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레벨업 속도는 9.8m/s^2 114화
배는 불과 10여 분 후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하부에 뚫린 구멍으로 물이 들어온 것이다.
갑판에 고정되어 있던 벙커의 안전 고리가 풀렸다.
갑판이 기울면서 벙커도 한쪽으로 미끄러졌다.
“꺄아아악!”
벙커 안의 승객들이 한쪽으로 와르르 쏠려 서로 밀치고 깔고 앉았다. 윤성은 차희와 다윤을 벽 쪽으로 보내고 그 밖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을 막았다.
곧 벙커가 출렁이더니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지금 벙커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구호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우리에겐 60일분의 식량과 산소가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DBS 구조대가 이미 출발했습니다. 곧 이곳으로 올 거예요.”
“지금 침몰 중이라고요?”
윤성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런.”
“왜?”
차희가 물었다. 윤성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니까 아까 그 마력이 점점 진하게 느껴져. 던전이 바닷속에 있나 봐.”
“이럴 수가.”
“마스크맨!”
갑자기 누군가가 윤성을 불렀다. 켄지였다.
그는 윤성을 한쪽으로 끌고 나와서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마스크맨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했다.
“느끼셨습니까?”
켄지가 물었다.
“네.”
“A급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리고 타입도 알겠군요.”
“타입이요?”
“옛날에 비슷한 던전에 들어가 본 적 있습니다. 그 특유의 울렁거리는 마력 파장대가 있어요. 이 던전 타입은 마계입니다.”
망할.
북한을 노리는 A급 던전이 이거였군.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과 매우 가깝다.
지금 크루즈의 위도는 함경북도 청진시와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마족들은 어느 정도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고 수압도 잘 견디는 편인가 보지?
범람하면 곧바로 해류를 타고 함경북도를 덮치고, 그대로 평양으로 쳐들어가서 핵전쟁을 일으킬 셈이었나 보다.
에어포스, 괜히 중국에서 그만 기다리시고 그냥 집에 가세요.
던전 여기 있으니까.
먼저 발견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못 하겠군요. 물속이라서.
“그래도 마스크맨과 함께라 다행입니다.”
켄지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예요?”
“마스크맨은 수중에서 던전 레이드를 한 경험이 이미 있잖습니까? 그것도 S급을.”
그러긴 했지. 하지만 그땐 4,300점짜리 버프를 가지고 있었지. 지금은 버프가 하나도 없고.
어제 아침에 북한산에서 랜딩하여 얻었던 버프는 만 하루가 지나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곧바로 동해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일 랜딩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앗!”
그렇지, 버프를 추가할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랜더의 손목시계 발동!>
시계에는 마지막 버프를 반복하는 옵션이 달려 있었다.
메시지창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종 속력=158.29㎧, 낙하 거리=1,356.04m, 낙하 시간=16.76s>
<랜딩 성공!>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힘과 순발력,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1,936.04점. 남은 시간 3,600초. 일시적 랜덤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 소각 남은 시간 3,600초>
됐다!
버프 스킬이 물속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소각’인 게 아쉽지만, 일단 1,900점짜리 버프를 획득했다.
기본 능력치가 825점이었으니 2,700점 정도. 웬만한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꽤 강한 편이었다.
물론 일산 수복전에서는 순수 능력치를 합쳐서 거의 9,000에 육박했고, 재포니카 때도 5,000점에 가까웠다. 그 둘과 비교해 보면 초라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켄지도 있으니까 A급 던전 하나는 클리어할 수 있겠지?
윤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라?’
<버프 : 랜딩 3,507초>
버프 시간이 1시간밖에 안 된다. 어떻게 된 거지?
띠링.
<저장된 버프의 재생은 1시간으로 제한됩니다.>
“이럴 수가.”
마일하이클럽 랜딩 같은 장기간의 버프를 고스란히 재생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1시간이라니.
1시간 안에 A급 던전 하나를 클리어할 수 있을까?
***
마계, 그룬헤잘드의 저택.
한 여자가 그룬헤잘드의 방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인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라센 북부에서 가장 강한 마족 중 하나. 몰락한 귀족 가문의 유일한 여식. 바토리였다.
그녀가 지난번에 해독한 내용들은 작전의 일부분뿐.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그룬헤잘드의 방에 보관하고 있는 작전서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난번에는 S급 마족 샐리단이 그룬헤잘드의 방을 지키고 있어서 일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룬헤잘드의 충직한 신하이자 라센 지역 최강의 기사였다. 정면으로 승부하면 바토리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바토리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전서, 작전서…….’
그녀는 그룬헤잘드의 사무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서류들이 잔뜩 있다.
하나씩 열어서 확인한 끝에,
“찾았다.”
<인계 침공 계획서>
<핵전쟁 유발 작전 일지>
바토리는 두 리포트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점점 그녀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내가 잘못 알았다.’
던전은 북한 땅 내에 생성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동해 바다 북부에 생성되었다. 그리고 던전의 레벨은…….
“S급?”
어떻게 이런 걸 열었지? 이 정도면 그룬헤잘드의 수하인 마법사 요르진도 충분히 들어가고 일반병으로 참가하는 마족들의 수준도 매우 높을 것이다.
아니, 잠깐만.
“샐리단은 어디에 갔지?”
바토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샐리단이 요르진과 함께 그 던전에 갔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항상 그룬헤잘드의 방을 지키던 놈이었다. 그놈이 자리를 비웠다면 분명 던전에 갔을 거다. S급 정도의 던전이라면 둘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테고.
요르진이라면 몰라도 샐리단은 안 된다. 최근 만난 마스크맨은 옛날과 같은 힘이 없었다.
일산에서 엘리지아와 싸울 때는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뿜어냈지만 얼마 전 백마 길드에서 보았을 때는 그 힘의 2할 정도에 불과했다.
이 작전서들을 빨리 전해줘야 한다.
바토리는 얼른 작전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앗?”
무언가를 느낀 그녀의 손이 굳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작전서를 꺼내어 다시 확인했다.
“이럴 수가.”
던전 범람 날짜를 잘못 알았다.
이전에 입수했던 서류가 옛날 서류였던 것이다.
새로 갱신된 이 작전서에 적힌 바로는 던전 난이도가 S급일 뿐만 아니라, 범람 날짜는 오늘이었다.
-쿠구구구구.
S급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서 먼저 머리를 빼 든 것은 S급 마족이었다. 재포니카보다는 전투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그 대신 훨씬 더 지능적이고 조직적이다.
그룬헤잘드의 군대.
그는 첩보병이었다.
마족은 물속을 헤엄쳐서 벙커를 향해 이동했다.
완전히 심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벙커에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족은 벙커 주위를 헤엄치면서 자세히 탐색했다.
S급 정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요르진이나 샐리단에 비하면 훨씬 낮았다.
마족은 게이트 쪽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문제 될 만한 적은 없습니다, 대장님.
게이트가 쿠르르 울리더니 안에서 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나타났다.
라센 지역 최강의 검객. S급 샐리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대체 뭘 확인한 거냐?”
“예?”
“피해라! 멍청아!”
샐리단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퓨웅!
섬광 한 줄기가 마족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마족이 벙커에서 느꼈던 큰 마력은 켄지의 것이었다.
마스크맨은 해류가 흐르는 방향의 해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해류를 따라 윤성의 마력을 덮어서 자연스럽게 은신했던 것이다.
샐리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잔재주가 통할 만한 상대는 아니구나. 내가 전력을 다해서 상대해 주마.”
그가 장검을 빼 들고 윤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물속인데도 헤엄치지 않고 잘 걷는군.”
윤성이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하지만 너는 이제 못 걷게 될 것이다.”
샐리단이 장검을 똑바로 치켜세웠다.
순간, 그는 예리한 검날을 휘둘러 붉은색 오러 블레이드를 방출했다.
코르소가 쓰던 스킬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상위였다.
엄청난 마력 풍압에 날려갈 것 같았다.
하지만.
-콰앙!
윤성은 빛의 탄환을 쏘아서 샐리단의 스킬을 파괴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진 놈이……?”
당황한 샐리단이 검을 꽉 움켜쥐었다.
약 5분 전.
벙커가 추락하기 직전.
윤성은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공기 중에서 추락하는 것과 물속에서 추락하는 것.
그 둘은 유체 속에서 지면을 향해 떨어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았다.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윤성은 떨어지는 벙커 안에서 살짝 점프하여 랜딩 자세를 한번 잡아보았지만 버프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와 다르지 않았다.
벙커가 해저면에 닿는 순간이 바로 랜딩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수심이 몇 미터 정도 되죠?”
윤성은 승무원에게 물었고, 그녀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이곳은 동해 북부의 분지예요. 수심은 3,000미터가 넘습니다.”
이거다.
윤성은 그때부터 랜딩 자세를 취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지면에 닿을지 모르니까.
“오빠 뭐 해?”
그의 포즈를 본 다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지만,
“오빠 지금 중요한 일 하니까 건들지 마.”
윤성이 간단히 물리쳤다. 곧 차희가 다윤을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윤성의 예상은 적중했다. 잠깐 시간이 흐른 후 벙커가 바닥에 닿은 것이다.
어마어마한 힘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낙하 높이는 3,329미터.
랜딩 버프 기본 값이 보정되어 3,909점의 버프가 생겼다.
게다가 윤성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능력치가 800점이다.
‘마일하이클럽 랜딩 때와 비슷하군.’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약간 위였다.
버프 스킬도 바뀌었다.
물속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소각’ 대신에,
<대천사의 채찍 : 마족에게 치명상을 가하고 제압하는 채찍을 소환해 휘두름.>
끝내주는 스킬이 나온 것이다.
마족 레이드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런 예쁜 스킬을 주는 건지.
윤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벙커 벽면을 바라보았다.
이 너머에서 막대한 마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켄지 씨.”
윤성이 켄지를 불렀다.
“켄지 씨도 느끼고 계시죠?”
“범람 말입니까?”
“아마 우리가 탄 크루즈가 침몰한 것도 저 던전 때문일 겁니다. 던전에서 나온 마력 파장에 동력실의 마정석 엔진이 공명해서 터진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선체 아래에 구멍이 났겠죠. 승무원들은 암초에 충돌한 것도 아니고 엔진이 저 혼자 터져서 침몰하는 거라고 차마 얘기를 못 했겠지만.”
“던전이 범람해서 마족들이 나오고,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 이 벙커는 금방 파괴될 거예요.”
“그렇겠죠. 하지만 어떻게…….”
“제가 나가서 막겠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