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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속도는 9.8ms^2-103화 (103/260)

# 103

레벨업 속도는 9.8m/s^2 103화

윤성이 현관문을 열자 바토리가 나타났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렌즈도 써서 완벽하게 인간처럼 변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집 안을 힐끔 살펴보았다.

“오늘도 그 시건방지고 하등한 철 덩어리가 있느냐?”

“넌 또 왜 왔어?”

“와선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그보다 방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구나. 내가 식사를 방해했나?”

“방해했지만 이왕 저지른 거 왜 왔는지 얘긴 들어줄게.”

“잠깐 들어가도 되겠는가?”

바토리가 벌써 신발 뒤축을 벗으면서 말했다.

들어가서 아리 만나면 또 싸움질 벌일까 봐 걱정되긴 하지만,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현관에 서서 할 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들어와.”

윤성이 허락하자 바토리는 윤성의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윤성의 아파트는 거실에 딸린 부엌과 간이 식당이 ㄱ자로 꺾인 코너 안쪽에 있었다.

당연히 거실에서는 부엌이 보이지 않았다.

차희는 누가 왔는지 보기 위해 모퉁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헉.”

순간 차희는 놀라서 숨을 마셨다.

TV에서 봤다. 엘리지아 던전을 레이드할 때 끼었던 S급 헌터다.

당시에 앵커가 ‘마스크맨의 소개로 합류한 외국의 S급 헌터 바토리’라고 소개했던 게 선명히 기억났다.

‘저런 사람을 어디서 알게 됐지?’

차희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토리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바토리는 지나치는 남자들마다 돌아보게 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났다.

희고 주먹만 한 얼굴과 치렁치렁한 흑발, 갸름하고 날카로운 턱선과 뚜렷한 이목구비.

그녀가 고개를 돌리다가 차희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차희는 얼른 부엌 안으로 숨었다.

바토리 쪽에서는 차희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기 때문에 차희는 어쩐지 패배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그냥 바토리의 성격이 무심한 탓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 도도한 시선을 돌리다가 소윤을 발견했을 때도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주인님 명령이지만 도저히 베란다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요.”

아리가 전의를 불태우며 거실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바토리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아직도 인간의 집에 붙어 있었느냐? 하등한 고철 덩어리야.”

“굉장히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군요. 당신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오늘 맺어질 수 있었던 커플의 분위기가 큰 위기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아. 성격이 파탄 나서 한 번도 누굴 만나본 적이 없겠군요. 그래서 연애의 로맨스 같은 걸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로봇이 연애의 로맨스 운운하다니, 저게 무슨 상황이래?

윤성은 좀 황당한 기분이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반면 바토리는 약간 붉으락푸르락했다.

“마계에서 내게 대쉬한 남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아느냐? 내가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이야, 제가 그건 몰랐네요.”

아리가 비아냥거렸다.

“저도 사실 메탈로이드계에서 꽤 인기 많았답니다. 골리앗들이 특히 저한테 적극적으로 구애했죠. 인계로 오고 나서도 알파고가 한 번만 만나달라고 모스 부호로 러브레터를 계속 보내왔는데 씹었어요.”

바토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좀 그만해, 둘 다.”

윤성이 싸움을 중재했다.

그러고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왔다.

윤성은 소리 죽여 차희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쟤 거실에 오래 뒀다간 아리랑 싸움 나겠어. 용건만 간단히 듣고 내보낼게. 조금만 기다려.”

“다녀와.”

다시 거실로 나온 윤성이 바토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뭣 때문에 온 거야?”

“애가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다.”

바토리가 소윤을 가리켰다.

윤성은 소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에 들어가 있을래?”

“으응…….”

소윤은 잠자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후, 바토리는 거실 소파에 앉더니 도발적으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누굴 유혹하거나 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그냥 그녀에겐 그게 편한 자세였다.

하지만 거실을 힐끔 살펴본 차희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 바토리는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마계가 최근에 혼란에 빠졌다. 르네와 라플라스가 협력해서 마왕님을 쳤다가 둘 다 세가 크게 꺾였지. 하지만 마왕께서도 아주 무사하진 못한 듯하다.”

“그랬냐?”

“내가 신세를 지고 있는 그룬헤잘드 후작은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조만간에 인간계에서 큰 던전 범람을 일으키고 많은 마력을 흡수하려 할 것이다. 아르동 때와 비슷하게 말이다.”

“정말이냐?”

윤성의 눈이 커졌다.

“나는 마계가 인간을 침공하길 원치 않는다. 많은 귀족이 품위와 신념을 버리고 힘 그 자체를 추구하면서 인계를 탐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나는 에르제베트 바토리다. 그룬헤잘드의 결정과 나는 노선을 달리하기 때문에 너에게 알려주러 온 것이다.”

“고마워. 하지만 그럼 이제 어떡하지? 엘리지아와 싸울 때의 내 실력 정도면 그룬헤잘드를 이길 수 있나?”

“나는 그룬헤잘드의 힘의 끝을 본 적 없지만 엘리지아 성체를 토대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체를 토대로?”

“내가 아직 어릴 때, 엘리지아 차원과 마계 차원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그룬헤잘드가 후작위를 받게 된 계기였지. 그룬헤잘드는 엘리지아 차원으로 800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2,000이 넘는 엘리지아를 사살했다. 그리고 그중 200을 그룬헤잘드가 혼자 죽였으며, 200 중에서 일곱은 성체였다.”

“흠.”

“하지만 이것만으로 확실한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룬헤잘드가 200여 마리의 엘리지아를 죽였다지만 한 번에 모두를 상대한 건 아니니까.”

“엘리지아 성체는 S급 상위권 정도 될 것 같더군. 샌드맨이나 안토니오 정도 되면 확실히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어. 당시에 나도 그랬고.”

“그렇지 않다.”

“아니라고?”

“마계로 돌아가 고전 문헌들을 뒤져봤다. 그 엘리지아 성체들은 다 자란 게 아니었더군. 나도 엘리지아가 그렇게 강한 종인 줄 몰랐지만 완전체였다면 인간 중에서 그걸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은 없다.”

“그러냐?”

“흠, 다시 생각해 보니 그 흰 옷 입은 여자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

“에어포스?”

“그렇다.”

-뚜르르르.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이분 양반은 못 되시네…….”

에어포스였다.

윤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마스크맨, 에어포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마스크맨 자택 근처인데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라고요? 어디신데요?”

-아파트 옥상 위입니다. 비행으로 날아왔습니다.

“어, 아니, 뭐. 괜찮긴 한데.”

아닌가? 안 괜찮나? 갑자기 손님 왜 이렇게 많아?

-지금 가겠습니다. 혹시 베란다로 가도 될까요?

“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에어포스는 벌써 윤성이 있는 39층 베란다 밖이었다.

“모자 고쳐 써.”

윤성이 바토리의 모자를 다시 씌워주었다.

에어포스는 베란다 문을 열고 곧장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에 놀란 아리가 벌떡 일어났다.

거실에 에어포스가 나타나자 차희는 또 한 번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이쪽은 바토리와 달리 이미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웬만한 모델들 사이에 있어도 꿇리지 않는 외모와 비율. 게다가 SS급 헌터의 위용. 새하얗게 광이 나는 슈트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차희는 어쩐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윤성의 곁에는 저 정도의 인물들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마스크맨이니까.

엘리지아 던전에서도 그들은 마스크맨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팬에 불고기나 볶는 것뿐…….’

차희는 미묘한 열패감을 느끼며 팬을 내려놓았다.

“일단 여기 앉아요.”

윤성이 바토리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제가 온 이유는…….”

에어포스가 입을 떼는 순간,

“잠깐만요.”

윤성이 멈추었다. 그가 에어포스와 바토리, 아리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설마 에어포스 앞에서 둘이 싸움질을 하진 않겠지? 그리고 싸움이 나도 에어포스한텐 중재할 힘이 있으니까.

“둘 다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요. 먼저 온 중요한 손님이 안에 있어서.”

윤성은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미안. 좀 늦었지? 바토리가 약간 심각한 얘길 해서.”

“괜찮아. 근데 너 인맥 되게 좋아졌다.”

“에어포스는 왜 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네가 보고 싶었나 보지 뭐.”

“에어포스가 날 왜 봐.”

“근데 에어포스는 네 정체 모르는 거 아니었어? 이제 알아?”

“응.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됐어.”

마스크맨이 윤성이라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간 차희에게는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정보의 희소성도 약간 떨어지고 말았다.

차희는 더욱 우울해졌다.

“요리 다 됐어. 밥 먹자.”

그녀가 접시 몇 개와 그릇들에 음식을 담으며 말했다.

“다윤이, 소윤이하고 먼저 먹고 있어.”

“넌?”

“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금방 끝날 거야.”

“나도 같이 가.”

어쩐지 차희는 그 둘과 윤성을 같이 두기에 불안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같이 가!”

차희가 막무가내로 들러붙었다.

결국 윤성은 차희와 함께 두 사람을 만났다.

“많이 기다렸죠?”

윤성이 나타나자 에어포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온 것은 이번 일산 수복전에서 협회를 도와주신 데 대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 뭐, 그거야 당연한 건데 굳이 감사까지야.”

윤성이 멋쩍은 듯 웃자 에어포스는 포장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협회의 S급 헌터 카드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협회 내의 거의 모든 문서를 열람할 수 있고, 거의 모든 장소에 들어갈 수 있죠. 마스크맨의 권한은 저나 다른 S급들과 같습니다. 고제하 협회장님 바로 다음이죠.”

“오, 고마워요.”

윤성이 카드를 받았다.

돈 같은 걸 준다면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런 것은 꽤 유용해 보였다.

“그리고 이것도 받으십시오.”

에어포스가 30㎝ 정도 되는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 포장을 뜯어보니 아름다운 디자인의 단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마력이 담겨 있었다.

“유니콘의 뿔을 가공해서 만든 단검입니다. 이름은 칸자르. 두 가지 강력한 마법을 하루에 한 번씩 쓸 수 있습니다.”

“두 가지요?”

“첫째는 역장입니다. 강력한 보호막을 쳐서 범위 내의 접근을 막습니다. S급 방어 마법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적들은 뚫지 못할 겁니다.”

“오.”

“둘째는 뇌격. 번개를 쏘아서 적을 태워 버릴 수 있습니다. 위력은 웬만한 A급 탱커도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고요.”

“세상에. 그런 물건을 저한테 주셔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죠. 마스크맨보다 이걸 잘 써줄 수 있는 헌터가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윤성이 칸자르를 받았다.

에어포스는 약간 뿌듯해했다.

“아, 근데 에어포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무엇이죠?”

“혹시 제가 마정석 같은 것들을 좀 판매할 방법이 없을까요?”

마정석.

마지막으로 C+ 타워에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그 후로 클리어했던 던전들을 꼽아보면,

일단 아르동의 성이 있는 마계의 한 영지를 털었다.

구파발 던전은 영양가 없는 D급 리자드맨이 대부분이었으니 논외로 치자.

그래도 이집트에서 A급 던전 3개, B급 던전 14개, S급 재포니카 던전을 정리했다.

게다가 리비아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미군과 알리야 세력의 전쟁 통에서 쓸어버렸던 마수들.

배낭에 모조리 짊어져야 했다면 그 무게와 부피 때문에 진즉에 팔아버리거나 일부를 버리거나 했겠지만, 인벤토리에 마구 쌓아놓았더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던 것이다.

“마정석이 몇 개나 되나요? 적은 수라면 제가 사드릴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마정석이 필요한 일이 좀 생겼거든요.”

에어포스가 말했다.

“좀 많아요.”

“몇 개요?”

“많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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