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레벨업 속도는 9.8m/s^2 119화
“격전지는 마력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콜로라 행성에선 귀한 물품들도 흔히 구할 수 있다더군요. 전사님도 격전지에서 한탕 하신 모양이지요?”
“하하, 뭐 비슷합니다.”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반지의 출처를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냥 호기심에 물어보는 것 같았다.
어서 화제를 바꿔 버려야지.
“얼마쯤 할 것 같습니까?”
“1,300씰을 드리겠습니다.”
1,300씰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씀푸의 경악한 표정을 보니 제법 거금인 모양이었다.
감정사가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입금해 드리죠. 카드를 주십시오.”
감정사가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드요?”
“은행 카드. 아무 거나요.”
아무 거나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헌터 체크카드의 번호를 불러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난처하게 됐다. 어떡하지?
윤성은 고민하다가,
“제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하고 둘러댔다.
“그럼 카드 번호를 불러주세요.”
“그걸 잊어버렸어요.”
감정사가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레이드도 뛰는 듯한 다 자란 전사가 카드 번호를 잊어버려?
윤성의 난처한 표정을 본 씀푸가 갑자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카드였다.
“윤성, 이렇게 해요. 제가 전투복과 무기를 사드릴게요.”
“정말요?”
“대신 저랑 같이 200층대를 클리어해 주세요.”
“음?”
“제가 지금 거기서 막혀 있거든요. 하지만 이런 물건을 입수할 정도의 전사라면, 게다가 아무런 장비 없이도 이미 190층대까지 클리어하신 걸 보면, 당신은 혼자서도 200층대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군요. 절 좀 도와줘요.”
“음,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윤성은 씀푸의 돈으로 질긴 가죽 갑옷과 무시무시하게 생긴 클로 한 세트를 장만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씀푸가 말했다. 윤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씀푸가 내미는 순간이동석 위에 손을 포갰다.
‘핏빛야수와 같이 레이드를 뛴다니. 미쳤나 봐, 진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첫 랜딩에 성공했을 때부터 이 세상은 상식과는 너무 달라져 버렸다. 모든 게.
그래, 협회의 아웃사이더 E급 헌터 강윤성이 백마 길드 대표 마스크맨이 되기도 했는데. 핏빛야수랑 레이드 한번 뛸 수도 있지.
이거 끝날 때쯤 지구로 어떻게 가는지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착잡한 표정의 윤성 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몇 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0 to 200>
“200.”
씀푸가 말했다. 동시에 윤성의 몸은 번쩍하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은 아파트 발코니 같은 조그만 공간으로 이동했다. 안쪽 벽에는 마치 던전 게이트 같이 커다란 문이 달려 있었다. 지끈지끈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문을 등지고 서면 탑의 난간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이곳이 탑 200층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전경이었다.
<200>
<201>
아까와 같이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200으로 들어가면 또 죽은 아르동 남작이 있겠지.
‘근데 아까 마족의 몸에서 스킬석을 얻었을 때 분명히 <튜토리얼 종료>라는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튜토리얼이 대체 의미하는 게 뭘까? 무슨 훈련장이라도 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윤성.”
씀푸가 그를 불렀다.
“이 발코니는 201층으로 진입하는 대기실이에요. 이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201층 시작이죠.”
“그렇군요.”
“갈까요? 사실 당신의 힘에 묻혀 갈 수도 있지만, 저도 제 몫은 하거든요. 도와드리죠.”
“레이드는 위험한가요?”
“엄청나게 위험하진 않아요. 아무래도 실전이 아니고 격전지로 가기 전에 전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니까요.”
근데 아까 귀금속 숍의 주인이 지구를 격전지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핏빛야수들은 여기서 훈련을 마치고 지구로 가는 건가? 지구의 마수들을 사냥하려고?
확실히 가능성 있었다. 귀금속 숍의 주인도 ‘격전지는 마력이 풍부해서 조그마한 마법 아이템이 많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핏빛야수들은 헌터에 가까운 듯 보인다.
지구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외계의 헌터.
정말 소름 끼치는구만. 이런 게 다 있다니. 미국은 뭐 하는 거야? NASA 그놈들 지구방위대 아닌가? 영화 보면 외계인들 다 때려잡더니만, 지금은 아예 있는 줄도 모르네.
“윤성. 무슨 생각 해요?”
씀푸가 물었다.
“아니에요. 근데 200층에 아르동이라는 남작이 나오던데. 혹시 아세요?”
“지구의 여러 차원 중 하나인 마계에 존재하는 귀족이래요. 탑 제작자가 현실 고증을 어느 정도 했다더군요.”
생긴 건 고증 별로 안 된 것 같던데. 이름 빼고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는걸.
“그리고 200층까지는 튜토리얼 개념도 강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듯한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로비에 귀환돼요.”
씀푸가 묻지도 않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신기하군요.”
“안에 있는 적들도 사실 모두 홀로그램이에요. 실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지만, 전부 클리어하면 시스템값으로 바뀌면서 모두 리셋되죠. 부담 갖지 말고 들어가요. 201, 202층은 아예 몬스터가 나오는 위치까지 제가 아니까 걱정 말고.”
둘은 문을 열고 201층 안으로 들어갔다.
<200층대 레이드 시작.>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마치 좀비 무리에게 습격당한 실험실 같은 곳이었다. 레지던트이블 촬영 무대라고 해도 믿겠다. 옆에 있는 게 밀라 요보비치면 좋았을 텐데.
윤성의 꽉 쥔 주먹에 땀이 차올랐다.
곧 첫 번째 몬스터가 출현하는 위치였다. 씀푸는 201층에 처음 들어왔지만 이미 선배들에게 얘길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윤성에게 주의를 주려고 했다.
“윤성, 곧…….”
“잠깐.”
주의 같은 건 필요 없다. 윤성의 예민한 감각 신경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윤성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곧,
“끄어어어!”
연구실의 컨테이너 문을 박차고 거대한 구울이 튀어나왔다. 강철 컨테이너 문을 찌그러트리는 괴력. 날카로운 이빨. 굉장히 크고 무시무시한 비주얼.
그러나 윤성에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펑!
양손에서 동시에 발사된 섬광에 구울의 머리와 가슴에 한 발씩 구멍이 뚫렸다.
“키이이이”
구울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다가 뒤로 쓰러졌다. 다시 덤벼들 것으로 생각하고 양손에 빛의 탄환을 또 장착했던 윤성은 싱거운 기분으로 손을 내렸다.
옆을 돌아보니 씀푸의 입이 딱 벌어져 있다.
“방금 그게 대체 뭐죠?”
“제 마법입니다.”
“세상에! 그런 거 처음 봤어요.”
윤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씀푸와 함께 계속 진입했다.
윤성 혼자서도 클리어가 가능할 거라던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201층에서 나오는 구울들은 모두 윤성이 처음 보는 기이한 모습의 괴물이었지만 별로 대단치 않았다. 윤성에게는 하향 지원한 레이드였던 셈이다.
구울들은 리비아 국경지대에서 잡았던 것들보다 더 강했다. A급 상위권의 마수들. 하지만 윤성의 전투력은 그때보다 훨씬 높았다.
게다가 구울들의 움직임은 직선적이었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예측하고 피하거나 도망치는 등의 돌발적인 액션 없이 정직하게 정면으로 달려들기만 했다.
윤성의 입장에서는 훨씬 상대하기 편리한 적이었던 것이다.
-퓽! 퓽! 퓽!
마치 쌍권총을 쓰는 모양새로 양손에서 연속으로 발사되는 빛의 탄환.
윤성은 순식간에 수십의 구울을 쓰러뜨리며 빠르게 진행했다. 그 모습을 본 씀푸는 거듭 감탄했다.
다른 포인트지만 윤성도 동시에 감탄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01층에 진입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레벨이 올랐다.
시작부터 엄청난 숫자의 구울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이 빛의 탄환을 전부 맞아준 덕분이었다.
씀푸 역시 마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마수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마안이 번쩍였고, 난폭한 클로가 휘둘러지면 순식간에 적들이 종잇조각처럼 찢겼다.
특히 씀푸는 윤성이 알고 있는 그 스킬도 사용할 수 있었다.
<네일 블레이드 발동!>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으악! 잠깐!”
놀란 윤성은 긴급히 허리를 숙였으나 네일 블레이드는 너무 낮았다. 젠장! 윤성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의 호들갑을 비웃듯, 네일 블레이드는 마치 실체 없는 유령처럼 윤성의 몸을 사뿐히 통과했다.
물론 구울들을 상대로는 아니었다. 네일 블레이드를 맞은 구울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몸통이 조각조각 났고 지독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올랐다.
“어, 엄청난 테크놀로지…….”
“네?”
“아뇨. 아닙니다.”
“근데 생각보다 수확이 없군요.”
씀푸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수확이라면?”
“하긴, 당신 수준에선 200층대 마수들은 별로일수도?”
“네?”
“아무튼 다음 층으로 갑시다.”
씀푸가 층간이동석을 꺼냈다. 윤성은 자연스레 그 위에 손을 얹었고, 그들은 202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에서 윤성은 씀푸가 얘기했던 ‘수확’의 정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한참 사냥을 하던 도중, 그녀가 쓰러뜨린 마수를 집어 들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었다. A급 마정석이었다. 꽤 탐스러운 광채였다.
-와자작!
별안간 씀푸가 한입에 마정석을 씹어 부쉈다. 윤성이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
-꿀꺽.
그녀는 마정석을 삼켜버렸다.
“지금 뭘 한 겁니까?”
“뭘 하다뇨? 마정석을 먹었어요.”
핏빛야수들이 강해지는 방법이었다. 마치 윤성이 랜딩을 통해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성장시키듯, 핏빛야수들은 마정석을 삼킴으로써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설명을 들은 윤성의 가슴이 설레었다.
‘나도 한번 해볼까. 어쩌면 새로운 레벨 업 방법이 아닐까.’
윤성은 좀 더 적극적으로 구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레이드는 어느새 206층, 207층을 돌파해 208층에 이르렀다.
그동안 윤성은 레벨이 2만큼이나 더 올랐지만 마정석의 수확은 없었다. 그가 실망하던 바로 그때.
쓰러진 구울의 턱 아래에 B급 마정석이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윤성은 거칠게 마정석을 뽑아서 입에 넣고 씹었다.
-우득!
이 깨지는 소리.
“윽!”
깜짝 놀란 윤성이 마정석을 빼냈다. 침이 묻어 번들거렸다.
진짜로 이 끝이 조금 깨졌다. 오, 깜짝 놀랐네. 이게 핏빛야수의 몸이 아니라 본체였다면 꽤 공포스러웠겠군. 아니, 잠깐만. 설마 이대로 본래 몸에 돌아가도 이가 깨진 상태는 아니겠지?
“왜 그래요?”
윤성이 가만히 서 있자 씀푸가 물었다. 윤성은 마정석을 얼른 주머니에 넣어 감추면서 웃었다.
마정석을 씹어 삼키지 못한다는 걸 알면 혹시라도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정석은 못 먹지만 상관없었다.
랜딩으로 능력치 업을 할 수 있으니까. 윤성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209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턴 조심해요.”
209층을 절반쯤 진행했을 무렵 씀푸가 주의를 주었다.
“왜요?”
“중간 보스가 있거든요. 초거대 구울이에요.”
씀푸는 복도 문을 열면서 박살 난 책상과 쓰러진 서류 컨테이너 사이에 서 있는 거대한 크기의 구울을 가리켰다.
크기가 대충 어림해도 다른 구울들의 다섯 배였다.
“아니, 저게 구울입니까?”
“구울처럼 생겼잖아요. 조금 클 뿐이에요.”
그래, 로트바일러나 치와와나 둘 다 개과 동물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