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레벨업 속도는 9.8m/s^2 089화
“어어, 그러셔?”
“그 스킬보다 이 마법책을 쓰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책 안에는 일곱 개의 차원의 모든 시대의 모든 언어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보다 더 우수한 통역 마법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그렇다. 심지어 이 책의 언어 중에는 이 은하 밖에서 가져온 것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사용해 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쓸 일은 없겠는데.”
“그렇겠지. 아무튼 이걸 써라.”
“좋아.”
윤성은 마법책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쓰면 되지?”
“책에 마력을 넣어보아라.”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사용할 때처럼 마법책에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란빛에 휘감긴 마법책이 천천히 손바닥에서 떠오르더니,
파라라라락-
책장이 빠른 속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윤성의 머릿속에는 찌릿한 전기 충격 같은 것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건…….”
“이 통역 마법은 패시브다. 영구히 가지게 될 테지. 네가 살고 있는 인간계에는 이 마법이 없는 것으로 안다. 큰 보물을 받았다고 생각해라.”
“크으!”
마법을 완전히 흡수한 윤성이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패시브형 통역 스킬을 얻었다.
“그러고 보니 바토리, 너 옛날에 그룬헤잘드한테 뭘 따진다고 하지 않았냐? 하인스는 어떻게 됐어?”
“그룬헤잘드가 계속 여행 중이라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지저분한 잡동사니들은 다 무엇이냐?”
바토리가 윤성에게 물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온갖 고철 덩어리들.
메탈로이드계에서 주워온 T505의 부속품들이다.
“어, 이건…….”
그러고 보니 아리는 어디 갔지? 안 보이는데?
윤성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윤성은 다윤이나 소윤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 오빠 지금 일하고 있어. 왜?”
하지만 문밖에서 대답한 것은 아리다.
“주인님, 접니다.”
“들어와.”
아리는 오른팔에 거품이 가득하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 어어…….”
이놈 상태가 이상한데? 마력이 이글거리잖아? 왜 전투 모드야?
“사악한 마법이 느껴져서 와보았더니 사악한 마녀가 주인님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군요.”
아리가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하며 바토리를 쏘아보았다.
바토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무엇이냐? 이 하등하다 못해 하찮고 하잘것없는 장난감은? 정말이지 벌레보다 못한 미물이로구나. 역겨운 기름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주인님의 시대에서조차 기름은 쓰지 않습니다. 하물며 메탈로이드에게 기름이라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당신의 시각으로 저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뭐라고?”
“잠깐. 당신의 옷차림과 유사한 게 내 데이터에 있습니다. 당신 옷의 전체적 디자인은 고딕 양식인데 문양은 바로크입니다. 구시대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도 없군요.”
“이, 이런 건 클래식하고 창의적인 것이다. 이 멍청한 고철덩이야! 귀족의 고급 의상을 못 알아보다니. 네놈이 얼마나 하등한지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구나.”
바토리가 역정을 냈다.
그러나 아리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성에게 말했다.
“주인님, 허락만 하신다면 이 마녀를 제가 3초 안에 깨끗하게 청소하겠습니다. 주인님의 화장실 변기처럼 말입니다.”
아리가 윤성에게 말했다.
그러자 바토리도 재빨리 윤성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나는 감각 능력이 높으니 네가 지금은 전투력이 그렇게 많이 높지 않다는 걸 안다. 이 위험한 기계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큰일 날 것이다. 내가 대신 처리해 주마.”
“아니, 그러지 마.”
당황한 윤성이 만류했지만 바토리는 벌써 마법검을 빼 들었다.
채애앵!
위이이잉!
동시에 아리의 두 손바닥에서 마력 광자포의 뚜껑이 열렸다.
“주인님의 집이 상할까 걱정되니 바깥으로 나가죠.”
“바라던 바다. 하등한 네놈은 순간이동석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내가 직접 써주마. 함께 마계로 가서 너를 쇳물로 만들어야겠다.”
“둘 다 그만해!”
윤성이 소리쳤다.
“윤성! 이 미천한 고철 덩어리의 소유권을 내게 넘겨라. 돈은 얼마든지 주마. 내 이것을 산산이 조각내서 마계의 용암 아래에 던져 버릴 것이다.”
“주인님, 이런 요망한 것을 주인님 곁에 계속 두었다간 큰일이 납니다. 본래 이런 마녀들은…….”
“그만. 그만! 둘 다 조용히 해봐.”
윤성이 휴대폰을 들면서 말했다.
[에어포스]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마스크맨, 에어포스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음.”
윤성은 바토리와 아리의 눈치를 살폈다.
바토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아리는 눈에서 쌍라이트를 번쩍이면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괜찮겠지?’
“네. 얘기하세요.”
-이번에 협회가 일산 감염지를 수복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직 최고 간부들밖에 모르는 일인데요.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좋습니다. 협회는 마스크맨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으음.”
고민되는데.
만약 마스크맨으로 참전하겠노라 약속을 한다면 강윤성으로 참전하기가 애매해진다.
D급 헌터로 참전하면 작전지를 이탈하더라도 무서워서 튀었다 하면 감봉이나 정직 징계를 받는 게 다일 것이다.
전투로 혼란한 와중이라면 아예 모를 수도 있고.
하지만 A급 헌터가 참전 중에 자리를 비운다면?
심지어 재각성 헌터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모은 상태에서 전투 중에 사라진다면?
그 시간 동안 어디에 갔었느냐고 추궁당할 우려가 있다.
“이번 전투 참전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윤성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에어포스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저기, 그 대신.”
-네?
“S급 전투원 두 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윤성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바토리와 아리가 어리둥절해서 윤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약 한 시간 후, 윤성의 작전을 들은 아리가 분통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엘리지아 퀸과 일대일로 겨룰 수도 있습니다.”
“좋아, 좋아.”
“하지만 이 바로크년의 인형 역할이라뇨!”
“호호호! 난 굉장히 마음에 들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바토리가 기뻐서 날아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둘 다 마수라서 내 친구로 참전한다는 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바토리는 그래도 인간처럼 생겼으니 조금 변장하면 어찌어찌 되겠지만. 넌……. 답이 없잖아?”
“차라리 주인님의 인형이 되겠습니다.”
“난 체질상 재각성 심사를 받아도 A급으로 판정될 거라고. S급 인형을 내가 어떻게 다루냐?”
헌터들 중에서는 ‘인형술사’가 있다.
매우 특이한 조작계 헌터들인데, 한국 S급 헌터인 차예빈도 인형술사 클래스다.
윤성은 바토리에게 인형술사 역할을, 아리에게는 전투 인형 역할을 맡겨서 각각 엘리지아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아리는 명령이니 따를 것이고 바토리는 엘리지아와 싸울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으니까.
“바로크년의 인형극이라니 너무 가혹합니다. 주인님, 한 번만 더 고려해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따라주면 안 되겠냐. 다음에는 이런 거 안 시킬게.”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눈물샘은 없습니다만 울고 싶습니다.”
아리가 눈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정말로 눈물 같은 게 몇 방울 똑똑 흘렀다.
“뭐야 이건?”
“윤활액입니다. 신경을 조작해서 라이트 쪽으로 흘렸습니다.”
“닦아라.”
“넵.”
아리는 재빨리 바닥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바토리가 킬킬 웃었다.
“자, 연습을 해야겠구나. 하등한 기계야.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 보아라.”
“주, 주…….”
아리가 바토리를 노려보았다.
“죽빵 맞고 싶냐?”
“뭐라고!”
“조크입니다. 역시 바로크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서 유머 코드가 우리와 맞지 않는군요. 주인님.”
둘이 아웅다웅하는 걸 보면서 윤성은 피식 웃었다.
약간 걱정은 된다만 그래도 잘하겠지?
“하인스는 뭘 하고 있어?”
윤성이 바토리에게 물었다.
“마수들을 좀 사냥하고 순간이동석의 마력을 채워서 마계에 갔다. 그 후로는 연락한 적이 없다.”
“하인스도 인간계에 있다면 엘리지아전에 참전시킬 텐데.”
“확실히. 엘리지아와 싸운다면 마계의 힘을 빌리고 싶을 테지.”
바토리가 자긍심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와 함께 낮에 찻집에서 회의하던 그 남자도 상당히 강해 보였으나 엘리지아와 겨룬다면 성체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지아 성체가 그렇게 강한가?”
“물론. 아!”
갑자기 바토리가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굳었다.
“뭐야? 왜 그래?”
“찻집에서 너와 얘기하던 그 남자. 너한테 중요한 사람인가?”
“약간? 왜?”
“그 남자 지금 위험하다.”
“위험하다니?”
“찻집에서 나갈 때 엘리지아 하나가 그를 뒤따라 갔다.”
“뭐!”
“성체 엘리지아였다. 완벽하게 인간계에 은신하고 있었다. 외모도 인간처럼 생겼고 마력도 완벽히 은폐한 상태였지. 내 수준의 기감으로도 간신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
“어디야!”
윤성이 소리를 질렀다.
“그 엘리지아 지금 어디에 있어?”
“나, 나도 모른다.”
“왜 그때 얘길 안 한 거야?”
“엘리지아는 원래는 온순한 편이다. 자기 영역을 지킬 때만 전투적이지. 그 남자를 뒤따른 것도 호기심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기 직전이라면,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한 인간이라면…….”
바토리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요주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나온 암살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젠장!”
윤성은 거칠게 방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황급히 랜더의 코트를 걸치면서. 전투화를 신기 위해 현관을 향해 달려가려는 순간.
“오, 오빠.”
거실에서 TV를 보던 소윤이 윤성을 보고 말했다.
“오빠, 뉴스 봤어?”
“뭐?”
윤성의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뉴스에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S급 헌터 백마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