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레벨업 속도는 9.8m/s^2 112화
35. 랜딩은 지면 기준
윤성은 다윤이를 보내고 9시 30분에 백마 길드에 돌아왔지만 아무런 일도 손에 안 잡혔다.
그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수능 뉴스를 읽기만 했다.
‘국어가 어렵다.’
‘수학 가형, 1등급 컷 88점 예상. 역대급 불수능!’
따위의 자극적인 뉴스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다윤아, 힘내라.’
-똑똑.
사무실 문이 울리고 차희가 들어왔다.
“대표님.”
“으악. 간지러.”
윤성이 소름 돋는 팔을 긁었다.
차희는 후후 웃으면서 윤성의 옆자리로 왔다.
“회사에선 이렇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으음, 다른 사람 있으면 그러자.”
“그럼 지금은 그래야겠네. 밖에 손님 왔어요.”
“손님?”
“안으로 들일게요.”
사무실이 꽤 넓었기 때문에 윤성의 자리에서 문까지는 거리가 좀 된다.
차희는 정장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무릎 바로 위까지 오면서 허리가 잘록한 정장 치마와 재킷이 꽤 맵시가 났다.
걸어가는 그녀의 까만 구두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들어오세요.”
차희가 문을 열어주자 바토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여느 때보다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네. 마계는 잘 다녀왔어?”
윤성이 인사했다.
“네가 백수같이 집안에서만 뒹굴거리는 하등한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구나. 이렇게 큰 조직의 대표였다니.”
“최근에 그렇게 되었지. 그리고 집 안에서만 뒹굴거렸던 이유는 일감이 안 들어와서였어. 백수는 아니었고.”
“어째서지? 그렇게 강한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구파발 던전 때도 일감이 왔었고 그 전에도 코르소와 카다시안킴과 함께하는 B급 던전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휴가를 내고 이집트에 다녀왔더니 일감이 싹 사라졌다.
“정말. 좀 이상하네. 그치, 차희? 네가 협회에서 난리쳐서 이제 나한테 일감이 오기 시작했었는데 말이야. 이집트 갔다 온 후에 공백이 좀 길었네.”
윤성이 말했다.
“에어포스가 대표님 정체를 알았으니까 하급 던전 주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임무를 정리해 준 거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바토리 있을 때는 말 놔도 되지 않을까? 얘가 뭘 어쩌겠어.”
“좋아.”
차희가 빙긋 웃으며 바토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바토리 씨는 어쩐 일로 오셨죠?”
“그룬헤잘드의 공격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어딘데?”
윤성이 기다렸단 듯이 물었다.
“범람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나흘 후다. 던전은 이미 생겼다.”
“그룬헤잘드는 엄청나게 강하다며? 그럼 웬만한 헌터들로는 안 될 텐데. S급 팀을 구축해야 하나?”
“아니. 이번 던전은 A급 수준이다. 그룬헤잘드가 보내는 정예 첨병이 올 거다. 그룬헤잘드 본인이 넘기에는 마력 파장의 진폭이 너무 좁지.”
“겨우 A급 던전이라고?”
“그래. 하지만 그룬헤잘드는 꽤 곤란한 위치에 던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걸 레이드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거다.”
“어디기에?”
“북한.”
“켁.”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북한을 노린다는 얘기만 들었거든. 개성 한복판일 수도 있고, 백두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심이었다면 북한도 이미 던전의 존재를 알고 있겠지. 범람은 나흘 후니까 아마 외곽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왜 하필 북한이지? 북한은 상급 헌터가 별로 없고 국제사회가 레이드하기는 힘든 곳이니까 그런가?”
바토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룬헤잘드는 오래 전부터 인계에 대해 연구해 왔다. 이곳을 지배하고 마력을 키워 마왕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서.”
“그 연구의 결과가 북한이야?”
“일단 폐쇄적인 국가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모른다는 장점이 있지. 그룬헤잘드는 북한을 직접 지배할 거다.”
“맙소사.”
“물론 장기적으로 통제할 순 없겠지. 아무리 인계를 연구했다 해도 국가를 운영할 정도의 지식은 없을 테니까. 내가 입수한 작전서에서는 군부 청사를 잠깐 점령하는 게 목표였다.”
“청사를?”
“핵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바토리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 두들겼다.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질 전쟁의 규모를 계속 키우기 위해서다. 전쟁이 길어지고 커지면 대부분의 헌터들이 죽을 테고, 그룬헤잘드는 그때에서야 인계에 내려와 힘들이지 않고 모든 걸 얻어가겠지.”
차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북한도 정신머리가 박혀 있다면 감당 못 할 던전이 출몰하면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 러시아나 중국에.”
“그렇겠지?”
일단 혼자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윤성은 곧바로 에어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에어포스는 하던 업무들을 그대로 내려놓고 비행 스킬을 써서 순식간에 백마 길드로 날아왔다.
덕분에 백마 길드 정문의 헌터들은 또 한 번 놀라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아까는 S급 헌터 바토리가 오더니 이번엔 에어포스?
“마스크맨 대표님을 보러 왔습니다.”
에어포스가 헌터들에게 얘기하자 그들이 대표 사무실로 전화를 돌렸다.
잠시 후, 헌터 중 하나가 공손히 에어포스를 모셨다.
에어포스가 들어오자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경험이 많은 에어포스가 먼저 구체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던전이 이미 생겼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가 있겠군요. 북한에 던전이 생겼는데 그걸 북한이 알고도 자력으로 구제하려고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경우. 그리고 던전이 생긴 것을 북한 정부도 모르고 있는 경우.”
“전자라면 북한이 혼자 해결할 수 있나요? 북한에 상급 헌터가 몇 명이나 있죠?”
윤성이 물었다.
“A급이 일곱 명, B급이 삼십 명. 그 아래는 집계된 적 없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 측 첩보로 얻은 정보이기 때문에 확실한 건 아닙니다. S급이 있을 수도 있죠.”
“흠. 잘하면 A급 던전 하나는 혼자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하등한 헌터들로는 어찌할 수 없다. 던전 레벨이 A급이라고 해도 안에서 나오는 녀석들은 그룬헤잘드가 보내는 최정예다. S급 헌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룬헤잘드?”
바토리가 끼어들자 에어포스가 관심을 보였다. 처음 듣는 단어도 있는데다가, 바토리가 그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어포스는 아직 바토리가 마족이라는 걸 몰랐다.
바토리 역시 그걸 새삼 깨닫고는 모자를 고쳐 썼다.
“바토리는 최근에 마계에 들어가서 첩보 활동을 했거든요. 그래서 마계에 대해 잘 알죠.”
윤성이 간단히 해명해 주었다.
“대단하시군요. 마계는 순간이동석으로 가신 겁니까?”
“그렇다.”
“근데 북한 정부가 혼자서 그 던전을 처리하기 어려울 거라면, 북한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협력을 요청해야 하지 않아요?”
차희가 말했다.
“그게 바람직하죠. 말씀해 주신 대로 외교부를 통해서 그렇게 추진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뭐랄까요.”
에어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주먹이 닿을 수 있는 범위의 계획을 세우고 싶군요.”
“만약 북한이 우리와 협력해 준다면 던전을 미리 발견한 경우엔 큰 문제가 안 돼. 우리가 가서 해결하면 되니까.”
윤성이 정리했다.
“하지만 북한이 아직 던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북한 측에 던전 발생을 통지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돼.”
“북한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테고, 던전 수색을 맡길 가능성은 훨씬 더 낮겠지.”
차희가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외교부를 통해서 북한에 연락하는 것에 더해서.”
에어포스가 말했다.
“중국에요?”
“만약 북한에서 던전이 범람하면 그들이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할 상대는 중국입니다. 그 다음은 러시아겠죠. 저는 중국 헌터국과 접촉해서 그곳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정보를 빠르게 입수한 후에 즉각 대처하는 식으로 가죠.”
“그럼 제가 러시아로 갈게요.”
윤성이 손을 들었다. 차희가 깜짝 놀랐다.
“러시아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어. 만약 에어포스 쪽에서 먼저 정보가 들어오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저도 정보가 들어오면 즉각 알려 드릴 테니.”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알아둬야 할 정보가 있다.”
바토리가 말했다.
“그룬헤잘드에게는 충직하고 아주 강력한 신하가 둘 있는데, 하나는 샐리단이라는 불세출의 기사고 하나는 요르진이라는 마법사다. A급 던전에서 그 둘이 넘어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넘어온다면 주의해야 한다.”
“강한가요?”
에어포스가 물었다.
“당신 정도라면 일대일은 문제없어. 하지만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요르진은 정신 조작에 능하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놈이 군부 청사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북한 수뇌부는 그룬헤잘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봐야 해.”
“그럼 그놈이 군부 청사에 진입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최선의 수는 던전이 범람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고.”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차희, 러시아로 가는 비행편을 알아봐 줄래?”
“저는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먼저 외교부에 이 일을 알리고요. 전 비행 스킬을 쓰면 되니 곧 출발하죠.”
에어포스가 먼저 떠났고 바토리도 잠시 후 일어났다.
“난 추가 정보를 더 수집해 보겠다. 뭔가 확인되는 게 있으면 알려주마.”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비행편이 죄다 결항이었다.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는 것이다.
차희는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부 측에서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미 에어포스가 상황을 전달해서 행정 당국도 발칵 뒤집어져 있었지만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는 걸 어쩌겠는가. 출항이 불가능한 것은 대통령 전용기도 똑같았다.
소식을 들은 윤성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겨우 나흘밖에 안 남았다고 했는데.
어느덧 오후 5시 반이었다.
-뚜르르.
윤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다윤아.”
-오빠! 나 시험 잘 봤어!
“그래? 다행이네! 축하해!”
일부러 힘줘서 말했지만 영혼 없는 축하였다.
‘나흘 후에 핵전쟁이 날지도 모른단다.’
윤성은 착잡한 마음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걸 눈치챈 차희가 생수를 내밀었다.
물을 마시는데 다윤이 휴대폰 너머에서 소리쳤다.
-오빠! 우리 내일 블라디보스토크 갈래?
“엥? 내일?”
-내일! 크루즈 할인한대!
“크루즈? 배?”
-응! 나 크루즈 여행 해보고 싶었어. 아까 집에 오는 길에 검색해 보니까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배가 있더라고.
“근데 내일 배편을 오늘 살 수가 있어?”
-안 되나?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간다! 내가 전화해 볼게.”
-어?
“끊어. 이따가 전화해.”
윤성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을 검색했다. 이런 건 또 생각을 못 했네.
블라디보스토크로 크루즈를 타고 가면 20시간 만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한의 대사관은 모스크바에서 굉장히 멀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북한이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할 때 모스크바에 연락할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그 대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영사관으로 연락할 것이다.
‘다윤이 최고…….’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칼 같은 타이밍이었다.
윤성은 곧장 DBS 크루즈페리사의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내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 예약할 수 있나요?”
-내일이요?
직원이 황당한 듯 물었다.
-몇 시에요?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출발하는 크루즈 아무거나요.”
-내일 배편에 방이 있긴 한데 전날 예약은 안 돼요.
윤성은 차희를 쳐다보았다.
“안 된다는데. 혹시 우리가 배를 하나 살 수는 없나?”
“그게 더 오래 걸릴 거야. 줘 봐.”
차희가 윤성에게 전화를 넘겨받았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입니다. 대표님께서 중요한 업무가 있어 블라디보스톡에 가셔야 하는데요.”
-백마 길드요?
“네.”
-대표님이면……. 마스크맨이 간다고요?
“그렇습니다. 웃돈은 얼마든 얹어드리겠습니다. 급박하고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데, 꼭 내일 출항해야 합니다.”
-어어…….
“앞으로 백마 길드가 블라디보스톡에 지부를 두고 러시아의 헥사 길드와 몇 가지 계약을 하고 무역을 진행할 겁니다. 귀사에서 화물선도 운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주시면 물류 운송에서 최우선 순위로 고려해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제 선에서 처리할 일은 아니라서…… 곧 이 번호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전화를 끊자 윤성이 감탄했다.
“너 대단하다. 근데 헥사 길드? 거기랑 계약한다는 건 진짜야?”
“응. 무역을 할 건 없지만. 나중에 하게 될지도 모르지, 뭐.”
뚜르르르!
전화가 울렸다.
차희가 얼른 받고는 네, 네, 하는 대답을 몇 번 반복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성에게 말했다.
“갈 수 있겠어. 인터넷 예약은 안 되니까 내일 오후 두 시까지 동해항으로 오래.”
“내일 가는 거야?”
“응.”
“좋아.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길드 운영 좀 부탁해.”
“다윤이도 데려가?”
“일단 데려가지 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 상황에서 혼자 가는 것도 좀 그래. 가서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 넣어놓고 여차하면 나 혼자 북한 가서 볼일 보고 오는 거지.”
“다윤이 혼자 거기 있어도 괜찮을까?”
“흠. 너도 같이 갈래?”
“그래도 돼?”
차희가 반색했다.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냐. 알지?”
윤성이 주의를 주었다.
“그럼. 놀러 가는 건 다윤이지.”
“좋아. 그러고 보니 내가 가는데 네가 안 따라가는 것도 좀 웃기긴 하다. 같이 가자고. 배편은 법인 카드로.”
“나 그럼 집에 가서 짐 싼다?”
“그래. 나도 갈게.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테니까 같이 출발하자고.”
윤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서 짐부터 싸고 출국 준비를 해야 한다.
갈아입을 옷만 몇 개 챙기고 나머지는 필요하면 전부 사자. 이집트 갔다 와서 여권 어디다 뒀더라? 그러고 보니 다윤이는 여권 있나? 있으니까 가자고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