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레벨업 속도는 9.8m/s^2 113화
소윤은 학교도 가야 하고 여권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는 끼지 않았다. 약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데려가지 않아 마음이 놓이는 부분도 있었다.
애초에 윤성 입장에선 놀러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윤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지만.
윤성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먼저 씻었고, 7시에 다윤을 깨웠다. 차에 타고 출발한 시각은 약 8시. 강원도 동해역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일찍 나선 것이다.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
처음 와본 곳이었는데 상당히 한적하고 전원적인 느낌이 났다. 건물들이 높지 않고 다들 옆으로 펑퍼짐해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인천공항처럼 사람이 붐비지도 않았다.
발권 데스크를 발견한 윤성은 잠깐 다윤을 차희에게 맡기고 화장실에 들어간 다음 방독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마스크맨!”
다윤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마스크맨도 크루즈 타나 봐! 언니! 세상에.”
“그러게. 너무 신기하다!”
차희가 박자를 맞춰주었다. 사실 윤성의 정체에 대해서 다윤이한테까지 숨겨야 하나 싶긴 한데, 애들이 악의 없이 신나서 떠들어대는 게 소문으로 번질 수 있으니 아직 주의하는 중이었다.
물론 다윤이가 그럴 애처럼 보이진 않지만.
윤성은 S급 카드를 내밀고 신원을 확인한 후에 방을 확인했다. 1인실 하나, 2인실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성은 두 개의 방을 모두 샀다. 1인실은 자신이 쓸 것이었고, 2인실은 차희와 다윤에게 줄 생각이다.
다시 숨어서 마스크를 벗고 나타난 윤성은 두 사람을 데리고 출국수속을 했다.
금속 탐지기와 마력 탐지기 모두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헌터 용품들은 전부 인벤토리에 넣었으니까.
크루즈는 2층에 주요 시설이 모여 있었고 1층은 주로 객실이었다.
들어서자 홀 앞에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고, 그 옆에 조그만 면세점이 있었다.
“난…… 트랩에 붙잡혔어. 이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발이 되어버렸어.”
차희가 떨리는 손으로 면세점을 가리켰다.
“나, 나도. 오빠…….”
다윤이 그걸 보고 따라 했다.
“어휴, 알았어. 한번 가보자.”
윤성이 두 사람을 데리고 면세점으로 이동했다.
다윤은 딱히 뭔가를 살 생각은 아니었고 어떤 걸 파는지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차희는 다윤에게 뭔가를 사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면세점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파는 거라곤 담배와 술 몇 종류, 향수 몇 종류, 화장품 몇 종류인데, 그마저도 모두 대단치 않은 것뿐이었다.
차희의 까다로운 기준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
두 여자는 금방 흥미가 식어서 윤성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갑판 가보자.”
차희가 말했다.
장거리 운전을 한 윤성은 약간 지쳐 있었지만 차희의 폭발해 버린 흥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윤도 너무나 신난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겨울바람이 꽤 찼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추위 속에서 러시안 다섯 명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비워놓은 캔이 꽤 많았다.
출항하자마자 이 시간부터 벌써 술판이라니. 대단하군.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맥주를 파는 자판기가 나타났다. 러시안들이 여기서 맥주를 뽑은 건가?
차희는 맥주 한 캔을 뽑으려고 했지만 자판기는 엔화만 먹었다.
크루즈페리는 동해항, 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라 일본 돗토리현의 사카이미나토까지 연결했다. 자연스럽게 일본인 승객이 많아졌고, 때문에 엔화를 먹는 자판기가 있었던 것이다.
환전을 하나도 하지 않은 세 사람에겐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다.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카드 인식이 안 된다니.”
윤성이 한탄하듯 말했다.
그때.
“Jidō hanbaiki o tsukaimasu ka(자판기를 쓰려고 하십니까)?”
일본어.
마법책으로 통역 스킬을 배운 윤성의 귀에는 그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가 들어본 것 같다.
고개를 돌린 윤성은 헉 소릴 내면서 깜짝 놀랐다.
“켄지!”
“아, 칸- 코쿠, 분이시니까?”
일본 S급 헌터 켄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라, 한국어 잘하시네요?”
“칸코쿠에 자주 왔습니다. 약간 할 수 있습니다.”
“그랬군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네?”
아차, 켄지는 강윤성을 모른다. 레이드 때 보았던 것은 마스크맨뿐이었으니.
“그, TV에서 봤거든요. 일산 레이드에 참여하셨던 분 아니세요?”
“아. 그것이 바로 저입니다.”
켄지가 멋쩍은 듯 웃었다.
“이 나라에 도움이 되어서 영광. 영광! 이었습니다.”
“저희야말로 켄지 씨가 도와주셔서 감사하죠.”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도 한바이키를 쓰려고 하셨습니까?”
켄지가 자판기를 가리켰다.
“위, 위 워나 비어…….”
차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영어로 말했다.
“아사히.”
그녀가 자판기에서 아사히 맥주 캔을 가리켰다.
그러자 켄지는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넣더니 아사히 캔을 하나 뽑아주었다.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차희가 환히 웃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거예요?”
윤성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행임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얼마나 머무세요?”
“머무세요?”
머물다라는 단어를 모르는 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나 stay하세요?”
“아. 5일.”
켄지가 손 하나를 쫙 펼쳤다.
괜찮군. 여차하면 북한에서 던전 범람이 일어났을 때 켄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건 뜻밖의 횡재군.
윤성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똑같은 생각을 한 차희가 눈을 마주치고는 빙긋 웃었다.
세 사람은 배 안을 조금 더 살펴보았지만 딱히 재밌는 것은 없었다. 사우나가 있었고, 목욕탕을 찾았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사를 했는데 김치찌개가 15,000원이었다.
“바가지 요금 실화……?”
차희가 충격으로 손을 떨었다.
하지만 음식은 다행히 맛은 있었다. 엄청 뛰어난 건 아니지만 먹을 만한 정도.
저녁을 먹은 후에는 2층 맥주바에 가서 술을 조금 마셨다.
“나도 먹을래.”
다윤이 졸랐다.
“너 아직 미성년자잖아.”
“한 달 후면 성인인데?”
“한 모금만 먹어, 그럼.”
윤성이 맥주를 조금 주었다. 맛을 본 다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엑. 뭐야, 이걸 왜 먹어?”
“먹다 보면 맛있어.”
“그래, 삭힌 홍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취향은 존중할게.”
윤성은 풋 웃으면서 차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재밌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윤아, 그럼 이거 먹어볼래? 이건 과일주라서 좀 달콤해.”
차희가 ‘스트롱제로’라고 적힌 일본 맥주를 내밀었다. 복숭아 맛이었다.
알코올 함량이 9%.
놀란 윤성이 중간에서 술을 낚아챘지만 다윤이 떼를 썼다.
한 모금만 먹어보겠다고.
“왜 애한테 이런 걸 주냐.”
“어차피 대학 가면 필름 끊길 때까지 먹어볼 텐데, 우리랑 있을 때 술 배우는 게 낫지.”
차희가 턱을 괴고 말했다.
스트롱제로는 다윤의 입에도 꽤 맛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취기가 확 올라오자 놀라서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밤이 늦었다.
몇 캔 비우지 않았는데 차희와 다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피곤한 탓이 컸다.
윤성은 두 사람을 데리고 객실로 이동했다. 2인실에 둘을 집어넣고는 자신도 방으로 들어왔다.
자고 일어나면 블라디보스토크일 것이다.
윤성은 침대에 올라갔다.
에어포스는 중국에서 잘 하고 있을까? 그렇겠지?
-달칵.
스탠드의 불을 껐다.
옆방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윤성이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쿠우웅!
배의 바닥면에서부터 강력한 충돌이 전해졌다. 크게 진동하는 몸체. 무언가가 넘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독마스크.
윤성은 반사적으로 마스크를 꺼내어 얼굴에 썼다.
랜더의 전투화와 코트도 빠르게 신고 입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배의 충돌을 느낀 다윤이었다. 그녀는 방독마스크를 반쯤 내려쓴 윤성을 보고 몸이 굳었다.
‘들켰다.’
윤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괜찮아. 혹시 오빠가 마스크맨 아닐까 생각은 했었어.”
“정말?”
“TV에서 보던 그 괴물 로봇이 우리 집에 있었으니까. 걔가 날 구해준 적도 있는걸. 작은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리고 그냥 느낌이 딱 그러니까.”
“뭐야? 아는데 여태 모른 척 했어?”
“오빠가 숨기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근데 소윤이는 진짜 몰라. 그냥 협회에서 개발중인 거니까 가정용이나 TV 나오는 전투용이나 다 비슷하게 생긴 건줄 알더라. 아리도 연기 잘 하고.”
“잘했어. 근데 우리 일단은 배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부터 확인하자.”
다윤과 함께 복도로 나오자 놀란 얼굴의 차희와 마주쳤다.
그녀 역시 방금의 진동을 느끼고 나온 것이다.
“아까 그게 무슨 소리였지?”
윤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아. 객실에 계신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어였지만 윤성에겐 그 의미가 명확히 전달됐다.
이후에 일본어, 러시아어, 한국어, 중국어로 차례로 직원들이 번역해 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얘기를 듣는 윤성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배 후미에 뭐가 부딪쳤대.”
“뭐가?”
“그걸 모르겠어. 아무튼 전부 3층 갑판실로 올라오래.”
다윤은 잔뜩 겁에 질렸다.
“우리 어떡해?”
“걱정 마. 오빠 마스크맨이잖아.”
윤성이 말했다. 차희가 힐끔 쳐다보았다.
“방금 들켰어.”
“여태까지 숨긴 것도 대단한 거였어.”
차희가 말했다.
세 사람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블라디보스토크 바로 앞, 동해 북부 위치엔 원래 암초가 많대.”
“하지만 그래도 크루즈페리가 하루 이틀 여길 다닌 것도 아니고 충돌하는 건 이상하잖아.”
“침몰하는 건가?”
“어떡하지? 구명보트 있겠지?”
“무서워.”
저마다 각자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게 윤성에게 들렸다.
차희가 윤성의 팔뚝을 꼭 쥐었다.
“걱정하지 마.”
윤성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나.
“꺄아아아악!”
저쪽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가 기울고 있었다.
“여러분!”
승무원들이 달려와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안전 벙커로 피하세요!”
“안전 벙커로 피하세요!”
“따라오세요!”
지금은 파도가 꽤 거칠었다. 구명보트를 내렸다가는 보트가 전복되어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한 안전장치가 신세대 크루즈에는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안전 벙커.
승객 전원이 타도 거뜬하며 마법 두 종류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산소 생성.
또 하나는 부력이다.
하지만 부력 마법은 지금 작동하지 않았다. 배터리 소모량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배터리는 A급 마정석 열 개. 이 마정석을 전부 산소 생성에만 쓴다면 승객 전원이 최대 60일간 생존 가능한 양이 되었다.
벙커에는 식량도 그만큼 존재하며, 5,000미터 수압에도 견디기 때문에 심해로 떨어져도 문제없었다.
그곳에서 산소 생성으로 최대한 버티다가 구조대가 가까이 근접하면 부력 마법을 써서 한 번에 수면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부력 마법 같은 걸 초장부터 썼다간 이틀 안에 배터리가 방전될 테니까.
“와아아!”
승객들은 온갖 소란을 떨면서 벙커를 향해 달려갔다.
윤성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동하면서 윤성이 차희에게 말했다.
“뭐가?”
“뭐와 부딪힌 건지 승무원들이 알려주지 않았잖아?”
“응.”
“승무원들도 모르는 것 같아. 그리고 이 길을 수십 년째 운항 중인 배고 베테랑 선장과 선원들인데 갑자기 암초에 부딪혔다는 것도 말이 안 돼.”
“하지만 그럼 이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마력이 느껴져.”
“뭐?”
윤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루다 던전 때랑 비슷한 느낌이야. 던전 범람 직전의 우울한 그 느낌.”
“맙소사.”
“일단 벙커에 타자.”
윤성은 두 사람과 함께 벙커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