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속도는 9.8ms^2-105화 (105/260)

# 105

레벨업 속도는 9.8m/s^2 105화

윤성은 협회 앞의 작은 카페에서 김샛별을 만났다.

사실 백마중이 죽은 이상 굳이 백마 길드에 입단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황동수와 차태식도 없는 지금, A급 전투력을 구태여 공개할 이유도 없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고 지금처럼 조용히 지내는 게 훨씬 이로웠다.

하지만 윤성은 김샛별의 미팅 요청에 응했다. 같은 헌터로서 백마중이 여태까지 해온 일들과 그의 실력에 표하는 일종의 경의였다.

그리고 ‘백마 길드의 실황에 대해서 윤성 씨와 논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라는 김샛별의 얘기가 호기심을 끌기도 했다.

“어떤 일로 보자고 하셨죠?”

김샛별은 백마 길드의 현황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여 설명해 주었다.

상대는 A급 헌터고 백마중도 영입에 실패했던 인물이었다. 괜히 어설픈 수를 써봤자 데려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쪽이 나았다.

얘길 다 들은 윤성은 팔짱을 꼈다.

“근데 홍창민 씨는 왜 고양시에서 컨트롤러 일을 한 건가요? 감염지에 들어가서 공을 세워야지.”

“컨트롤러 역도 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고양시는 일산 바로 옆에 붙어 있어요. 감염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이라서 던전 범람의 위험도가 제일 높았죠.”

김샛별이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 지역의 범람한 던전에서 상급 마수들이 나온다면 서울이 직격탄을 맞는 셈인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상급 헌터가 서울엔 하나도 없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홍창민 헌터님은 아마 고양시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자신한테 맡겨진 일을 순순히 받아들인 거죠.”

“근데 고양시가 중요한 건 맞지만, 길드도 중요한 거 아니에요? 성과를 올려서 대표가 될 생각을 하셔야지.”

“사실 그분은 대표 자리에 욕심이 그리 크진 않아요. 자기가 맡게 된다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말고 식이라. 주위에서 그분한테 맡기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근데 상황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고?”

“김진명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B급 일곱에 A급 둘을 영입한 사람이에요. 옛날 백마중 대표님보다도 실적이 더 좋죠. 이런 양상이 지속되면 김진명을 꺾을 방법이 없어요.”

“음.”

사실 윤성도 김진명보다는 홍창민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남의 길드 얘기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윤성이 잘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우선 김진명.

윤성이 협회 헌터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백마 길드의 중역이었지만 뻔질나게 협회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온갖 상급 헌터들에게 크고 작은 갑질을 해댔던 것이다.

주로 어디 던전의 레이드 허가를 달라고 괴롭히는 식이었다.

한 번은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저녁 8시에 메일을 보내어 신고해 놓고는 다음 날 아침 9시에 협회 던전관리부서에 왜 처리를 안 했느냐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헌터로서 전투력이나 경험치는 확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쉽게 얕잡아 보고, 기분 따라 언행이 바뀌어 일관성도 없고, 자기 뜻대로 잘 안 되면 쉽게 끓는 스타일.

아무리 봐도 한 길드를 이끌 수장으로는 부적격이다. 심지어 백마중의 빈자리를 메운다니, 한참 자격 미달이다.

반면 홍창민은 훌륭한 헌터였다.

윤성은 E급 헌터로 힘든 삶을 살던 때 홍창민이 이끄는 B급 던전에 짐꾼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동굴 고블린이 나왔던 던전.

홍창민은 ‘B급 던전 값을 받으면서 동굴 고블린 잡으면 수지가 안 맞는데’라며 장난스레 툴툴댔다.

그리고 레이드가 끝날 때쯤 진짜로 수지가 안 맞는 일을 했는데, 윤성에게 작은 마정석 하나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D급 정도로 가치는 보잘것없었지만 원래 짐꾼에게는 던전 전리품이 허용되어 있지 않고, 당시 윤성에게는 요긴한 돈이 되었었다.

‘요새 힘드시죠? 그래도 좋은 날 올 거예요. 조금만 더 버텨봐요’라고 속삭이던 홍창민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했다.

‘솔직히 홍창민을 도와주고 싶군.’

윤성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력 심사를 받는 것은 과하다. 가능하면 숨기는 게 좋을 테니.

“이렇게 합시다. 제가 백마 길드에 합류할지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그 대신, 김진명이 홍창민 헌터님을 고양시로 보냈다는 정황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자료는 왜요?”

“만약 돈 거래 같은 게 있었다거나, 그게 아니라도 지저분한 정황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걸로 김진명을 압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정황이 있다면 가능하겠죠.”

“제가 협회 기록들을 뒤져서 어떤 커넥션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근데 그런 게 가능한가요?”

김샛별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 협회 직원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말단 D급 헌터 신분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이었지만, 김샛별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윤성의 반응이 꽤 호의적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좀 더 지켜볼 만했다.

***

협회는 거대한 건물 넷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대부분의 사무와 일반 헌터 업무를 보는 본관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동관이 붙어 있는데, 동관은 서울 최대 규모의 병원이면서 동시에 사회복지 시설을 겸했다.

차희가 있는 복지부서가 이곳이었다. 사실 본관과 동관은 잘 구별이 안 되어서 사람들은 하나의 건물인 줄 알지만.

서관은 헌터들의 복지 시설이었다. 초거대 운동장과 수영장, 볼링장, 당구장, 헬스클럽 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지막 건물인 ‘협회 지휘국’은 1급 제한 구역이었다. 상급 헌터 중에서도 통과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기술개발국과 컨트롤센터가 있고, 협회 금고도 이곳에 있었다.

‘마스크맨으로 본관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군.’

본관 입구에 들어서는데 어째 긴장됐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저거? 마스크맨이야?”

“에이, 말도 안 돼.”

“코스프레 하나 보지 뭐.”

“마스크맨 코스하고 협회에 오다니.”

마스크맨으로 협회에 온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한 번은 에어포스가 협회 지휘국 옥상에 날라줘서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나왔었다. 게다가 당시엔 유명세도 지금 같지 않아서 별로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기수 각성 때는 서관에서 진행했는데 건물 인근을 전부 폐쇄하고 접근을 통제했었다. 시민들은 고사하고 일반 헌터들도 마스크맨을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꽤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수 각성이라는 중대한 이벤트 앞에서 팬미팅 현장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진 않았다.

“진짜 같은데.”

“말 걸어봐.”

“손가락 빔 쏠 수 있냐고 물어봐.”

“우리 부장 좀 혼내달라고 해봐.”

사람들이 사방에서 키득거렸다.

급기야는 정말 시민 몇 명이 다가왔다. 어린애 둘과 젊은 여자 셋이었다.

“저기, 혹시 마스크맨 맞으세요?”

“네에.”

윤성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까르륵 웃더니,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어요?”

하며 저마다 야구 모자나 공책 따위를 내밀었다.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군.’

에어포스한테 이런 상황 어떻게 대처하는지 다음에 물어봐야지.

윤성이 사인을 해주었더니,

“혹시 손가락 빔 보여줄 수 있어요?”

하고 아이들이 졸랐다.

<빛의 탄환 발동!>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서비스해 주자는 생각에 상공을 향해 섬광을 발사했다.

“우와아!”

애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탄의 박수를 쳐댔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윤성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본관을 향했다.

그러나 한번 쇼를 보여준 게 문제였다.

사방에서 시민들과 일반 헌터들이 득실대며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 빔 한 번만 더 보여주세요!”

“마법 좀 써주세요!”

“단검술 해주시면 안 돼요?”

“사진 한 장만…….”

그간 체감하지 못했던 인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닌 게 아니라 마스크맨은 그야말로 슈퍼스타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헌터 스쿨에서 애들을 구출한 것도 모자라 이집트에서 상급 던전들을 쓸어버리고 S급 던전을 클리어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배우처럼 예쁜 S급 헌터 용병과 그 로봇 인형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그러고는 최상급 헌터들과 힘을 합쳐 일산을 수복해 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아직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단다.

정체에 대한 호기심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수십 배로 부각시켰다.

“미안합니다. 좀 바빠서.”

몇 명에게 사인해 주고 사진을 찍어주던 윤성은 결국 이 엄청난 팬미팅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탁탁탁탁.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니 시민들이 쫓아오지 못했다.

대신 뒤통수가 따가웠다. 하지만 무시하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윤성은 안내 데스크에 가서 물었다.

“이번 일산 수복전에서 헌터들의 위치 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관련 기록들을 좀 보고 싶은데요.”

“헌터들의 위치 배정 기록이요?”

“네. 어느 부서로 가면 되죠?”

“원래 지휘국에 있었을 텐데 아마 지금 기록 보관소로 넘어왔을 거예요. 본관 6층 기록 보관소로 가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근데 마스크맨이세요?”

데스크 직원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수없이 들은 질문을 또 했다.

이것도 좀 지겹군.

“마스크맨 맞아요.”

“하하하, 근데 신원 조회를 해야 기록 열람이 될 텐데 마스크 쓰고 가시면 안 될걸요.”

직원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안 믿는 눈치였다. 요즘은 마스크맨 코스프레하는 사람이 가끔씩 있으니까.

“아. 괜찮습니다.”

윤성이 빙긋 웃었다.

6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직원용이라서 일반 시민은 없었다.

함께 탄 헌터들과 협회 사무직원들이 윤성을 힐끔거렸다.

6층, 7층은 통째로 기록 보관소뿐이기 때문에 다른 업무로 그곳에 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록을 열람하려면 정보 공개 범위를 처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

6층에서 윤성이 내리자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저거 진짠가?”

“근데 요즘은 마스크맨 코스프레하는 사람 많아.”

“설마 진짜겠어?”

“근데 저러고 기록 보관소를 가?”

그들의 호기심은 곧 해소되었는데, 윤성이 주머니에서 S급 카드를 꺼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직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기록 보관소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던 여직원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S급 카드를 내밀면서 윤성이 말했다.

“일산 수복전 당시 헌터들의 담당 구역 배정 관련 기록들을 보고 싶습니다.”

“자, 자, 잠깐만요.”

여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들었다.

스캐너에 찍었더니 정말로 마스크맨의 신분이 조회되었다.

“지금, 지금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녀가 황급히 일어나 자료를 찾으러 사라졌다.

사실 최상급 헌터들은 기록 보관소에 올 일이 거의 없었다.

보통은 비서를 통해서 서류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권리 위임증과 S급 헌터의 카드를 가지고 오면 본인이 아니더라도 S급 자료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따라서 기록 보관소 직원들은 S급 이상의 헌터들을 본 횟수가 손에 꼽았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S급 헌터가 직접 왔다.

잠시 후, 윤성은 폴더로 제본된 하드카피 책 일곱 권과 USB 하나를 받았다.

직원이 간단한 이용 절차를 안내해 주었다.

“USB에도 똑같은 자료가 들어 있어요. 원하는 부분만 검색해서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하드카피는 외부로 가지고 가실 수는 없어요. USB는 외부 반출되지만 한 달 안에 반납하셔야 하고요.”

“네. 고맙습니다.”

“저기, 근데.”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업무 중에 이러면 안 되지만 사진 한 장만…….”

“일단 이거 먼저 보고요.”

윤성은 개가식 책상에 앉아서 자료를 천천히 뜯어 살피기 시작했다.

홍창민과 관련된 자료만 찾으면 된다.

USB를 열람용 컴퓨터에 꽂고 파일을 연 다음 검색 창에 들어가서 ‘홍창민’을 찾았다.

총 57번 나온 단어.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더니 금방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홍창민이 고양시로 배정된 것은 컨트롤 타워의 19번째 회의 때였다.

윤성은 곧장 19번째 회의 기록을 열었다.

회의의 속기 자료.

홍창민을 고양시로 배정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은 총 세 명.

A급 헌터 박현민, 정민우, 서정원이다.

특히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건 서정원.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서정원

A급 최상위권의 헌터 중에 한 명은 고양시를 지켜야 만약의 사태에 서울을 방어할 수 있지 않겠어요? 홍창민 헌터님이 딱이에요.

코르소

I don’t think so. B급 헌터들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어……. 고양시 던전은 세인트 길드에서 오래전부터 매니지했습니다. You know that? 그곳은 안전한 곳입니다.

정민우

그건 모르는 거죠.

서정원

그리고 만약 엘리지아가 일산을 넘어오면 어떡할 셈이에요? 그러면 서울을 지킬 인력이 없잖아요?

에어포스

마스크맨이 감염지 밖을 지켜주기로 했습니다.

코르소

Yeah! 그 사람 정도면 신뢰를 가능합니다.

카다시안킴

그럼 고양시에는 B급 헌터 송민구 씨를 배치하는 걸로 하는 게 어때요?

서정원

안 돼요! 송민구 씨는 원거리 전투가 전문이라서 공격력은 좋겠지만 적을 묶어두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이번에 SS급 헌터들도 더 오고, 감염지에 들어가는 상급 헌터의 수도 상당히 많잖아요? A급 헌터 한 명쯤 고양시로 차출해도 티도 안 나는데 왜 굳이 안전한 길을 버리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윤성은 회의 속기록을 쭉 따라 읽었다. 결국은 서정원이 끝까지 밀어붙여서 홍창민을 고양시에 배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서정원. 이 사람에 대해서 좀 파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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