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레벨업 속도는 9.8m/s^2 091화
시간이 흘러 작전 시작을 이틀 앞둔 날.
인천 공항에서 한국 헌터 협회의 중역들은 최수혁을 만났다.
대구 출신의 S급 헌터. 근접전으로는 김성인 다음이라는 남자다. 거대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일명 ‘바바리안.’
“아이고오~ 성인 성님!”
최수혁이 터프하게 김성인과 악수를 나누었다.
“우째 여까지 나오셨습니꺼? 협회장님 몸도 안 좋으신데.”
최수혁이 김성인 옆의 고제하에게 인사했다.
“아직 현역으로 뛸 정도니 걱정 말게.”
“오랜만이에요, 수혁 씨.”
차예빈이 인사하자 최수혁이 헤벌쭉 웃었다.
“아이고, 예빈 씨는 고마 더 예뻐지셨네예. 연예인 해도 안 되겠심꺼?”
“연예인은 무슨.”
차예빈이 피식 웃었다.
“대구에서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옛날엔 백마중이랑 너랑 셋이 일 많이 했는데. 이젠 우리 둘뿐이군. 아무튼 전에 백마중이 보낼 때 왔다가 다시 길드 때문에 내려갔다가 또 올라오고. 네가 고생이 많다.”
김성인이 말했다.
“마, 지가 뭔 고생입니꺼. 우리 동생이 피똥 쌌지예.”
최수혁이 옆에 서 있는 파리한 안색의 남자를 툭툭 쳤다.
장거리를 운전한 A급 헌터다. 최수혁의 오른팔이자 최수혁이 새로 창설하려는 길드의 간부다.
“아무튼 길드 창설 때문에 바쁠 텐데 레이드 참여해 주어서 고맙네.”
고제하가 말하자 최수혁이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됐십니더. 당연히 지가 끼어야지예. 안 그런교? 마중이 행님이 그래 돼뿌가 마, 그게 참 아쉽슴니다만은. 그래도 마, 우리끼리라도 이래 뭉쳤으니까네. SS급도 더 오고 카믄 거 엘리지아 그거 뭐 어케 안 되겠심꺼.”
“고마워요.”
차예빈이 말했다.
“근데 에어포스는 어디에 있습니꺼? 안 보이네예.”
“켄지 씨를 데려오느라 조금 늦는 걸세.”
고제하가 대답하는 순간 멀리서 에어포스가 날아오고 있었다.
모델 같은 외모에 새하얀 코스튬 때문에 빛이 번쩍거린다.
“아따, 오늘 또 후광 엄청 비추시는구마이.”
최수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에어포스가 헌터들 앞에 착지하자 고제하가 물었다.
“켄지 씨는?”
“공항 입구까지 함께 차를 타고 왔습니다. 저는 손님들을 맞아야 해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되능교? 켄지 씨도 마 중요한 손님인데.”
최수혁의 물음에 김성인이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이쪽엔 샌드맨이 들어오는데 그 사람 성격 알잖아. 여차하면 싸움 날지도 모르는데 제압할 수 있는 헌터가 있어야지.”
“카.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예. 하기사 샌드맨이 난리 치믄 여서 누가 그거 막습니꺼. 에어포스밖에 없지예.”
샌드맨과 안토니오는 약속대로 비슷한 시간대에 비행기를 타고 차례로 도착했다.
한국 헌터 협회의 S급 헌터들이 그들을 마중 나갔다.
“켄지도 오십니까?”
김성인이 고제하에게 물었다. 고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도 샌드맨과 안토니오를 만나고 싶다고 했네. 곧 오겠지.”
“기자들을 차단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런가?”
“샌드맨 그자, 성격이 워낙 엉망이라 또 어떤 트러블을 일으킬지 모르거든요.”
쨍그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구 쪽에서 큰 소리가 터졌다.
고제하는 골치 아프다는 듯 소리의 진원지를 가리켰다.
헌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에어포스가 1등이었다. 그녀는 바닥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몸을 띄운 채 비행을 써서 순식간에 현장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당황해서 잠깐 움직임이 굳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쩍!
처음 본 장면이 샌드맨이 안토니오의 죽빵을 후려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유 머더 뻐-킹 비앗-취! 아 윌 킬-유!”
2미터 장신 샌드맨의 몸에서 모래가 치솟았다. 모래갑옷. 샌드맨의 스킬 중 하나다. 안 그래도 크고 굵은 그의 몸뚱어리가 훨씬 더 커졌다.
샌드맨의 후속 공격이 안토니오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콱!
안토니오가 샌드맨의 주먹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들거렸다.
안토니오는 선글라스를 통해 샌드맨을 쏘아보며 빙긋 웃었다.
“바이아 까가레.”
꽈앙!
두 사람의 주먹 사이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뜨거운 열과 사방에 튀는 모래와 불꽃에 에어포스가 몇 걸음 물러났다.
“멈춰! 아, 아니! 스탑!”
그녀가 소리를 질렀으나 샌드맨의 모래가 이미 바닥에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부식하여 모래로 변하고 있었다.
사막.
전 세계에서 샌드맨만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하나다. 하지만.
후두둑, 쏴아아아-
갑자기 천장에 구름이 몰려들면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머리카락이 젖자 인상을 찌푸리며 구름의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고제하 협회장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샌드맨과 안토니오의 가운데로 불쑥 들어갔다.
“허허, 함께 S급 던전을 토벌할 손님들께서 벌써 다투시면 어떡합니까.”
고제하가 제법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샌드맨은 구름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고제하는 마법을 멈추었다. 잠깐 시선을 끌고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쓴 스킬이었다.
안토니오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더니 샌드맨을 가리키며 고제하에게 말했다.
“È difficile fare affari con questo selvaggio.”
사람들의 시선이 A급 보조계열 헌터에게 쏠렸다.
통역 전문가.
하지만 그는 곧바로 통역 마법을 쓰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 안토니오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샌드맨과 안토니오가 충돌한 지금 통역은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A급 헌터가 고제하에게 속닥거렸다.
“이런 야만인과는 비즈니스를 하기가 어렵다는군요.”
고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봐도 뻔하다. 안토니오가 매우 사소한 실수, 예를 들어 샌드맨 쪽으로 재채기 따위를 했을 것이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샌드맨이 펀치를 날렸겠지.
‘도착하자마자 레이드 팀원의 공격부터 당했으니 안토니오처럼 자존심 강한 인물이 어쩌면 레이드를 관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걸 어떻게 달래지? SS급 헌터를 잃으면 안 되는데.’
A급 헌터가 물었다.
“통역 마법 걸까요?”
“일단 걸어주시오.”
고제하가 대답했다.
마법이 발동되자마자 안토니오는 에어포스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눈을 찡긋했다.
“미국 야만인의 무례한 행동도 여기 계신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서 한 번만 용서하겠습니다.”
또 시작이군.
에어포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안토니오. 이후에 조사해 보았더니 SS급 헌터로 등극한 후 일주일에 여덟 번 스캔들이 터졌던 이력이 있었다. 지속적으로 세간의 이목을 모으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너무 당연한 게 되어서 이슈조차 되지 않았다.
어떤 논평가는 안토니오를 두고, 전투력은 SS, 로맨스는 SSS라는 날카로운 평을 날린 적도 있다.
“아가씨. 제가 오는 동안 비행기 안에서 초코무스 케이크와 와인이 나왔답니다. 아무래도 내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요. 당신의 눈빛이 케이크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까요.”
“뭐, 뭐라는 거야…….”
“하하하, So petty, and tiny.”
샌드맨이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비웃었다.
하찮다는 뜻이다. 하지만 왜 굳이 영어로?
“통역 마법이 걸려 있으니 한국어로 하시지요.”
고제하가 말했다.
샌드맨은 바닥에 가득한 모래를 한순간 손가락을 딱 튕겨서 사라지게끔 했다. 그는 안토니오의 팔을 잡아당기고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말했다.
“네가 할 일은 데이트가 아니라 레이드다. 마더뻐커. 계속 여자처럼 나불대면 또 처맞을 줄 알아라.”
“여자처럼?”
에어포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관심을 보이자 안토니오가 그녀를 만류했다.
“오, 나의 /세뇨리타/~ 이 야만인에게 함부로 고귀한 말씀을 나누지 마세요. 몇 마디만 해도 시끄럽다고 펀치를 맞는답니다. 아까도 그렇게 싸우게 된 거예요. 여행길에 대해 얘길 좀 했더니 시끄럽다며 공격하더군요.”
확실히 안토니오의 수다는 사람 기 빼먹는 힘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먹질을…….
에어포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세상에. 시끄럽다고 싸운 거예요?”
“그랬죠, 아가씨. 그러니 당신의 은하수 같은 목소리를 이 야만인에게 들려주지 마시고 녹음기에 담아주십시오. 제가 밤에 샤워를 마치고 오르골처럼 틀어놓고 잠들 수 있도록.”
에어포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S급 헌터 차예빈은 김성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 부른 거 실수 아닐까요?’
샌드맨은 안토니오가 계속 떠들어대자 또 기분이 상했는지, 그에게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한 번 더 윽박질렀다.
“셧 더 퍽 업. 빗치. 레이드 중에도 계속 그렇게 내 귀를 괴롭히면, 네 눈에다 마법 가루를 뿌려주겠다.”
샌드맨이란 미국의 옛날 동화에 나오는 요정이다. 이 거대한 덩치의 인성 파탄자에게 이런 귀여운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단순히 모래를 다루는 헌터이기 때문은 아니다.
요정 샌드맨은 잠을 자지 않는 어린이들의 눈에 마법 가루를 뿌려 잠들게 만드는 존재.
헌터 샌드맨의 모래를 얻어맞은 생물은 누구든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되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일맥상통했다. 샌드맨은 그 별명을 꽤 좋아해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항상 이렇게 대신하곤 했다.
“음. 음. 그쯤 해두고.”
고제하가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따라오십시오. 작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산 감염지에 대해서 가르쳐드리지요. 마수의 타입과 숫자와 우리가 공략할 위치와 방향에 대해.”
그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들은 공항을 빠져나가면서 켄지를 만났다.
천만다행으로, 켄지는 정상인이었다.
“한국을 지키는 전사들을 만나 뵈어 큰 영광입니다.”
켄지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고제하 협회장은 켄지와 악수를 나누며 모두를 협회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