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레벨업 속도는 9.8m/s^2 123화
<빛의 탄환 발동!>
윤성은 에어포스가 날아가는 방향 앞쪽으로 섬광을 쏘았다.
일종의 조명탄인 셈이다.
섬광을 발견한 에어포스는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예요!”
윤성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에어포스 역시 버프를 가진 윤성보다도 능력치들이 높은 초인 중의 초인이었다.
한참 위 상공에 떠 있는 그녀와 윤성의 거리는 굉장히 멀었지만 그녀는 예리한 시력으로 결국 윤성을 발견했다.
-슈우우우.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에어포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지상.
“에어포스!”
한껏 반가워하며 달려드는 마스크맨.
그를 본 에어포스의 눈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는 윤성에게도 매우 뜻밖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에어포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왜 그러…… 헉?”
갑자기 에어포스가 윤성을 껴안았다.
당황한 윤성의 몸이 움찔했지만 에어포스는 놔주지 않았다.
“흑, 흑흑…….”
에어포스는 애처럼 훌쩍거렸다.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당신이 울어요?’
윤성은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하게 에어포스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시간이 몇 분이나 흘렀을까.
안겨서 울던 에어포스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눈빛이 바뀌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북한에 마수가 있습니다. 그걸 섬멸하러 가야 합니다.”
“이제 에어포스답네…….”
“네?”
“아뇨. 근데 그 마수 아마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예요.”
“신경 쓸 필요 없다뇨?”
윤성은 그간 벌어진 일들을 간단히 축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순간이동석을 써서 찾아간 탑과 핏빛야수와 함께 레이드를 했다는 것, 그리고 북한에서 핏빛야수로 변신해서 겪은 일들.
에어포스는 얘길 듣는 내내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마수로 변신해서 아오지에서 사람들을 탈북시켰다고?’
이 남자는 볼 때마다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였다. 갑자기 범람한 가루다 던전에 뛰어들어서 혼자 클리어해 버렸던 때도, 침식형 던전이 집어삼킨 헌터 스쿨을 구출할 때도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뛰어난 헌터가 나타났구나, 싶은 정도였지만 별안간 이집트에 가서 S급 재포니카 던전을 클리어하더니 일산 수복전에 외국인 용병과 함께 참전했다. 고맙다고 신분증을 줬더니 백마 길드 대표가 되어버렸고.
이번엔 침몰하는 안전 벙커에서 튀어나가 해저 3,000미터에 있는 마계 게이트를 클리어하더니 갑자기 나타나선 마수로 변신해서 북한에서 뭘 했다고?
“마수로 변신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에어포스가 물었다.
“나중에 한번 보여 드리죠. 아무튼 북한 쪽은 진정되었을 거예요. 제가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저는 몰라야 하는 것이니, 일단 북한 측으로 가긴 하겠습니다. 그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드리죠.”
에어포스는 윤성을 데리고 크라스키노의 행정자치단체 사무소를 찾아갔다. 데스크에서 에어포스는 한참 얘길 나누고 서류를 작성하고, 전화 몇 통을 돌리더니 윤성에게 돌아왔다.
“받으십시오.”
에어포스가 내민 것은 자동차 키였다.
“바깥에 차 한 대가 있을 겁니다. 그걸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수 있습니다. 행정상의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마스크맨의 S급 카드를 내밀면 전부 해결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탈북민들도 송환되지 않게끔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얘기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전 이제 북한으로 가겠습니다. 무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서울에서 봐요.”
윤성은 에어포스와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정말 긴 여정이었지만 이제 거의 끝났다.
윤성은 비로소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후, 윤성은 크루즈페리를 탔다.
크루즈페리를 운항하는 DBS사는 승객들을 S급 던전 범람으로부터 지켜준 영웅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었다. 한 푼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최고급 객실을 내주고 전용 승무원을 붙여주었다.
“또 침몰하는 건 아니겠지?”
블라디보스토크을 출항한 배 위에서 윤성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켄지도 없어서 수중 호흡 같은 마법을 걸어줄 사람도 없는데.
윤성은 바카디를 조금 마시고 선실로 내려갔다.
반가운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황혁수 씨?”
윤성이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하지만 황혁수의 머릿속의 윤성은 핏빛야수의 모습이기 때문에 윤성을 경계했다.
“제 이름을 어찌 아십네까?”
“음. 친구한테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제 황혁수가 아닙네다.”
“네?”
“이름을 황명수로 바꾸었습네다. 이제는 남한 사람입네다.”
“명수 씨요? 남한으로 귀순하시는 겁니까?”
“이제 북한에는 내 일없습네다. 남한에서 고저 새 삶을 살라고 합네다. 여기에서는 마전사한테 대접을 잘 해준다고 들었으니까요.”
“마전사?”
“헌터 말입네다. 저는 3급이었습니다. 남조선에선 C급이라고 하죠.”
윤성이 빙긋 웃었다.
“남한에서 취직하기 힘들면 백마 길드를 찾아오세요. 당신을 고용해 줄 테니.”
오후 다섯 시, 동해항.
크루즈에서 내린 윤성은 어마어마한 인파와 마주쳤다.
마스크맨이 살아서 귀국한다는 소식에 전국 곳곳에서 마스크맨의 팬들이 잔뜩 몰려들었던 것이다.
백마 길드의 헌터들이 시민들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표님!”
달려온 차희가 윤성의 어깨에 외투를 씌워주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몇 번이나 울었지만, 윤성을 만나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번쩍였다.
윤성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현장에는 정, 재계의 고위직들이 자리했고, S급 헌터 김성인과 차예빈, 그리고 최수혁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헌터로서 윤성의 희생정신과 생존력에 감동해 있었다.
뜻밖의 귀빈은 더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의 SS급 헌터 세르게이와 일본의 S급 헌터 켄지였다.
그들은 윤성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묵례했다.
에어포스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윤성과 최상급 헌터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은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함께했다.
정치인들이야 인지도를 위해 마스크맨의 영웅적 이미지를 소비하려는 것이었지만, 헌터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존경은 진심이었다. 윤성도 그것을 알았기에 피곤했지만 그들과 함께해 주었다.
하지만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느냐는 질문들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핏빛야수와 함께 레이드를 뛰고 북한의 아오지에서 강제 노역하는 사람들을 구출했다고 하면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 파급효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잡다한 일들을 마친 윤성은 밤 9시, 차희와 함께 차를 탔다. 차희가 준비한 회사 리무진이었다.
“내가 운전할게!”
차희는 윤성을 조수석에 앉히고 직접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너 운전 잘해?”
“걱정 마. 딱 한 번만 박을게.”
차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러 번 박아도 다치지만 않음 괜찮아. 나 말고 네가.”
“후후, 고마워. 근데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차희가 물었다.
이미 좀 전의 회식 자리에서 몇 번 나왔던 질문이었지만, 차희가 물으면 다르다.
차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윤성은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난 며칠간 겪은 일들을 압축해서 전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차희의 얼굴은 점점 충격으로 물들었다.
“진짜 죽을 고비 넘겼네.”
“여태 여러 번 넘겼지. 괜찮아.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면 적응되더라고.”
“근데 핏빛야수로 변신하는 건 지금도 할 수 있는 거야?”
“아마 그럴걸.”
“다음에 보여주라. 궁금해.”
“좋아.”
“근데 그게 있으면 옛날 포천 때 혐의도 이제 깨끗하게 벗을 수 있는 거 아냐?”
“글쎄. 그랬으면 좋겠네.”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차가 윤성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까지 왔다.
“한 번도 안 박다니, 대단해. 솔직히 S급 던전 들어갈 때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 운전 잘한다구!”
차희가 윤성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근데 넌 집에 어떻게 가려고?”
윤성이 물었다.
“아직 지하철 있으니까 지하철 타고 가지 뭐.”
“자고 갈래?”
“어……?”
차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뭘, 새삼스럽게 얼굴 붉히고 그래. 전에 협회랑 싸울 때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도 했잖아.”
“그치.”
차희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녀가 졸라서 윤성의 집을 썼고, 이번엔 윤성이 먼저 얘길 했다는 점이 다르다.
차희는 순순히 윤성을 따라서 아파트를 올라갔다.
집에 돌아가자 다윤과 소윤이 각자 방에서 뛰쳐나왔다.
오빠가 죽은 줄 알았다며 펑펑 우는 두 사람을 달래주는 것은 에어포스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소윤 역시 아리와 다윤, 차희로부터 얘길 전해 들어서, 이미 윤성이 마스크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윤성이 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물론 이제는 핏빛야수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있었다.
폴리모프.
핏빛야수의 시체는 없지만 핏빛야수로 변신하면 어느 정도 믿지 않을까? 특히 마스크맨 같은 S급 헌터가 하는 얘기라면?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핏빛야수 중에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이곳에 숨어 들어온 녀석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핏빛야수에 대한 얘길 할 수가 없다. 포시예트 만의 크라스키노에서 에어포스와 얘기할 땐 미처 생각이 짧아 그것까지 고려하지 못했었다.
만약 기자 회견장에서 폴리모프를 공개해 버린다거나 공식적으로 핏빛야수의 존재를 알리고 나서면 핏빛야수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것 아닌가.
핏빛야수는 어쩌면 헌터 협회 내부에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꽤 높다.
협회는 던전에 대한 정보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외국에서 이민 온 헌터들의 경우에는 출생 신원이 불분명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이 핏빛야수라면?
포천 던전 사건 때 윤성이 협회로부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혐오를 받았던 이유가 사실 핏빛야수의 조작 때문이라면?
핏빛야수의 존재를 역설하는 하급 헌터는 정체를 숨기려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일 수 있었다. 몰래 죽여 버리자니 정말로 뒤가 켕기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일 테고, 가만 내버려 두자니 계속 떠들어대고.
협회 내에 핏빛야수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충분히 윤성을 정신병자, 살인자, 불행의 아이콘 따위로 프레이밍하여 여론을 조작할 만했다.
아직 윤성은 핏빛야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핏빛야수에 대해 보고 겪은 것, 그리고 마스크맨이 사실 윤성이라는 것, 어느 정보도 섣불리 공개하기 어려웠다.
“주인님.”
윤성이 고민에 잠겨 있는데 아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왔다.
“주인님께서 물에서 나오시지 않아서, 제가 주인님의 차량을 잠수함으로 개조했습니다. 주인님의 사체를 수습하려고요. 죄송합니다.”
“뭐라고!”
“조크였습니다. 오랜만이라 감이 떨어지셨군요.”
“고맙다. 덕분에 집에 온 게 실감이 나네, 이놈아.”
고민을 날려 버리는 아리의 썰렁한 개그에 윤성이 피식 웃었다. 그는 아리를 구박하며 소파에 누웠다.
샤워를 마친 차희는 다윤이 빌려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소파에서 자려고?”
그녀가 물었다.
“응. 네가 침대 써.”
“아냐. 피곤할 텐데, 네가 침대로 가.”
“또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는군요. 같이 주무시면 될 것을. 대체 몇 살입니까?”
아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차희는 빙긋 웃더니,
“잠깐 이리 와봐.”
윤성을 안방으로 불러냈다.
-찰칵.
방문을 잠근 차희는 별안간 윤성을 와락 껴안았다.
윤성은 놀랐지만 이미 에어포스의 포옹에 한 번 면역이 된지라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널 이제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어.”
차희가 말했다.
“다시 만난 반가움에 충동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냐. 옛날부터 생각했던 거야. 넌 항상 목숨을 내놓고 다니니까. 얘기할 수 있을 때 못하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가 윤성을 꽉 안았다.
윤성에게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차희의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굳게 결심하고 왔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윤성의 품에서 나왔다.
윤성은 차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쪽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리 시스템에다 널 주인으로 입력해 둘게.”
윤성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