꽤 길 겁니다.”

“도와주시면 그 자루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반값에 드리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연이율 가장 좋은 은행으로 데려가 드리죠. 따라오십쇼.”

빠뜨는 윤성의 은행 업무도 도와주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대기 시간이 꽤 길었지만 둘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카드를 만든 후에는 윤성의 주머니에 있던 마법 물품의 처분만이 남아 있었다.

“원래 감정가는 4,200씰입니다.”

빠뜨가 신이 난 듯 덩실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윤성 씨가 반값에 주신댔죠? 그럼 2,100씰입니다.”

“2,000씰만 주세요.”

“오! 정말입니까?”

“네. 대신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이건 대단한 건 아니고.”

“뭐죠?”

“이곳에 오는 다른 전사들에게 제 얘길 해주세요. 여태까진 혼자서 일을 해왔지만 이제 콜로라의 시민이니까, 가능하면 레이드를 다른 전사들과 함께하고 싶거든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좋아. 미끼는 충분히 던졌다. 이제 뭐가 물리나 봐야지.

보조 계열 상급 헌터에게 순간이동석을 다시 충전해 달라고 하면 언제든 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미 탑에 한번 들어온 기회를 버리긴 아까웠다.

200층대에서 레벨이 올랐던 것을 생각해 보면 탑이 주는 경험치는 웬만한 상급 던전 이상이었다.

게다가 마수들의 숫자가 던전 하나에서 나오는 것보다 몇 배는 많기 때문에 훨씬 더 효율적인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 볼일은 끝났지만.’

윤성은 탑 211층에 들어섰다.

<210층대 레이드 시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