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레벨업 속도는 9.8m/s^2 117화
구조대는 다섯 시간 후인 밤 한 시 반에 나타났다. 그들의 접근을 수신한 안전 벙커의 승무원들은 부력 스킬을 작동시켰다.
벙커는 천천히 떠올라서 이윽고 수면에 도착했다.
차희와 다윤은 구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윤성을 기다리기로 했다.
윤성은 아직도 해저 3,000미터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우 심란했다.
관광은 꿈도 못 꾸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켄지는 생존자 인터뷰를 요청하고 기자들 앞에서 마스크맨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렸다. 진짜 위험은 해저에 침몰하여 조난당한 게 아니라 S급 던전이 바로 옆에서 범람하는 것이었다고.
그 던전이 클리어 되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침몰 이틀째. 러시아의 SS급 헌터 세르게이를 필두로 한 정예 헌터 조직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해저 3,000미터에서 던전을 수색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헌터 팀은 크루즈페리가 침몰한 위치에서 잠수정을 타고 해저로 내려갔지만 너무 어둡고 물살이 강했다. 마력 검출기는 마력을 진단하고 있었지만 던전은 없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다고 하더라도 마력 잔파가 남아서 진단될 수 있습니다.”
1차 해저 조사를 마친 세르게이가 기자 회견에서 발표했다.
“그럼 던전 범람은 정말 있었다는 겁니까?”
기자들의 질문에 세르게이는 모니터에 사진 하나를 띄웠다.
그것은 S급 마족 기사와 A급 마족 병사들의 사체였다.
“저희가 현장에서 수습해 온 것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거의 부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근처에서 분명히 던전이 범람했고, 마스크맨이 이들을 처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들의 사체가 발견된 곳 근처에 게이트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마력 잔파만이 검출되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쏟아졌다.
뉴스를 보던 차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해저 3,000미터. 춥고 어두운 그곳에서 윤성은 홀로 S급 던전 범람과 싸우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벙커의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해당 위치에서 던전 게이트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게이트가 닫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했다.
마족들은 전원 범람한 후에 열과 오를 맞추어 선 후 한꺼번에 진군한다. 세르게이가 가져온 마족들의 사체 수는 S급 던전이 범람한 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이는 던전 범람이 진행형이었다는 뜻이고, 그들의 사체가 발견되었던 곳이 바로 게이트가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일대에는 게이트가 없었다. 그리고 벌써 침몰로부터 닷새째였다. 그렇다면 이미 마스크맨은…….
“우리는 마스크맨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겁니다. 해저 3,000미터에서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 그 영웅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세르게이가 묵념하듯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벙커 안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자신이 없었다. 마족들이 무섭다기보다 심해저 속으로 전투하러 뛰어드는 용기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다윤은 멍한 표정으로 호텔 방 구석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꿈같았다. 다정하고 장난기 많던 오빠가 갑자기 마스크맨이 되더니 물속으로 들어가 올라오지 않았다. 벌써 5일째.
“나 때문이야…… 내가 블라디보스토크 가자고 안 했으면…….”
다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괜찮아. 다윤아. 네 잘못 아냐.”
차희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다음 날 오후에는 에어포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중국으로 갔다가 차희에게 연락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곧장 날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늘 위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지만 동해 바다 저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어찌할 수 있을까.
공중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에어포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마스크맨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은연중에 그녀는 마스크맨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녀와 견줄 만한 유일한 헌터였기 때문에.
여태껏 한국의 최상급 헌터로서 짊어졌던 엄청난 부담감을 마스크맨은 상당 부분 나누어주었다.
헌터 스쿨에서도, 일산에서도, 원래는 에어포스가 했어야 할 일들 대부분을 마스크맨이 다루어주지 않았던가. 협회의 암적인 존재들을 뿌리 뽑아준 것도, 무너져 가는 백마 길드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모두 마스크맨이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빚지기만 했다.
그리고 에어포스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차가운 심해 속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적들과 싸우는 마스크맨의 이미지가 에어포스에겐 끔찍한 무력감과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
마스크맨이 해저에서 올라오지 못했다는 소식은 국내로도 전해졌다. 시민들은 백마 길드 앞에 모여 애도의 촛불을 밝혔다.
“저는 그분 덕분에 살아 있는 거예요.”
애도 현장에서 인터뷰한 유명 블로거이자 D급 헌터인 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구파발 던전에 들어갔던 모든 헌터가 말이에요. 여기 있는 A급 헌터 신차민도요.”
그뿐 아니었다.
샌텀 타워 범람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시민이 애도 현장에서 초를 켜고 절을 올렸다.
윤성의 아파트를 찾은 바토리는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소윤과 아리와 함께 TV 뉴스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도 윤성이 마스크맨이라는 걸 모르는 소윤은 ‘마스크맨 외 전원 구출’이라는 속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빠랑 언니는 괜찮겠다. 마스크맨도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바토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아리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해에 발생한 S급 던전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마스크맨이 혼자서 안전 벙커 밖으로 나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앵커의 브리핑이 전해졌다.
-러시아 헌터 측의 조사 결과 동해 북부의 분지에 발생한 S급 던전은 마계 타입으로 추측되며, 범람하는 도중에 마스크맨이 그들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던전은 클리어된 것으로 보이지만 마스크맨은 아직 실종 상태이며…….
“바토리!”
갑자기 아리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나흘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떠난 다음 날 범람했잖아!”
그가 바토리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고 온 것이다.”
“당신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주인님이…….”
“내 잘못?”
바토리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네가 똑바로 주인을 보필했어야지! 신하 된 입장에서 그게 마땅한 도리가 아니냐? 어째서 너는 그곳에 따라가지 않았느냐! 네놈이라면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을 터인데!”
“메탈로이드가 어떻게 인간의 선박을 타겠습니까? 주인님은…….”
아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바토리도 힘이 빠졌다.
“무, 무슨 얘기예요?”
당황한 소윤이 그들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쳇.”
바토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아리를 쏘아보고 현관을 나섰지만 문을 닫자마자 극도의 우울감이 그녀를 덮쳤다.
바토리는 아파트 계단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고작 인간 하나에 이처럼 감정의 동요가 심하다니. 바토리, 너도 아직 멀었구나.’
바토리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윤성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르동 남작의 영지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들쭉날쭉한 전투력에 마계의 귀족을 보고도 경례하지 않는 무례함이 있었다.
하지만 인계로 소환된 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바토리에게 돈을 주기도 했고 하인스를 용서해 주는 자상함도 보여주었다.
“쳇.”
바토리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윤성의 집을 빠져나갔다.
가문이 망한 이후로 이렇게 우울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큰일 났다.”
진짜 인생 역대 최고 최악의 위기다. 윤성은 뺨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물론 그동안 수없이 많은 절명의 순간들을 잘 견뎌내 왔지만 이번 건 답이 없었다.
탈출 직전 게이트가 닫혀 버렸다.
아무래도 핏빛야수의 사체에 뭔가가 있다. 거기서 나오는 파장이 게이트의 마력을 빠르게 붕괴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중간부터는 핏빛야수를 포기했다.
인벤토리 주머니에 사체를 넣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못 나가겠다 싶어 내다 버리고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트가 닫혀 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우주 공간에 나간 것처럼 주위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새까만 공간.
동시에 모든 감각이 빠르게 무뎌졌다. 그 전까지 적갈색 흙에서 느껴지던 메탄 냄새도, 게이트가 쏟아내던 요란한 소음도 모두 없어졌다.
이윽고 엄습하는 엄청난 한기.
액체질소 속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따닥따닥 얼어붙었다.
죽는다!
전신의 모든 신경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 더 있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절체절명의 순간.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빼 들었다.
마력을 주입하자 그의 몸이 두 발 아래에 게이트가 열렸다.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윤성이 떨어진 곳은 탑.
샐리단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탑으로 가는 순간이동석이 충전되어 있었다.
쓰르르르 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휴우.”
윤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순간이동석을 다시 쓰면 어디로 가게 될지 몰랐다. 게이트는 이제 완전히 닫혀서 없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순간이동석을 사용하는 순간 몸이 박살 나서 무(無)로 돌아가 버릴지도.
일단 주위를 좀 둘러보자.
탑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볼 생각은 원래 있었으니.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순간이동석>
1. 층간 이동 : 이동하시겠습니까? (0층 - 200층)
2. 차원 이동 : 이동하시겠습니까? Y/N
전에 했던 것과 같이 층간 이동 옵션이 나타났다.
“200층.”
윤성은 순간이동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면서 말했다.
다시 200층 발코니.
아르동 남작을 쓰러뜨렸던 1,900점의 버프를 이곳에서 획득했었다.
전에는 빨리 뛰어내리고 헌터 스쿨로 돌아가서 애들 구할 생각뿐이어서 주위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그냥 바로 발코니에서 점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코니는 기껏해야 아파트 베란다 수준의 크기였다.
사람 두 명이 누우면 꽉 찰만한 공간. 폭은 더 좁아서 두세 걸음만 떼면 꽉 찼다.
벽면에는 문 두 개가 달려 있었다. 거대한 양철 문.
<200>
<201>
둘에 적힌 번호가 달랐다.
윤성은 200이 적힌 문을 먼저 슬쩍 열어보았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경계심을 잔뜩 올리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그 순간.
-띠링
<200층에 입장하였습니다.>
<이미 클리어된 단계입니다.>
무슨 소리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