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레벨업 속도는 9.8m/s^2 102화
31. 강윤성이 아닌 마스크맨
윤성은 소윤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소윤이 매우 좋아하는 ‘세계이모저모’라는 프로그램.
프로그램 이름처럼 세계 곳곳의 신비한 자연경관이나 재밌는 사건들 따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콘셉트였다.
PD가 직접 현장을 체험하면서 보여주는 웃긴 꼴들이 코믹하다.
이번 특집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뉴저지에 있는 ‘주만자로’라는 자이로드롭이 나타났다.
-이 자이로드롭의 높이는 무려 126미터! 아파트 41층 높이입니다.
PD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걸 제가 탈 거예요. 진짜 너무 극한 직업 아닙니까?”
“우와.”
소파 아래에 앉아서 감자칩을 먹던 소윤이 윤성의 다리를 툭툭 쳤다.
“오빠, 봤어? 126미터래.”
“응.”
“진짜 무섭겠다. 아파트 41층. 우와, 우리 집보다 더 높아.”
윤성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무섭네.”
126미터 높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버프를 계산하는 내 버릇이 무섭다.
“에휴.”
윤성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엘리지아를 쓸어버리고 일산을 수복하고 나니 번아웃된 것처럼 마음 한편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윤성은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한 팩 뜯어서 물에 탔다.
그는 얼음을 넣으려고 냉동실 문을 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음 누가 다 먹었냐?”
“내가.”
소윤이 손을 들었다.
“먹고 좀 채워놓으라니까.”
“요즘 우리 집 얼음 안 채워.”
“응?”
“아리야!”
소윤이 부르자 안방을 청소하던 아리가 나왔다.
그는 냉동실 문을 연 채 서 있는 윤성을 보고 눈을 빛냈다.
“앗. 주인님, 드디어 얼음을 드시는군요. 제가 말씀드렸죠. 냉장고를 내장했다고. 비로소 쓸모가 생겼습니다.”
아리가 하복부의 잠금장치를 열자 안에서 냉기가 흘러내렸다.
아리는 얼음 몇 개를 꺼내어 윤성의 컵에 담아주었다.
‘어쩐지 찝찝한데.’
하지만 괜찮겠지 뭐.
윤성은 아이스티를 마시며 소파에 돌아와 앉았다.
-뚜르르.
휴대폰이 울려서 보니 차희였다.
“여보세요.”
“아, 윤성아. 저녁 먹었어?”
“아니.”
“내가 찬을 좀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했거든. 원래 복지관 애들한테 주려고 했던 건데 좀 일이 꼬여서. 혹시 가져다주면 먹을래?”
“정말? 그래도 돼?”
사실 동생들 식사가 항상 부실해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애초에 윤성이 혼자 자취할 때는 요리를 해 먹은 적이 손에 꼽히고, 함께 살게 된 후에도 밖에서 끼니를 모두 해결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다윤이는 학교에서 석식까지 먹지만 소윤이는 보통 집에서 혼자 먹었다.
함께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메뉴만이라도 제대로 된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누구야?”
소윤이가 옆에서 물었다.
“차희가 먹을 거 준대.”
소윤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꼭 부탁한다. 소윤이가 너 보고 싶은가 봐.”
차희가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계이모저모’의 PD가 롤러코스터 세 개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레토 스피어 호텔 옥상에 있다는 갈고리처럼 생긴 놀이기구를 탈 때쯤이었다.
-띵동.
현관벨이 울렸다.
“어서 와!”
윤성이 환히 웃으면서 문을 열자 차희는 꽤 무거워 보이는 반찬통을 먼저 내밀었다. 윤성이 그걸 받아 들자,
“짠!”
차희가 갑자기 등 뒤에 숨겨두었던 케이크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건 또 웬 거야?”
“오는 길에 샀어. 곧 다윤이 수능이잖아. 힘내라고 사 왔지. 나 들어가도 돼?”
“어어.”
차희를 안으로 들이면서 윤성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윤이한테는 너 온다고 얘길 안 했네. 애가 공부 중이라. 괜찮겠지?”
“나 네 동생들하고 친해.”
말 끝나기 무섭게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소윤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꺅! 언니!”
소윤은 차희를 한번 끌어안고는 케이크를 보고 좋아서 방방 뛰었다.
하지만 차희는 케이크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저녁 먹기 전에 이런 달다구리 먼저 먹음 안 돼.”
소윤이 시무룩한 얼굴이 됐다.
“누가 왔어?”
작은 방 문이 열리면서 다윤이 나타났다.
수능 때문에 한창 집중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차희는 반가운 손님이다.
다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케이크를 받았다.
“고마워요, 언니.”
“후후. 공부하면 당 떨어질 거 같아서 샀어. 저녁 먹고 이따 먹어.”
차희가 다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누가 왔습니까?”
베란다에 있던 아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엘리지아전에 참전했던 인형……?”
“인형이 아닙니다. 저는 윤성 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메탈로이드, 아리입니다.”
아리가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근데 너 왜 베란다에서 나오냐?”
윤성이 물었다.
“엔진이 과열되어 식혀야 했습니다. 냉각기를 돌리면 되지만 주인님께서 또 아이스티를 마시고 싶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냉각기는 얼음 만드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차희를 보는 아리의 눈이 반짝였다.
“전에 유나와 함께 초등학교에서 뵈었던 분이군요. 당시 주인님과 나누었던 언행, 그리고 아가씨의 심박과 호흡에 대한 데이터가 제게 있습니다. 주인님의 정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 어?”
차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거 아냐, 인마.”
윤성이 빙긋 웃었다.
“아직은, 아니라는 말씀이시지요?”
아리가 눈을 노란색으로 빛냈다.
“조크입니다. 주인님의 연인 관계에 대해서 제가 주제넘게 떠들 수는 없죠.”
“이미 다 해놓고 무슨…….”
윤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나 초등학교에서 봤다니 무슨 소리야?”
차희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차희는 아리의 몸이 바뀐 과정을 몰랐다.
윤성은 그간의 일을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세상에. 이게 그럼 그 바토리인가 뭔가 하는 S급 헌터의 인형이 아니라 진짜 마수였다는 거야?”
사실은 그 바토리도 마수 쪽이지만.
윤성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진 않았다.
“걱정 마, 안전하니까.”
아리가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탄소 고분자를 기름에 볶고 구운 냄새가 나는군요. 요리를 하실 생각이었다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아냐. 됐어. 네가 무슨 요리를 하냐.”
“제 데이터에는 32,784종의 요리의 레시피가 있습니다.”
윤성은 약간 질리는 기분이다.
“그럼 평소에 소윤이 저녁이나 좀 만들어줘.”
“몇 번 권유했습니다만, 막내 주인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윤성이 소윤을 쳐다보았다.
“왠지 불안해서……. 로봇이니까 기름 먹을 거 아냐. 사람도 그런 줄 알고 요리에 기름 넣으면 어떡해.”
“메탈로이드는 기름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리에 넣는 기름은 식용 올리브 오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리가 말했다.
윤성이 아리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오늘은 됐고 다음에 한번 해줘.”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요리를 한다면 메뉴는 중화요리로 하겠습니다. 스킬 <소각>을 사용한 불 쇼를 보여 드리죠. 진정한 불맛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크지?”
“맞추셨군요. 조크였습니다. 이번 건 어땠습니까?”
“베란다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아리가 베란다로 나가자 윤성은 차희가 가져온 종이 가방에서 음식들이 포장된 밀폐용기를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재밌는 로봇이야.”
차희가 말했다.
“진심이냐? 난 저 조크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개그 욕심 장난 아니라고 쟤.”
“귀여운데 뭘.”
“그러냐. 그보다 이 요리들 좀 데울게.”
윤성은 차희가 가져온 불고기와 간단한 밑반찬들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희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가 팔을 걷어붙였다.
“데우는 거 도와줄게. 그거 전자레인지에 돌리지 말고 팬에다 다시 한번 볶아야 맛있을걸.”
“에이, 아냐. 내가 할게. 음식도 가져다줬는데 손님한테 어떻게 이것까지 맡겨.”
“향수 값이라 생각해.”
그러고 보니 차희한테서 향수 냄새가 났다.
그걸 의식하고 나니 높은 감각 능력이 후각에 집중되어 향을 구체적으로 캐치했다.
꽤 괜찮다. 장미와 재스민 향이 은근하게 풍기는 우드 향과 어우러져 있어서 부드럽고 편안하면서도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차희가 윤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빨리 알아봐 달라는 눈치다.
“향수 냄새 좋네.”
“그치!”
차희가 폴짝 뛰었다.
“너무 좋더라고! 나 요즘 출근할 때 맨날 뿌리잖아.”
신나 하는 걸 보니까 왠지 하나 더 사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윤성은 차희와 함께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근데 어쩌다 이렇게 많이 만든 거야? 보호소 애들 주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댔나?”
“응. 유나 있는 보호소 있잖아? 내가 그쪽 전담이거든. 나랑 같은 팀 선배 셋이랑. 근데 보호소에서 애들하고 파티하기로 해서 각자 음식 조금씩 맡아서 준비했던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근데 김시윤 차장이 갑자기 부서 재정 상황이 나빠져서 내년부터 모든 후원 삭감한다는 거야.”
“진짜?”
“근데 가서 파티 벌여놓고 곧바로 후원 삭감해 버리면 좀 뒤통수 치는 거 같고 그렇잖아. 선배들하고 얘기하다가 그냥 이 문제가 어떻게 정리가 되거나 하면 그때 파티를 하자고 해서 취소된 거야.”
“근데 그렇게 재정 상황이 갑자기 나빠질 수가 있나? 복지부서 운영 자금은 보통 외부 후원보다는 협회 본부에서 나오는 지원금 아냐?”
“그렇지.”
“그리고 협회 재정 상황은 역대급으로 좋을 텐데. 엘리지아 던전을 털었잖아! 주가가 상당히 올라갔을 거라고. 나 같은 D급 헌터한테도 이번에 성과급 300%가 나왔는데.”
“좋겠다.”
“그렇게 협회의 재정 상황이 좋은데 복지 예산을 삭감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대.”
윤성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민에 잠겨 있자 차희는 아차 싶었다.
함께 요리하며 미묘하고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차희는 황급히 눈빛을 예쁘게 하려고 애썼다.
“너무 맛있겠다.”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팬에서 불고기를 볶으면서.
“저 선반에 있는 접시에다가 이거 얹어서 내면 플레이팅도 되게 예쁠 거 같애. 그치?”
“그러게.”
“아, 근데 소윤이가 사이다 좋아하는데 사 올걸 그랬나. 이거 먹으면 목 막힌다고 할 거 같은데.”
“에이, 됐어. 애 이 썩어.”
“너 꼭 애 아빠 같다?”
“소윤이는 아기 때 거의 내가 돌봤지. 쟤랑 나이 차가 열 살이다.”
“그럼 윤성이는 나중에 결혼하면 애 잘 보겠다.”
“나 장난 아니지. 솔직히 헌터 일 안 하고 베이비시터 했으면 돈 더 벌었을걸.”
차희가 킥킥 웃었다.
분위기는 차희가 원했던 대로 다행히 한결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은 함께 10여 분 정도 음식을 준비했다.
그때.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소윤이가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강윤성 있느냐?”
“누구신데요?”
“강윤성의 동생이구나. 썩 문을 열어라. 귀족을 바깥에 오래 세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다.”
소윤은 인터폰 수화기를 걸어놓고 부엌으로 왔다.
“오빠, 이상한 사람 왔어.”
“이상한 사람?”
“전에도 한 번 왔는데 언니가 봤었거든. 그 사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