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레벨업 속도는 9.8m/s^2 121화
윤성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메시지창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전에 썼을 때는 차원이동에 대해 그냥 이동하시겠냐는 메시지만 있었는데.
그보다 모르는 계가 셋이나 있었다.
용계, 마이아계, 천계?
어쩐지 저쪽에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집으로 가야 할 때다.
‘아차, 그 전에.’
윤성은 상태창에서 버프 ‘폴리모프’를 확인했다.
아직 581,788초가 남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진 않았다.
만약 이 스킬이 핏빛야수들이 지구에서 사용하는 거라면 놈들은 인간으로 변신해서 가는 모양인데.
편의상 버프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을 풀어버리는 방법도 분명 있을 것이다.
윤성은 폴리모프 버튼을 눌렀다.
<폴리모프를 해제하시겠습니까? Y/N>
이럴 줄 알았지.
윤성은 Y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인간 강윤성의 모습으로 금방 돌아왔다.
이번엔 순간이동석을 켰다.
순간이동은 각 ‘계’의 마지막 위치로 이동한다.
윤성이 인계 지구에서 마지막에 위치했던 곳은 동해 북부의 분지, 해저 3,000미터였다.
“인계.”
이동하자마자 막대한 수압이 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아직도 랜딩 버프는 30일 넘게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윤성의 발끝은 해저 밑바닥에 닿아 있었다.
<랜더의 전투화 발동!>
윤성의 몸이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3,000미터의 물속이고 윤성의 레벨은 겨우 61이니까 한 번에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3,000미터를 헤엄쳐 올라가는 것보단 낫지.
윤성은 숨을 꾹 참고 남은 2,500미터를 수영했다.
몸이 올라갈수록 수압이 점점 줄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렇게 과격한 방법으로 해저를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윤성의 몸은 4,700점의 힘과 순발력을 가진 초인이었다.
물속에선 방향 감각이 없었다. 모든 방향이 새파란 물뿐이니까.
수직 방향으로 수면까지 올라온 윤성은 해류의 흐름을 타고 가장 가까운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어딘지 파악할 틈도 없었다.
그는 뭍에 기어오르자마자 탈진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
꿈을 꿨다.
왼쪽엔 핏빛야수, 앞엔 그룬헤잘드, 오른쪽엔 메탈로이드 마더를 두고 넷이서 포커를 치는 꿈이었다.
하지만 마더의 연산 능력이 너무 좋은 탓에 지금껏 밝혀진 패의 종류와 각자가 들고 있는 패의 개수, 남은 패의 개수 따위를 연산하여 안전한 카드들만 골랐다.
게다가 마더의 기억과 분석 능력 역시 생물의 한계를 한껏 뛰어넘었기 때문에 카드 뒷면에 묻은 때, 모서리 부분의 손상 정도 따위를 토대로 카드 한 장 한 장의 정체를 파악했다.
1라운드는 그룬헤잘드가 이겼고, 2라운드는 마더가 이겼고, 3라운드는 핏빛야수가 이겼지만 4라운드부터는 마더 혼자 계속 이겼다.
짜증 난 윤성은 마더의 메인보드를 후려갈겼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그룬헤잘드가 판을 엎자 핏빛야수가 마안을 번쩍이며 네일 블레이드를 휘갈겼다.
“으악!”
윤성은 식은땀에 잔뜩 절어서 일어났다.
진짜 별 개 같은 꿈을 다 꾸는구나.
땀을 닦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낡고 정돈되지 않은, 예스러운 가정집이었다.
윤성은 천천히 일어나서 미닫이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할아버지 한 명이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장작을 넣으면서.
21세기에 장작이라니?
잠깐만.
‘굉장히 불안한 기분이 든다. 여기가 블라디보스토크라면 장작을 쓰진 않을 거 아냐?’
“헤, 헬로우?”
윤성이 티끌 같은 희망을 가지고 영어로 인사를 했지만, 아쉽게도 불안한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윤성을 힐끔 돌아보는 노인은 전형적인 동양인 얼굴이었다.
“기래, 인제 일어났네?”
38. 아직 집에 가려면 멀었다
“네, 네?”
윤성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거 물에 빠져가지구서리. 몸이 폭싹 절었지비.”
“실례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노인이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왔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조난을 당해서.”
“내 어쩐지 차림새가 특이하다 했지비. 너 이름이 무어야?”
“마스크맨입니다.”
“이름도 특이하구만 기래. 근디 야 남쪽에서 온 아이라 때깔이 번지르르 하는구만, 너 멫살 났네?”
“멫살? 스물일곱입니다.”
“기래? 나이에 비해 아처럼 상깄구만. 니 밥 먹을 거가?”
“아…… 아뇨. 괜찮습니다.”
“왜? 밥 한술 먹으라. 시장하갔다, 야.”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현미밥 반 공기와 고구마 두 개였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니 굉장히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인가.
하긴, 배가 침몰하기 전에 저녁을 먹은 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윤성은 순식간에 밥 반 공기와 고구마 두 개를 먹어치웠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여기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흐허허허.”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 아새끼 묻는 것 좀 보라. 그거 알며는 내가 이라고 있갔니? 블라디보스토크가 그거 로씨야 얘기하는 거디?”
“네. 맞습니다.”
“일없다. 거기를 어찌 가갔니? 니는 아오지 안 가는 거를 목표로 하라.”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모른다니까 더 얘길 해봤자 시간 낭비다.
윤성이 인사하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문이 난폭하게 열리면서 무장한 군인들이 뛰어들었다.
“뭐, 뭡네까?”
놀라서 쳐다보는 노인을 향해,
-탕!
군인이 소총을 갈겼다.
가슴에서 피가 울컥 치솟으며 노인이 고꾸라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번졌다.
윤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간나 새끼!”
군인들이 윤성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따라오라!”
“내가 왜……?”
윤성이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이 간나!”
군인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총알이 윤성에게 날아왔지만 그의 코트나 피부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튕겨 나와 바닥을 구르는 탄환을 본 군인이 약간 당황했다.
<빛의 탄환 발동!>
윤성이 섬광을 쏘아 한 번에 군인 둘을 제압했다.
그리고.
-쾅!
남은 하나를 붙잡고 벽에다 박아버렸다.
윤성은 그의 머리를 질질 끌어다가 부엌의 아궁이 앞까지 가져왔다.
“악! 으아악! 아악!”
군인은 발버둥을 치면서 윤성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했지만 소용없다.
비각성 민간인의 힘이야 윤성에게는 조금의 위압도 주지 못했다.
“사, 살려주오! 살려주오!”
군인이 윤성에게 애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두, 두만강을 건너면 되오!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아오지 옆에 가면……끄아악!”
윤성이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이 노인을 왜 죽였지?”
“우리도, 우리도 명령을 받고 온 것 뿐이라요! 남조선 군인을 누가 은신시켜 주고 있다고 신고가 들어 왔습네다!”
“쳇.”
윤성은 아궁이 벽에 군인의 머리를 세게 박아버렸다. 피가 쭈르르 흘렀다.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윤성은 노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윤성은 재빨리,
-스킬석(힐링)
인벤토리에서 스킬석을 꺼냈다.
돌에 마력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힐링 스킬이 체득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스킬이기 때문에 사용법은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힐링 발동!>
서둘러 치유하기 시작했지만 노인의 호흡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내, 내 부탁 있네.”
노인이 윤성의 손목을 쥐면서 말했다.
“아오지에, 내, 내, 아들, 황, 황혁수……. 빼, 빼주…….”
“황혁수?”
“마, 마전사…….”
-툭.
노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윤성은 조용히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유언은 아마 확실치는 않지만 황혁수를 아오지에서 구해달라는 거겠지. 아오지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노역에 시달리다 죽는다고 했으니까.
밖으로 나왔더니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았다. 한 10가구나 있을까.
어린 소녀 한 명이 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윤성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아오지가 어딨는지 아니?”
“아오지요?”
아이는 윤성을 수상쩍은 눈으로 힐끔거리더니,
“저짝.”
꽤 멀리 떨어진 산기슭을 가리켰다.
“고맙다.”
윤성이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좀 고민이 되지만 어차피 북한에서 윤성을 위협할 만한 상급 헌터는 없을 듯싶었다. 물론 이 행동이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켜 남북 간의 관계가 절망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지만.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구출하면 괜찮겠지. 설마 마수가 날뛰는 걸 남한 탓 하진 않을 거 아냐.’
윤성이 스킬을 사용했다.
<폴리모프 발동!>
***
황혁수는 북한의 C급 헌터였다. 정확히는 이곳에서 순화된 언어로 ‘3급 마전사’라고 불렸다.
늙은 아버지와 둘이 살았던 그는 8년 전 각성자로 판정되어 당국에 불려갔다.
마력을 주입받고 각성했지만 살림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황혁수는 군에 입대하여 전방에서 마전사 군인으로 복무했는데, DMZ 너머로 남한의 노래들이 자주 들렸다.
그것들은 유쾌하고 신비했다.
항상 북한 당국에 대한 충성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게 하는 군무들과는 전혀 달랐다.
황혁수는 남한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게 화근이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황혁수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달랐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온데간데없고 군부 독재자들만이 남았다. 어버이 김일성은 이 나라의 경제 발전이라도 유도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4년 전, 황혁수의 불순한 사상을 누군가가 신고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 얘기해 준 사람은 손에 꼽는데, 역시 비밀이란 건 입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비밀이 아니게 되는 법이었다.
그는 아오지에 갇혔다.
자신보다 약한 비각성 군인들의 통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혁수에게는 한 푼의 임금도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매일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았다. 그것만이 아버지가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황혁수! 날래날래 내려가라우!”
아오지 탄광은 땅속으로 512m 깊이까지 들어가는 수직갱 탄광이었다.
갈탄을 채취하기 위한 작업자들은 제대로 된 장비나 보호구도 갖추지 못한 채 곡괭이 하나만을 들고 케지를 탔다.
수직 방향으로 갱을 내려가면 케지는 110m 지점에서 한 번 멈추고 다시 317m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가 412m에서 멈추고 512m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25명이 한 번에 케지를 타고 내려가는데 300m를 넘으면 사람들이 귀를 막고 침을 넘기면서 들어가야 한다.
512미터 지점.
무덤에 들어온 것 같다.
‘나는 매일 내 무덤을 판다. 더 깊이, 더 깊이.’
황혁수는 곡괭이로 바닥을 내려찍으면서 생각했다.
그때였다.
-쾅!
갱 입구 쪽에서부터 큰 소음이 들렸다.
“폭발이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
“저거 폭발이면 우리 다 여기서 끝나는 기 아니래?”
“너는 왜 모질한 소리를 하는 거가?”
“우리가 언제는 안 끝난 적 있었슴메?”
광부들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을 체념한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자들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좀 내려갈 테니 비키십쇼.”
위에서 들린 목소리는 깔끔한 서울 말씨였다.
광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키라니?”
“야, 야. 저 저거!”
-콰아아앙!
무언가가 갱 입구에서부터 수직으로 뛰어내려 랜딩했다.
그것은 1.8미터 키에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고, 눈동자는 붉고, 이는 날카로운 마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