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레벨업 속도는 9.8m/s^2 087화
윤성은 이를 으득 씹더니 다시 차태식에게 수십 발의 빛의 탄환을 난사했다.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밀가루 반죽 같은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차태식은 아직도 죽지 않았고 꾸물꾸물 재생하는 중이다.
‘어라,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놈 젤리 같은 상태다.
이거 엄청나게 점도가 높은 액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광폭한 물결 발동!>
윤성이 오랜만에 버프 스킬을 발동했다. 차태식의 몸은 압력과 거친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단위로 터져나갔다.
사방에 붙어서 후두둑 떨어지는 살점들.
그 사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핵이 보인다.
와직!
윤성은 그걸 낚아채 부숴 버렸다.
시간이 없다.
윤성은 재빨리 보스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길에 김인식이 나타났다.
그는 던전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흐느끼고 있었다.
“야! 애들은 다 어딨어?”
“흑흑흑 모르, 모르겠어요.”
“왜 안 나가고 여기에 있어?”
“무서워서……. 그리고 길도 잃어서.”
“아오, 이 한심한 새끼.”
윤성은 김인식의 팔을 잡아당겨 세웠다.
“따라와라.”
미안하지만 학생 네 명을 모두 찾은 후에 던전을 나간다거나 그런 건 없다.
애들이 이미 밖에 나갔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차희와 다윤이가 위험하니까.
윤성은 김인식을 거의 집어 들다시피 하고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렸다.
벌써 A급 헌터 두 명이 쓰러졌다.
백마중 역시 꽤 큰 부상을 입었다.
어째선지 8년 전에 상대했던 준성체 엘리지아들보다 훨씬 강한 느낌이다. 원래 A급 헌터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백마중. 쉽게 당하진 않는다.
<디토네이션 클라우드 발동!>
가연성의 구름이 드리워져 황동수의 몸을 감쌌다.
8년 전 전투로 터득한 노하우 중 하나다. 엘리지아들은 액체에 약하다.
<중금속 폭우> 같은 스킬을 사용하면 더욱 쉽게 제거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시민들의 피해가 클 수 있다.
하지만 디토네이션 클라우드는 엘리지아의 몸에 스며들 수 있고 폭연성이 매우 높다.
<폭파!>
백마중이 스킬을 사용하자 황동수의 엘리지아 몸뚱이가 산산이 조각나며 폭발했다.
하지만 황동수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신체를 재생하면서 달려오는 황동수의 한 손이 백마중을 겨냥했다.
<플레임 미사일 발동!>
황동수가 발사한 화염 미사일이 백마중을 향해 쇄도했다.
방금 전에 큰 마법을 써서 배리어로 막지는 못할 것이다. 쓰더라도 가용 마력이 약해서 뚫리겠지.
피할 수는 있지만.
‘헌터들이 다친다.’
등 뒤에는 A급 헌터 셋이 있었다.
백마중은 피하는 대신 배리어 마법을 시전했다.
폭발력이 크게 줄었지만 플레임 미사일은 백마중의 배리어를 뚫어버렸다.
콰아앙!
미사일에 적중당한 백마중이 휘청거렸다.
A급 헌터들 중에 탱커가 없다.
유일하게 하나 있었던 게 던전 안에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사실 학생들 심사 봐주는 데 필요한 건 힘보다 감각 능력이니까. 대부분의 헌터들이 기감이 뛰어난 마법 계열로 구성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앞에서 황동수의 움직임을 잡아줄 탱커가 없으니 백마중이 제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마스크맨은?”
백마중이 헌터들에게 물었다.
“아직입니다.”
“마스크맨을 불러라. 그 사람만이 저 놈을 이길 수 있다.”
황동수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A급 헌터 둘을 쳐냈다.
콰악!
그가 백마중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크아악!”
“그러고 보니 너한테도 빚이 있었지. 날 까놓고 내 앞에서 강윤성을 백마 길드에 받아주려고 했잖아?”
“크윽.”
백마중이 황동수의 손목을 쥐고 몸을 떨었다.
황동수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없나?”
“어떻게 엘리지아가 됐고 어떻게 일산에서 나온 거지?”
“너희가 일산을 봉쇄해 놓은 게 완벽한 줄 알고 있다니 참 놀랍군. 엘리지아가 힘이 없어서 그걸 여태까지 못 뚫은 줄 알아?”
“뭐라고?”
“그동안 적기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이젠 서둘러야 하게 되었다. 메탈로이드가 이 땅을 노리고 있거든. 선수를 뺏길 순 없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메탈로이드가 노린다니?”
“알 거 없잖아. 이제 유언은 끝이다.”
“잠깐만.”
백마중이 숨을 고르며 피식 웃었다.
“고맙다. 시간을 충분히 줘서.”
<중금속 폭우 발동!>
백마중이 스킬을 사용했다. 황동수의 머리 위가 아니라 몸속이다. 디토네이션 클라우드로 폭파시킨 황동수의 몸뚱이 중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가슴 위 쇄골 아래의 가로로 찢어진 틈.
백마중은 그 안에 초소형으로 사이즈를 줄인 중금속 폭우를 발동시켰다.
“크아아악!”
황동수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백마중은 황동수를 향해 화염 마법들을 발사했다.
“캬아아악!”
갑자기 황동수가 사납게 짖더니 눈빛이 변했다.
튕겨 나오는 마법 미사일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엘리지아는 이성을 잃었다. 황동수는 맹렬한 짐승처럼 돌변해서 백마중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콰아앙!
황동수의 발치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웬 로봇 한 대가 전투 현장에 뛰어들었다.
아리였다.
T505의 몸체로 완전히 갈아 끼운 아리는 마치 사이보그 인간처럼 보였다. 광이 나는 강철 부품들과 반짝이는 두 눈의 라이트.
확실히 남자라면 열광할 만한 어떤 로망이 담긴 몸체다.
둘째 주인, 다윤의 생체 시그널이 위험한 상태라 와봤는데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아리는 쿵쿵 걸어가서 황동수를 한 번 걷어찼다.
폭발을 직격으로 맞은 황동수는 아직 일어나지 못한 채 바닥에서 울부짖었다.
아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박살 난 차량 옆에서 공포에 떠는 차희와 다윤을 발견했다.
그 앞에는 소년 한 명이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있었다.
아리는 그쪽으로 바짝 다가간 다음 몸을 숙이고 다윤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작은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턴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메탈로이드!”
일어난 황동수가 아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팔이 거대한 망치처럼 변했다.
쾅!
정확한 타이밍에 아리가 내지른 펀치가 황동수의 망치와 충돌했고.
쿠우우!
사방에 모래 연기가 일었다.
충돌의 결과는 황동수에게 치명적이다. 황동수는 가슴팍에 중금속 폭우를 아직도 달고 있었다.
쇄골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황동수의 몸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수가 우릴 돕다니……?”
백마중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자기네끼리 치고받으니 다행이긴 한데, 왜 도와주는 거지?
나동그라진 황동수는 아리를 향해 스킬을 발동했다.
<파이어 스톰 발동!>
황동수의 불꽃이 아리의 머리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T505가 가지고 있던 S급 메탈로이드의 부품으로 완전 무장한 아리다.
황동수의 불꽃은 뜨거웠지만 아리를 녹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소각 발동!>
T505의 부품을 습득하면서 스킬도 가지게 되었다.
아리의 손에서 발사된 불꽃은 황동수의 화염구 같은 것과 차원이 다르다.
어마어마한 열기.
쾅!
화염을 덮어쓴 황동수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뒤쫓은 아리가 그의 뒤통수를 쥐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하지만 동시에 황동수의 망치가 아리를 후려쳤다.
까앙!
기이한 소리와 함께 아리의 몸이 공중으로 떠서 한 바퀴 굴렀다.
시민들과 헌터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이 강력한 마수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갑자기 던전 게이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마스크맨.
그 뒤를 이어 학생 두 명이 나타났다.
백마중, 아리와의 잇단 전투로 지쳤던 황동수는 마스크맨을 보자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현재 에어포스 다음가는 한국 최고의 헌터랬지.’
강윤성처럼 저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인기를 누리면서 정체를 오픈하지 않는 것이 강윤성과 비슷해 보였다.
“죽어!”
황동수가 다짜고짜 윤성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파앙!
하지만 윤성은 가뿐히 한 손으로 후려쳐서 불꽃을 터뜨려 버렸다.
“황동수 이 개자식.”
분노한 윤성이 황동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펀치를 날리는 척했지만 옆구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단검 투척 타깃>
종단 속도로 날아든 단검이 황동수의 가슴에 박혔고.
쾅!
그 단검을 주먹으로 후려갈겨 몸속에 쑤셔 넣었다.
“크악!”
황동수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윤성의 공격력은 훨씬 압도적이다.
윤성은 황동수의 전신을 향해 빛의 탄환을 무수히 난사했고.
<광폭한 물결 발동!>
차태식을 처치할 때처럼 스킬을 사용해서 황동수의 몸을 박살 내버렸다.
사방에 후두둑 떨어지는 엘리지아의 살점들.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께 헌터들과 예비 헌터들이 경외심 가득한 표정으로 윤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아리가 가까이 다가와 인사했다.
“작은 주인님을 제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잘했다. 근데…….”
윤성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차희는?”
갑자기 아리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노력했습니다만, 배터리 충전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뭐, 뭐라고?”
윤성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어떻게 됐지? 살아는 있나?”
“마스크맨!”
뒤에서 차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한숨 돌린 표정으로 다윤과 함께 나타났다.
“멀쩡하잖아?”
윤성이 아리에게 물었다.
“조크였습니다. 어땠…….”
깡!
윤성이 아리의 머리를 한 대 쳤다.
“아오. 그놈의 조크.”
“메탈로이드에서는 이런 조크 잘 먹혔는데 아쉽군요. 인간의 유머 코드란.”
“애들 지켜줬으니 한 번만 봐준다. 먼저 집에 가 있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 잠깐만.”
윤성이 아리를 세웠다.
“너 부품 다 갈아 끼운 것 같은데 레지스탕스 정보는 찾았냐?”
“그 부분 데이터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락이 걸려 있어서요.”
“그렇군. 다 되면 알려줘.”
“네, 주인님.”
아리는 바닥을 쿵쿵 울리며 현장을 벗어났다.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차희가 마스크맨을 모르는 척 인사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우린 괜찮은데 신차민이라는 학생이 많이 다쳤어요.”
“저희를 감싸다가…….”
다윤이 울먹거렸다.
윤성은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A급 헌터 중 상당수는 힐링 및 보조 계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빠르게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백마중도 포함되어 있다.
윤성은 백마중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좀 괜찮습니까?”
“버틸 만합니다. 마스크맨이 있어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엘리지아가 나온 걸까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큰일이군요. 그리고 앞으로 매스컴에게 협회가 엄청 두들겨 맞을 것도 걱정되고요.”
백마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옆에는 신차민이 잠든 채 치료받고 있었다.
“굉장히 용감한 학생이었습니다.”
백마중이 말했다.
“시민 둘을 지키려고 엘리지아의 펀치 앞으로 몸을 날렸으니까요. 그 후에도 말을 걸어서 시선을 돌리는 등, 웬만한 프로 헌터만큼 상황 대응이 좋았죠.”
“그랬군요.”
윤성이 신차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근히 안쓰러웠다.
“이번 시험. 상황 대응 능력 테스트죠?”
윤성의 물음에 백마중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이 애가 우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