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속도는 9.8ms^2-107화 (107/260)

# 107

레벨업 속도는 9.8m/s^2 107화

이집트와 달리 국내에서는 사람들 몰래 털 만한 상급 던전의 개수가 제한된다.

실제로 윤성은 귀국한 후에 상급 던전이라곤 꼴랑 두 개밖에 털지 못했다.

그렇다고 더 작은 던전에 가자니 이제 C급 이하에서는 레벨이 잘 안 올랐다.

결국 순간이동석을 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탑과 메탈로이드계는 지난번에 다녀와서 순간이동석의 마력을 충전해야 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볼 만한 것은 마계뿐.

하인스는 분명 이게 그룬헤잘드의 저택으로 이어진 순간이동석이라고 했다.

이를 쓰기는 좀 찝찝했다.

그룬헤잘드 저택에 가서 마족들을 적당히 때려잡았다고 치자. 그룬헤잘드가 생각보다 너무 강해서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면? 그다음에 바토리가 나타나서 그룬헤잘드가 곧 지구를 칠 것 같으니 함께 마계로 가서 이런저런 작전을 펼치자고 한다면?

그룬헤잘드가 언제 인계를 침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계로 가는 순간이동석을 방전시키는 것은 꽤 큰 모험이었다.

엘리지아 전투가 끝난 후에도 일일 랜딩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능력치 전반은 꽤 올랐지만 여전히 A급 상위권 수준이었다.

빠르게 성장하려면 결국 던전 클리어가 답인데.

-똑똑똑.

한참 고민에 잠겨 있는데 소윤이 방문을 두들겼다.

“왜?”

“오빠! TV 봐봐!”

“또 세상이모저모인가 뭔가 하는 거 그거지? 오빠는 그거 재미없더라.”

“아냐! 지금 TV에 차희 언니 나와!”

33. 민차희

“엥?”

윤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걔가 TV에 왜 나와?”

“몰라! 지금 속보로 막 공금횡령 어쩌고 뜨면서 차희 언니 나와!”

윤성은 얼른 거실로 달려 나와 TV 앞에 앉았다.

정말이다.

차희가 증인으로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독기가 잔뜩 서린 눈으로 카메라를 부숴 버릴 것처럼 쏘아보면서.

-협회는 기업적 성향이 강해 보이지만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정부 부처입니다. 전국의 모든 헌터, 그리고 모든 시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죠. 그런 협회의 운영 자금이 빼돌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유감스럽습니다. 그리고 협회 직원으로서 굉장히 부끄럽고, 협회의 재무부서에 대한 대규모 감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차희가 써놓은 연설문을 읽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그 회계 장부에서 뭔가 발견했군.

하지만 그렇다고 언론을 불러다가 곧바로 터뜨려 버리다니.

이건 뭐 경고나 위협사격 같은 거 전부 생략하고 시작부터 핵 단추 누르는 셈이다.

윤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얘가 미쳤나? 뒷감당은 어쩌려고…….’

아니지, 차희 성격에 뒷감당 같은 건 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질렀을 거다.

정말이지 어떤 의미로는 에어포스만큼 대단한 여자다.

에어포스는 무슨 일을 시도하든 그걸 해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차희는 정의감 하나뿐인 민간인이니까.

솔직히 윤성 본인도 저 정도의 용기를 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차희의 행동은 정말로 위험했다.

단순히 협회에서 찍힌다거나 잘린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소당하는 것도 별것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물리적인 위협.

비각성자이고, 혼자 사는 여자였다.

그런 사람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실력자들이 협회에는 바글바글했다.

차희의 집 앞 어둡고 인적 드문 골목길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가는 차희를 헌터 하나가 뒤쫓는 그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미친 거 아냐, 진짜? 얘는 목숨이 몇 개 되나?’

윤성이 화가 나서 휴대폰을 꺼냈다. 나한테 언질이나 좀 주고 저지르지 그랬냐고 나무랄 생각이었다. 얼마나 위험한 짓인데 이렇게 두서없이 시작했냐고.

하지만 차희의 번호를 누르기 직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뚜르르.

발신인은 김샛별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윤성 씨, 백마 길드 김샛별입니다.

“네.”

-보내주신 자료 잘 읽어봤습니다. 사실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좋았어요.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지금 좀 어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전화로 하시죠.”

-아, 어디 가세요?

“으음. 누굴 좀 보러. 아무튼 그래서요? 그걸로 길드 내에서 어떤 여론을 좀 만들거나 할 수 있겠어요?”

-김진명이 홍창민 헌터님을 고양시로 보냈다는 의혹을 소문만 내도 김진명에게는 꽤 뜨끔한 위협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역시 윤성 헌터님을 영입하는 수밖에…….

“그건 안 돼요.”

김샛별은 깜짝 놀랐다.

전까지는 그래도 영입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너무 단호하게 잘라 버린 것이다.

-백마 길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길드 들어가면 할 일들이 굉장히 많을 거 아니에요. 특히 신입이면. 근데 저는 한동안 혼자 계속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서.”

-혼자 계속 돌아다닌다고요?

“누굴 좀 경호해야 하거든요. 지금도 그 사람 만나러 갈 거예요.”

-아……. 그렇군요.

“아무튼 백마 길드 일은 잘 처리되길 바라요. 저도 홍창민 헌터님이 대표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예…… 감사합니다.

김샛별은 약간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윤성은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움켜쥔 만큼은 했다. 다음은 김샛별과 홍창민이 알아서 할 일이지.

뉴스는 이제 차희의 생중계 인터뷰를 마치고 화면이 바뀌고 있었다.

윤성은 곧장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어디야?”

윤성이 물었다.

-나 협회 앞.

“아오! 왜 얘기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그래!”

-왜! 안 되냐? 이걸 보고 어떻게 참아?

“아니, 참으라는 게 아니잖아. 겁도 없이 진짜. 헌터 중에 막 나가는 새끼들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아무튼 내가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꼼짝 말고 거기, 사람들 많은 데에 가만히 있어.”

-누가 나 건드릴까 봐 그래?

“어!”

-…….

“뭐야? 여보세요?”

-응.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너 아무튼 거기 가만히 있어. 나 10분 안에 간다. 주위에 누가 손 숨기고 접근하면 일단 피해. 알았어?”

윤성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이동해 그의 차량 애퍼리션에 올라탔다.

하지만 도로가 혼잡해 차가 많이 막히고 있었다.

답답해진 윤성은,

-삑.

차량 앞에 있는 ‘비행’ 버튼을 눌렀다. 사실 이 기능 때문에 샀던 차인데 지금 처음 써보는 거였다.

애퍼리션이 우우웅 하는 엔진 진동과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

차희는 가슴이 뜨끈한 기분이 되었다.

윤성의 곁에는 팜므파탈적인 외모의 S급 마족 바토리가 있었고, 여신 같은 SS급 에어포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일산에서 전투를 치르는 마스크맨을 차희는 TV로 보았다.

그 거리감.

강한 여자의 모습으로는 에어포스나 바토리의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차희 역시 어머니한테 항상 “기 좀 죽이고 살아라, 그래서 시집은 가겠냐” 소리를 들어왔지만 정말 강한 여자들 앞에서는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성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순하고 순진한 이미지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게 사실이었다.

굳이 남은 음식들을 윤성의 집까지 가져가서 조리해 주기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차희의 성향에는 안 맞았다.

누가 들으면 어이없어 웃겠지만 사실 이번 인터뷰를 터뜨리기 전에도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것이었다.

무슨 정의의 투사라도 되는 듯한 모습. 드세고 호전적인 이미지를 떠안는 게 무서웠다. 윤성이 그걸 싫어할까 봐.

‘하지만 걱정해 주다니…….’

좋은 신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협회를 고발하는 폭탄을 터뜨린 후에 남자 때문에 설레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철없어 보이지만.

차희는 협회 앞에 바글거리는 기자들과 취재 차량들을 쳐다보았다.

인터뷰가 나간 후 협회 앞에 사람들이 빠르게 모이고 있었다. 벌써 피켓을 들고 나온 1인 시위자들까지 보였다.

아무래도 이런 인파를 뚫고 오려면 꽤 걸리겠지?

차희는 협회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윤성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차희!”

한데 놀랍게도 자리에 앉자마자 윤성이 나타났다.

그는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차희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정말이지 넌 대단한 사람이야.”

달리는 차 안에서 윤성이 말했다.

“칭찬이지? 고마워.”

차희가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 반은 칭찬이야. 근데 앞으로 어떡할 거야? 협회는? 그만둘 거야?”

“내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만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걔들이 그만둬야지.”

“넌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이번엔 70% 칭찬이야.”

“후후. 하지만 회사는 그만둘 거야.”

“왜?”

“협회에 환멸감 느껴져서 거기서 일 더 못 하겠어. 복지부서만이 문제가 아냐. 여기저기서 돈 구멍 난 것 엄청 많은 것 같더라고. 그게 다 세금인데…….”

차희가 말했다.

“난 애초에 사람들한테 도움 줄 수 있고 뿌듯한 일이면 돼. 연봉은 먹고살 만큼이면 되고. 업무 강도는 하루에 8시간 자고 주말 출근 안 하는 정도면 만족하고. 다른 일 찾아봐야지.”

“정말이지 너 같은 애가 헌터를 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내가 SS급 헌터였으면 에어포스만큼 인기 있었을 텐데.”

“얼씨구. 띄워주니 난리 났네.”

“근데 나 아직 공개 안 한 거 있어.”

“뭔데?”

“사실 이건 확실한 게 아니라서 터뜨리지 않은 건데, 자료 보다 보니 수상한 게 좀 있어서.”

“뭐가?”

“재무부서 가면 각 부서별로 담당자들이 있거든? 복지부서의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담당자 이름이 서지원이라는 사람이야. 근데 내가 이 사람을 한번 봤었는데 백마 길드 점퍼를 입고 있더라고.”

윤성이 깜짝 놀랐다. 서지원? 이름이 너무 비슷한데?

“서지원이라고 했어? 서정원 아니고?”

이번엔 차희가 깜짝 놀랐다.

“서정원을 네가 어떻게 알아?”

“왜? 둘이 무슨 사이인데?”

“친자매야. 내가 서지원 씨 만났을 때 백마 길드 점퍼 보고 인사치레로 백마 길드 출신 헌터님이시냐고 물었더니 자기 언니 거라고 했거든.”

“세상에.”

“근데 지금 서지원이 빼돌린 자금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온 정보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난 그 돈이 백마 길드로 들어간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 길드는 던전 레이드하면서 마정석 얻은 거 개수를 조작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회계 조작하는 게 비교적 쉬우니까.”

“잠깐만, 잠깐만.”

윤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거 어쩌면.”

그러고 보니 김진명이 상급 헌터들의 영입에 엄청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사 능력이라면 백마중이 있던 때에도 성과를 올렸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랬다면 김진명이 백마 길드에 들어간 지 10년이 넘었는데 백마 길드의 상급 헌터 수가 지금과 같을까?

이거 이상하잖아?

윤성은 김샛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샛별 씨?”

옆자리의 차희의 얼굴에 다시 경계심이 어렸다. 얘 아는 여자 왜 이렇게 많아졌어?

윤성이 말했다.

“이번에 김진명이 영입해서 백마 길드 입단한 상급 헌터들, 아무나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윤성은 곧 전화번호 몇 개를 받았다.

A급 천명준.

이 사람한테 해보자.

윤성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천명준 씨?”

-네, 누구세요?

“마스크맨입니다.”

-네에?

“다름이 아니고, 제가 백마 길드에서 상당히 좋은 대접을 해준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저도 백마 길드에 입단할까 해서 말이죠. 혹시 아시는 거 있으면 알려주실래요?”

-아, 그거요. 김진명 헌터님이 엄청 돈을 많이 주신댔거든요. 지금 A급, B급 대접 백마가 최고예요. 김진명 헌터님한테 한번 연락해 보세요. 세인트의 두 배 이상을 주니까.

“감사합니다.”

윤성은 다시 김샛별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전에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면서,

“김진명이 그런 돈을 약속했다는데 백마 길드의 인사 원칙이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다.

-말도 안 돼요!

김샛별이 정색했다.

-그렇게 퍼 줬다간 순식간에 길드 파산할 거라고요. 제가 물어볼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전화를 끊자 차희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상황이야?”

“그 돈이 백마 길드로 간 게 맞는 거 같아. 정확히는 김진명한테.”

“정말?”

“아직 증거는 없지만.”

차희의 집 근처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김샛별이 윤성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김진명 헌터한테 물어봤는데 그렇게 줘도 된대요. 자기가 일산 감염지에서 올린 개인 수익으로 줄 수 있는 범위 안이라고. 괜찮대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일산 수복전의 전리품에 대해 각 길드들의 몫을 결정하는 계산법이 있다.

상급 헌터들의 참전 수와 그들이 얻은 성과, 그리고 감염 중심지에 들어간 S급 헌터들의 퍼포먼스로 계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마 길드는 상급 헌터의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심지어 핵심 전력 중 하나였던 홍창민과 그의 수족들을 고양시로 빼버리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백마중이 죽었기 때문에 감염 중심지를 레이드한 몫은 아예 없었다.

“그렇게 많이 벌었을 리가 없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샛별이 동의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까요. 홍창민 헌터님 편에 서는 헌터들은 대부분 감염지 변두리로 내몰리거나 감염지 내부에서 싸우더라도 김진명 팀 근처엔 없었어요. 그래서 김진명 팀이 얼마나 수익을 올렸는지 증명하지 못하는 거죠.

“이런. 하지만 결국에는 거짓말한 거 들통날 거 아닙니까?”

-제가 그런 식으로 얘길 해봤는데, 그 상급 헌터들한테 선불로 지급했대요. 그 정도로 엘리지아 전리품이 큰 수익이 날 것을 확신하니까 걱정하지 말래요.

“하지만 그럼 선불로 지급했다는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예요?”

-그건 저도 모르죠……. 자기가 그만큼 돈이 있다고 하는데 뭐라고 해요.

협회에서 빼돌린 돈이겠지.

전화를 끊은 후, 윤성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마 엘리지아 전리품의 정산이 끝나서 상급 신입들에게 지급된 돈을 메우지 못한다고 해도 문제없을 거다.

그들은 이미 선금으로 받았으니 문제를 제기할 필요를 못 느낄 테고, 김진명은 이미 대표가 되어 있을 테니까.

소름 끼치도록 영악하고 꼼꼼한 남자다.

“네 생각대로 협회 자금은 전부 백마 길드 김진명한테 간 것 같아.”

윤성이 차희에게 말했다.

“정말?”

차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정원과 서지원이 자매라는 것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뿐인데 정말 맞아떨어지다니.

“일단 넌 한동안 집에 얌전히 숨어 있어.”

윤성은 차희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골목에서 혹시 누가 따라오진 않는지 몇 번이고 주위를 감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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