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레벨업 속도는 9.8m/s^2 111화
일주일 후.
업무에 조금 적응될라 치면 새로운 일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대형 길드 대표의 비서직. 차희는 협회에서보다도 더 피곤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몸은 괴로워도 윤성과 함께 일하는 게 즐거웠다.
차희는 길드 내의 일부 직원들과 어느 정도 얼굴을 트고 말을 섞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을 질문을 하곤 했다.
“차희 씨는 대표님 얼굴 봤어요?”
차희는 전부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하지만 다들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두 사람이 워낙에 가까워 보였고 마스크맨과 차희가 함께 사무실에 들어간 후에 마스크맨의 마스크가 바뀐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스크맨의 얼굴을 봤을 거라고 확신하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사람이 득실댔다.
꽤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차희는 그조차도 즐거웠다.
최고의 직장이었다.
***
북한산의 조그만 암자 성불사.
찾아오는 등산객이 꽤 있지만 스님들은 객들에게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학명 스님은 매일 아침 찾아오는 한 객이 계속 신경 쓰였다.
처음 그를 만났던 것은 새벽 다섯 시.
동이 틀 무렵의 어스름 때문에 세상이 푸르고 안개가 자욱한 때였다.
그 남자는 멀쩡한 등산로들을 내버려 두고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보십시오!”
학명 스님이 소리쳤다. 산에서 절벽을 찾아 자살하려는 사람 중에 저런 이들이 가끔 있었다. 특히 이런 이른 새벽 산행을 한다면.
“그쪽은 길이 없습니다!”
학명 스님은 황급히 남자를 뒤쫓아 오르며 외쳤다.
“괜찮아요!”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스님은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방독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저런 걸 쓰고 산을 오르다니?
그때부터 이 기이한 객은 매일 새벽 다섯 시면 꼬박꼬박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가 오르는 방향은 분명 봉우리 정상 방향인데, 그 너머는 경사가 가팔라서 실족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산을 올랐다.
“휴우.”
봉우리 꼭대기에 이른 윤성이 찬 공기를 뱉었다.
매일 산 오르는 게 귀찮긴 하지만 여기보다 좋은 랜딩 명소가 별로 없었다.
인적도 드물고 높이는 무려 776미터였다.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최고의 랜딩 포인트였다.
엘리지아 전을 거친 윤성의 레벨은 이제 58.
<랜더의 전투화 발동!>
전투화를 쓰면 580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솟는 몸. 차가운 새벽 공기가 머리카락을 날렸다.
<랜더의 코트 발동!>
체중 역시 5,800㎏으로 늘릴 수 있었다. 무게가 늘어나면 종단속도의 한계가 올라가서 최종적인 낙하 속력이 빨라졌다.
추락하기 시작하면 랜딩 자세를 잡았다.
주먹 하나를 땅을 향해 길게 뻗고, 두 다리는 자유롭게 구부렸다. 남은 팔은 중심을 잡는 에어포스 랜딩 자세.
많은 시행착오 끝에 착지 지점 역시 최적화하였다.
가장 깊이가 푹 꺼지는 이곳.
<랜더의 코트 발동!>
낙하 직전에는 체중을 1㎏으로 줄여야 했다. 5,800㎏으로 땅에 부딪혔다간 지면이 상하니까.
-쿵!
바닥의 흙과 먼지들이 사르르 피어올랐지만 충격이 그리 크진 않았다.
윤성은 눈앞의 메시지들을 읽었다.
<최종 속력=158.29㎧, 낙하 거리=1,356.04m, 낙하 시간=16.76s>
<랜딩 성공!>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힘과 순발력,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1,936.04점. 남은 시간 86,400초. 일시적 랜덤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 소각 남은 시간 86,400초>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근력과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15점>
<낙하 거리 임계 돌파. 영구적 스킬 획득 : 현재 레벨이 낮아 이 낙하 구간에서는 두 번째 스킬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스킬 : 늪지를 ‘중금속 폭우’로 바꾸시겠습니까? Y/N>
“중금속 폭우?”
백마중이 쓰던 스킬이었다.
백마 길드의 대표가 되었으니 이 스킬을 지니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윤성은 Y버튼을 눌렀다.
자, 그럼 오랜만에.
“자가 진단.”
<강윤성>
<칭호 : 없음>
<힘 : 825(+1,936.04)
순발력 : 825(+1,936.04)
감각 능력 : 825(+1,936.04)
지능 : 825(+1,936.04)>
<버프 : 랜딩, 86,386초>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0>
<스킬 : 소각(사용 가능, 86,386초), 빛의 탄환(사용 가능), 급속 냉각(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용조(사용 가능)>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군. 최근까지 너무 강력한 버프들을 들고 뛰어다녔기 때문인가.
이집트에서 얻은 4,300점 버프를 가지고는 한 달 넘게 활동했고, 엘리지아 수복전에서는 하루짜리지만 무려 8,000점에 이르는 버프를 먹기도 했다.
그걸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윤성은 휴대폰을 켰다.
‘이런, 늦겠군.’
오늘 랜딩이 생각보다 조금 더 걸렸다. 빨리 돌아가야지, 중요한 날인데.
전국적으로 중요한 날이었다.
수능.
사실 고등학생들 시험 본다고 비행기도 못 뜨게 잡고 경찰 배치하고 호들갑 떨 정도로 수능에 애들 인생이 걸리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다윤이가 수능을 본다.
윤성은 이 사실을 미리 차희에게 알려주며 다윤이를 시험장까지 데려다줘야 해서 출근이 조금 늦는다고 했다.
차도 밀릴 테고 애가 입실한 후에 시험장에서 회사로 돌아가면 출근 시간인 9시는 넘을 것 같았다.
“긴장돼?”
윤성이 차 안에서 다윤에게 물었다.
“아니.”
“정말?”
“뭐, 그다지. 아예 수능 포기하고 헌터 학교 갔던 적도 있는데 뭘.”
“미안.”
“오빠가 뭐가 미안해.”
다윤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망하면 아르바이트하면서 재수하면 되지.”
“알바 안 해도 돼. 오빠 돈 많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고마워.”
“수능 끝나고 하고 싶은 거 있어?”
“성형수술.”
윤성이 다윤을 힐끔 돌아보았다.
“네가 뭔 성형이야…….”
“눈만 좀 찝자, 오빠. 요즘 눈은 다 해. 졸업 전에 완성해야 한다고.”
“완성이라니, 뭐 작품 만드냐?”
“그리고 여행도 가고 싶어.”
“어디로?”
“블라디보스토크.”
“보통 일본, 중국, 유럽, 이런 게 나오지 않냐?”
“남들 다 가는 데 가면 재미없잖아.”
“누구랑 갈 건데?”
“글쎄. 오빠랑 소윤이랑 가도 좋고. 차민이랑 가도…….”
“안 돼.”
“농담이야. 우리끼리 가자.”
“근데 차가 막히네.”
윤성이 도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늦진 않겠지?”
다윤이 약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다 방법이 있지.”
윤성이 비행 버튼을 눌렀다.
쿠구구구 하는 엔진 소음과 함께 차가 천천히 떠올랐다.
잔뜩 밀려 있는 차들 머리 위를 롤스로이스가 날아가는 모습은 꽤 임팩트 있는 장면이었다. 아래에서 사람들 몇이 사진을 찍어댔다.
그 정도로 아직도 이 차는 보편화되질 않았던 것이다.
운동장에 정차한 후,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이제 들어갈게.”
“시험 잘 보고 와.”
“응. 저녁에 봐.”
다윤이 손을 흔들고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다윤을 들여보낸 윤성은 가슴이 벅찼다.
쟤가 수능을 다 보다니.
‘노트북도 준비해 뒀다, 다윤아. 잘 보고 와라.’
어쩐지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
윤성이 감동을 만끽하고 있는데,
“다윤아!”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윤성과 다윤이 100여 미터 정도 떨어졌을 시점이었다.
신차민이었다.
그는 윤성을 보지 못했지만 윤성은 깜짝 놀라 차에 숨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고 온갖 신경을 집중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엿듣는 기분이라 좀 미안하긴 하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 너 회사는?”
다윤이 물었다.
“너 백마 길드 취직했다며? 지금 여기 있으면 지각하는 거 아냐?”
“맞아. 근데 하루쯤 지각하지 뭐! 아무도 모를 거야.”
대표가 안다, 이 새끼야.
차 안에서 윤성이 눈살을 찡그렸다.
신차민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예쁘게 포장된 조그만 초콜릿 다섯 개였다.
“어젯밤에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오졌지? 이거 경매 내놓으면 S급 아이템 각이라고. 효과는 먹을 때마다 지능 100씩 상승.”
깜찍한 선물에 다윤이 환하게 웃었다.
원래 입이 작은 앤데 한껏 벌어진 입꼬리가 꼭 하트 모양이었다.
‘쟤가 저렇게도 웃네.’
사윗감을 데려온 딸을 둔 아빠의 기분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달아버린 느낌.
‘지각은 한 번만 봐준다. 나도 오늘은 지각이니까.’
윤성은 차를 몰아 밖으로 빠져나갔다.
***
백마 길드 정문.
수많은 헌터와 직원들이 말을 잃고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이 흐르는 긴 흑발. 인형 같은 외모에 창백한 피부.
옛날 양식의 특이한 옷차림.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장검 한 자루와 활 한 대.
“마스크맨을 데리고 와라. 그놈이 여기 대표라고 들었다.”
마계에서 돌아온 바토리는 윤성의 집을 찾아갔지만 윤성 3남매는 모두 집을 비우고 없었다.
소윤은 학교에, 다윤은 수능 시험장에, 윤성은 길드에 있었으니까.
그 망할 놈의 메탈로이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서 또 신경전을 벌이고 나온 길이었다.
바토리는 윤성을 찾으러 협회에 가려고 했지만 길가에서 ‘마스크맨, 이제 백마 길드 대표로’라는 헤드라인의 신문 1면을 발견했다.
때문에 곧장 윤성을 만나러 백마 길드를 찾아온 것이다.
“근데 저희 대표님이 아무나 만나자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하등한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일산에서 감염지를 파괴한 S급 헌터들의 모습이 언론에 다루어지지 않았단 말이냐?”
그제야 헌터들은 바토리를 알아보았다.
레이드 팀 출범식 때 바토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엔 이국적인 외모만 박혀 있었고, 지금 한국어를 줄줄 쏟아놓는 눈앞의 이 여자가 그 바토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정말 똑같이 생겼다.
“잠, 잠깐만요.”
헌터들이 대표 사무실로 연락을 돌리려는데 입구에 차희가 나타났다.
“바토리?”
그녀를 알아본 차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누구냐?”
“마스크맨 집에서 한번 뵈었죠. 기억 안 나세요?”
“아. 기억나는구나. 마스크맨의 애인이었지?”
“음, 그건 아니고요. 저는 마스크맨의 비서입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차희가 말을 조심했다. 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전에 윤성의 집에서 바토리를 만났을 때는 그녀에게 밀린다는 느낌에 잔뜩 위축되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감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에 감동한 차희가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마스크맨을 만나러 왔다. 나를 그에게 안내해다오.”
바토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