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레벨업 속도는 9.8m/s^2 118화
윤성이 메시지창을 닫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해서 사물들이 정확히 분간이 안 갔지만, 곧 눈이 어둠에 적응했다.
전체적으로 중세 귀족들의 저택 내부 같았다. 양초를 쌓아놓은 화려한 샹들리에. 레이스 자수가 잔뜩 들어간 거대한 커튼과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 침대.
그 옆에서 발견한 것은 마족의 시체였다. A급 정도로 보였다.
입고 있는 옷차림이 고풍스러운 것을 보니 이 집의 주인인 듯싶었다.
윤성은 가까이 다가가서 마족의 시체를 뒤졌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없을까 싶어서였다.
그러자.
-띠링.
알람음과 함께 갑자기 허공에 돌 하나가 생성되어 툭 떨어졌다.
“뭐야, 이건?”
윤성이 돌을 집어 드는 순간.
<190층대 보스 아르동 남작을 처치하였습니다.>
<190층대를 클리어했습니다.>
<스킬석(폴리모프)를 획득했습니다.>
<튜토리얼 종료>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치지직.
갑자기 마족의 몸이 홀로그램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이놈 이름이 아르동 남작이랬나? 아르동은 이미 죽였는데. 게다가 이렇게 안 생겼다고. 동명이인인가?
극도의 혼란 속에서,
<200층 발코니로 이동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팟!
다시 발코니였다. 하늘은 우중충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훔쳤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윤성은 스킬석을 집어 들었다. 단단한 질감은 진짜였다. 마력이 느껴졌다. 정말로 이건 스킬석이었다. 하지만 폴리모프라니? 그런 스킬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럼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윤성은 스킬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순간이동석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아이템은 소모성이다.
한 번 쓰면,
-쩍!
마력 중심추가 갈라지면서 파괴되는 것이다.
윤성은 스킬석의 잔해를 발코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가 진단.”
상태창을 열어보았더니,
<강윤성>
<칭호 : 없음>
<힘 : 825(+3,909.71)
순발력 : 825(+3,909.71)
감각 능력 : 825(+3,909.71)
지능 : 825(+3,909.71)>
<버프 : 랜딩, 879,271초>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20>
<스킬 : 대천사의 채찍(사용 가능, 879,271초), 폴리모프(사용 가능) 빛의 탄환(사용 가능), 급속 냉각(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용조(사용 가능)>
스킬에 폴리모프가 추가되었다.
근데 랜딩 버프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그럴 수 있다. 안전 벙커가 완전히 해저 바닥까지 가라앉는 데 꽤 시간이 많이 걸렸으니까.
체감상 두 시간 정도는 낙하한 것 같았다. 아마 1일이 넘는 양의 버프 시간이 만들어져서 랜더의 손목시계가 보정해 주는 기본 값을 넘은 모양이었다.
<폴리모프 발동!>
폴리모프라는 게 그가 아는 것처럼 변신하는 마법이라면 사실 지금 여기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 그 무엇으로 변신하더라도 어딘지도 모를 이곳 탑에서 인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좀 전에 들어갔던 200층 던전의 보상으로 나왔다는 것은, 클리어한 후에 이걸 사용해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최소한 탑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폴리모프 발동!>
스킬을 사용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린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뼈마디가 욱신욱신 아파 왔다.
잠깐의 격통과 불편한 감상이 지나간 후.
윤성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경악해서 숨을 들이마셨다.
희멀건 가죽 손바닥.
날카로운 손톱.
어쩐지 익숙했다.
설마, 설마? 진짜냐?
윤성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셀카를 켰다.
“…….”
숨이 턱 막히는 기분.
카메라 안에 있는 것은 핏빛야수였다.
“이럴 수가. 핏빛야수가 되어버렸어?”
상태창을 열어보았더니,
<버프 : 랜딩(879,111초), 폴리모프(604,775초)>
라는 폴리모프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름이 돋아 몸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
200층 안쪽에서 강력한 소음이 일었다.
-치지직
그리고 전파 소리와 함께 마치 번개 한 줄기가 떨어지는 모양새로 빛이 번쩍이며 무언가가 200층 발코니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윤성이 뒷걸음질을 쳤다.
손가락 총을 겨누며.
‘설마? 설마?’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다.
200층 발코니에 핏빛야수 하나가 나타났다.
“휴우.”
핏빛야수가 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윤성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당신도 200층 깼나 보죠?”
“네……?”
“손가락은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윤성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처음 듣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핏빛야수의 말을 모조리 알아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다쳤어요?”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근데 아무런 장비도 챙기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 상태로 190층대를 클리어한 건가요?”
“장비요?”
“로비에 먼저 가서 장비부터 챙기시죠. 201층 가기 전에요.”
“로비 같은 게 있어요? 저 아래에는 풀숲뿐이던데. 바퀴만 잔뜩 나오고.”
“거긴 탑 0층이에요. 그 바로 위가 1층. 하지만 로비는 별개의 층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그 장비로는 201층은 무리예요. 일단 로비에 들러야 할 거예요.”
“로비는 어떻게 가죠?”
“마정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면서 로비에 간다고 하면 되죠.”
“로비로?”
<로비로 이동합니다.>
마력을 불어넣었더니 정말 작동했다.
순간이동석의 시스템이 발동하면서 윤성의 몸에서 하얀빛이 솟아올랐다. 마지막 순간, 윤성은 눈앞의 핏빛야수가 순간이동석을 꺼내는 걸 보았다. 핏빛야수가 말했다.
“로비.”
그의 몸도 하얀빛에 휘감겼다.
로비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8차선 도로. 기이하게 생긴 자동차들이 사방을 쏘다니고 있었다.
차량의 수와 그 속도에 비해서 묘하게 소음이 적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퀴가 없었다. 다들 공중에 10센티쯤 떠 있었다.
한 100년쯤 후의 미래 세계를 보는 기분이군.
-툭!
누군가 윤성과 어깨가 부딪쳤다. 핏빛야수였다.
“미안합니다. 바빠서.”
핏빛야수는 윤성을 지나쳐 황급히 달려갔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길을 돌아다니는 것도, 전부 핏빛야수였다. 무슨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나 제다이 같은 복장들이었다.
37. 핏빛야수의 세계
사방엔 거대한 건물들이 하늘을 찢어버릴 듯 솟아 있었다.
근데 하늘이 보인다니. 여긴 정말 탑 내부가 아니었군.
당혹스러워하는 윤성에게 0층에서 보았던 핏빛야수가 말을 걸었다.
“로비는 처음인가요?”
지금 보니 핏빛야수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여렸다. 특히 좀 전에 어깨를 부딪히고 ‘미안합니다, 바빠서’라고 했던 놈에 비하면 훨씬 예쁜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 그 녀석에 비해 생긴 것도 더 부드러웠다. 덩치도 약간 더 왜소하고. 이 종족도 성별이 두 개가 있는 모양이지?
“처음입니다.”
윤성이 대답했다.
“이곳은 우리 행성 콜로라를 재현한 가상 세계예요. 구축된 도시는 깔리앙뿐이지만. 여기선 콜로라 행성으로 갈 수도 있고, 탑으로 이동할 수도 있죠. 탑은 전사들을 트레이닝하는 곳이고.”
“그렇군요.”
솔직히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냥 이해를 포기했다.
빨리 순간이동석을 써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상당히 강해 보이시는데. 그동안 어디서 수련하신 거예요?”
“음……. 뭐, 여기저기.”
“이름이 뭐예요?”
“강윤성…… 입니다.”
윤성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강윤성?”
핏빛야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강하면서 이름은 귀엽군요.”
“당신 이름은 뭔데요?”
“씀푸.”
확실히 된소리에 거센소리로 떡칠해 놓은 이름이 세 보이긴 하네. 발음하기도 어렵고.
씀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삐츄아 대륙이나 롬펠 대륙에서 왔나 보죠? 그쪽 사람들은 이름이 다 이상하던데.”
“음, 뭐. 그렇습니다.”
“그럼, 다음에 201층에서 봐요.”
씀푸가 인사하고는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잠깐만요!”
윤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까진 호의적인 상대니까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다.
무작정 붙잡긴 했는데 지구로 가고 싶다고 무턱대고 얘기해도 괜찮을까?
“아직 볼일 있어요?”
씀푸가 물었다.
“으음, 장비는 어디서 구하죠?”
“엥? 당연히 레이드 숍 지구로 가서 구해야죠. 흠, 좋아요.”
그녀가 인심 쓴다는 듯 윤성의 어깨를 토닥였다.
“탑에 가신다는 것은 결국 전투를 함께하게 될 전우라는 소린데. 이왕 이렇게 된 것, 길 안내 좀 해드리죠. 따라와요.”
그녀는 윤성이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 하는 듯했다.
하긴, 핏빛야수의 언어를 사용했고 생김새도 핏빛야수인 데다 핏빛야수 전사들의 트레이닝을 도와준다는 탑에서 만났으니까.
씀푸는 이동하면서 윤성에게 말했다.
“사실 당신 정도면 250층대 이상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250층대?”
“네. 251층부터 260층 보스방까지를 250층대라고 부르잖아요?”
“그, 그렇죠.”
“당신도 저처럼 200층까지만 클리어한 모양이니 혼자서 간다면 201층부터 하나하나 깨야 할 테지만요. 근데 귀찮으면 250층대 레이드를 가는 팀을 찾으세요. 그들을 붙잡고 따라가면 돼요.”
씀푸가 그를 데려간 곳은 외벽이 유리로 장식되어 번쩍이는 건물 안이었다.
백화점 같은 느낌이었으나 내부는 생각보다 협소했고 그들이 들어간 1층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은 오직 두 종류뿐이었다.
전투복과 클로.
핏빛야수들은 클로 외에 다른 무기를 쓰지 않았다.
전투복은 디자인과 색깔이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밖에서 보았던 다스베이더 복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 괴상망측한 코트랑 전투화 같은 건 다 벗고 여기 있는 장비를 쓰는 게 좋을 거예요.”
씀푸가 랜더의 코트와 전투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괴상망측하다니.
약간 빈정이 상했지만 일단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주기로 했다.
“전투복이 얼마나 하죠?”
윤성이 씀푸에게 물었다.
“얼마나 갖고 계신데요?”
0원. 한 푼도 없다. 그의 지갑은 차희가 가지고 있었다. 물론 들고 왔어도 여기서 먹힐 화폐는 아닐 테고.
윤성은 자신의 장비들을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랜더의 코트, 랜더의 전투화, 랜더의 손목시계, 종단속도의 단검.
하나같이 S급 이상의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 외에 잡템도 몇 개 있었다.
마법 공격력 6%를 올려주는 세텔론의 반지, 이동속도를 4% 증가시켜주는 니담 망토, D급 방어막 마법을 쓸 수 있는 보호의 목걸이, 힘을 15만큼 증가시키는 카인 브레이슬릿.
죄다 옛날에 <헌터의 품격>에서 샀던 잡다한 물건들이었다.
니담 망토 같은 것은 인벤토리에 옛날에 처박아놓았고, 보호의 목걸이는 단 한 번도 작동시켜 본 적이 없었다.
카인 브레이슬릿이나 세텔론의 반지는 줄곧 착용하고 있었으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4,000점짜리 버프를 매번 쓰는 입장에서 별로 체감되진 않았다.
“이걸 팔 수는 없나요?”
윤성이 씀푸에게 세텔론의 반지를 내밀었다. ‘판다’는 말에 숍의 주인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씀푸는 반지를 만지면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뭐죠, 이게? 상당한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마력이 6% 증폭되는 반지예요.”
“세상에!”
탄성을 터뜨린 건 씀푸가 아니라 숍의 주인이었다. 그는 헐레벌떡 다가와 반지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저희 숍에선 판매하시기 어렵겠군요. 위층에서 거래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1층에선 전투복과 클로를 판매하고 2층에선 귀금속을 취급한다.
똑같은 마력이 담긴 물건이라도 전투복이나 무기보다 귀금속이 더 비싼 것은 핏빛야수의 세계에서도 똑같았다.
심미적인 기능이 훨씬 뛰어난 만큼, 전투 능력이 없는 돈 많은 부호들도 사려고 하니까.
그런 사정은 핏빛야수들의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층의 마법 귀금속 감정사는 현미경까지 동원해서 세텔론의 반지를 꼼꼼히 관찰했다.
“글자가 적혀 있는데, 아무래도 격전지에서 온 물건 같군요.”
“격전지요?”
“그 왜, 요즘 흥하는 레이드 지역 말입니다. 지구라는 행성.”
“아, 그런…… 가요……?”
윤성의 목소리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