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레벨업 속도는 9.8m/s^2 086화
“어서 우리에게 통역 마법을 걸어주세요. 나는 아가씨와 함께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
A급 헌터가 한숨을 내쉬며 안토니오에게 통역 마법을 걸었다.
“안토니오 님. 제발…… 상대는 SS급 헌터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정했지만 안토니오는 전혀 듣지 않았다. 벌써 스위치가 켜진 안토니오는 에어포스를 자리에 앉힌 후.
“나는 원래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살짝 화가 났었지만, 당신의 미모가 거친 바다를 잠재우는 자장가처럼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군요.”
에어포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D급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거 아셨잖아요? 하는 표정이다.
“입국 심사에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어포스가 사과했다.
“당연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요. 아가씨는 천국에서 내려와 이 험난한 세계에 입국하신 것이니까요. 부디 당신이 천국에서 받은 비자가 장기 체류가 가능한 것이길 바랍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떠난 후의 삶을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어…… 네?”
에어포스가 A급 헌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통역 마법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건가요?”
“네에…….”
A급 헌터가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안토니오는 에어포스의 손가락을 잡아당겨 주의를 돌렸다.
“입국 데스크에서 날개는 떼어두고 오신 모양이군요. 아가씨. 우리의 미팅이 끝난 후에 함께 레퍼블리카 광장 앞의 라이나쎈떼 백화점에서 저와 함께 쇼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잃어버린 날개처럼 아름다운 옷을 사드리고 싶군요.”
“으음…….”
에어포스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거 상황대응능력 시험인가?
차라리 마수랑 싸우는 게 낫겠군.
***
사고는 김인식 팀이 들어가고 30분이 지났을 무렵 발생했다.
던전 게이트의 파장이 변했다.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역시 백마중이다. 4,300점짜리 버프를 들고 있는 윤성의 기감이 당연히 백마중보다 더 높지만, 백마중에겐 산전수전 다 겪은 30년 분량의 경험치가 있다.
“마스크맨,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마중이 심각한 표정으로 윤성을 불러냈다.
“뭐죠?”
“게이트 안에서 누가 죽은 것 같습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네?”
“5인이 입장하면 게이트 파장이 좁아져서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 없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렸어요.”
“하지만 저 안에는 빈사 상태의 스네일 보스 하나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A급 헌터가 들어갔는데 레이드 팀이 죽었다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밖에 안 보입니다. 제가 들어가 보죠.”
“아뇨.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2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보는 것보단 던전 들어가는 게 속 편하지.
윤성은 바깥에 백마중을 남기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샤프 스네일.
왜 하필 고제하가 시험장으로 이 던전을 골랐는지 윤성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백마중은 알고 있었다.
샤프 스네일은 엘리지아의 친척뻘 되는 던전이다.
고블린이 나오는 던전이 C급이나 D급이라면, 동굴 고블린이 나오는 곳이 B급인 것처럼.
엘리지아는 역대 최악의 S급 던전이지만 샤프 스네일은 그와 비슷한 타입의 E급 던전이다.
‘일산 수복전을 앞두고 새로 각성할 학생들에게 타입을 교육시킨다.’
또한.
‘학생들은 전투력이 거의 없는 비각성 상태이므로 샤프스네일은 대부분의 학생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이 둘은 이번 시험의 숨겨진 목표였다.
엘리지아와 대전쟁을 시작하면 B급 이상 헌터들이 모두 투입될 거다. 엘리지아 중에서 가장 약한 유체가 B급이니까.
하지만 B급 헌터가 B급 유체만 상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더 강한 적을 마주칠 경우에 행동 요령을 익히게끔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교육적 차원의 문제일 뿐. A급 헌터들이 잔뜩 있는 가운데 샤프 스네일이나 샤프 스네일 보스는 위협적이지 않아야 한다.
“이럴 수가…….”
하지만 보스 방에 도착한 윤성은 처참한 몰골로 찢어진 A급 헌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것은.
“차…… 태식……?”
윤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차태식이다. 온몸이 엘리지아의 에메랄드 피부로 뒤덮여 있었지만 얼굴은 차태식이다.
아성체 상태. 하지만 기본 베이스가 일반인이 아니라 C급 헌터였기 때문에 일반 아성체 엘리지아보다 훨씬 세다.
A급 헌터 하나쯤은 간단히 찢어 죽일 정도로.
“마스크맨?”
차태식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놈이 걸리적거리는 바람에.”
차태식이 A급 헌터의 사체를 발로 걷어찼다.
“애들을 놓쳤어. 한 놈만 더 죽였으면 마스크맨과 백마중이 같이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짓이냐 이게?”
윤성의 목소리가 분노에 떨렸다.
“하얀 방에 갇혀 있었다. 수호자의 방이라고 하더군. 난 수호자를 보지 못했지만 황동수 선배님은 보셨어. 그리고 내게 탈출하자고 했지.”
“뭐?”
“나가서 우린 엘리지아를 찾아갔다. 강윤성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지만 그 전에 헌터 협회에게도 복수를 해야 했지.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골랐다. 신입들이 대거 탄생할 오늘. 모두 죽여 버리려고.”
윤성이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못할 거다. 넌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그럴지도. 하지만 그동안 황동수 선배가 모두 죽이겠지.”
“뭐라고?”
“그분은 바깥에 계신다.”
“안 돼!”
바깥에는 다윤이와 차희가 있다.
마스크 안, 윤성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는 황급히 보스방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콰아아!
차태식의 몸에서 날아온 촉수가 윤성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방심하다가 맞은 일격이라기엔 데미지가 적지만 꽤 욱신거린다.
저놈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주의할 만하다.
“그리고 너도 날 죽이지 못한다. 난 강윤성을 죽일 때까지 절대 죽지 않거든.”
“이…… 개새…….”
윤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걔다 이 미친 새끼야!”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든 윤성의 주먹이 차태식의 얼굴에 작렬했다.
***
마력 반응.
백마중의 귀가 쫑긋했다. 표정이 싸하게 굳는 것을 보고 A급 헌터 하나가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대표님?”
“학생들 전부 피신시켜요.”
백마중이 빠르게 전투복을 입으면서 말했다.
“네?”
“빨리. 서두르세요.”
이 감각. 이런 종류의 마력 파장.
익숙하다. 8년 전 지옥을 맛보던 때에 매일같이 느꼈다.
준성체 엘리지아.
최소한 S급이다. 8년 전에도 이 정도의 적을 혼자서 잡을 수 있는 헌터는 국내에서 신민수와 고제하, 에어포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는 보조를 맞춰줄 A급 헌터가 열 명이나 있다.’
백마중이 주위의 A급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문제는 지켜야 하는 짐덩이들도 214명 이상이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면서 싸워선 승산이 없다.
“김성인 이 새끼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대체 어떻게 일산에서 빠져나온 거지?”
백마중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말을 들은 A급 헌터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빨리 학생들 대피시키라고!”
백마중이 소리를 질렀다.
“전부! 여기서 달아나라!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요?”
“전투?”
학생들과 헌터들, 학부모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자.”
차희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반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녀 역시 헌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차희는 다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신차민이라고 했지? 너도 가자. 따라와.”
다윤은 바로 뒤에 있던 신차민까지 데리고 자신의 자동차로 이동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콰앙!
무언가가 차희의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졌다.
처음엔 예티 같은 설인인 줄 알았다.
온몸이 새하얀 데다가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보니 몸뚱이가 털로 뒤덮인 게 아니라 석영 같은 금속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화, 황동수?”
“크으.”
황동수는 사악하게 웃더니 자동차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뭐야? 민차희? 아하하. 그래, 네가 강윤성과 그런 사이였지. 시작부터 좋은 사냥감을 찾아서 운이 좋군. 이따 강윤성을 쳐죽일 때 네년의 모가지를 보여줘야겠다.”
황동수의 손이 번쩍 올라왔다.
“꺄아악!”
콰아아앙!
황동수의 주먹이 자동차를 박살 내버렸다. 차희를 노리고 휘두른 것이었지만 기막힌 타이밍에 신차민이 그녀를 잡아당겼던 것이다.
“도, 도망쳐! 둘 다!”
신차민이 소리를 질렀다. 다윤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주저앉아 꼼짝도 못 한다.
차희는 얼른 다윤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허튼짓을.”
황동수가 차희와 다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주먹은 한 번에 두 사람을 모두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차민이 뛰어들었다.
쩌어엉!
황동수의 주먹을 대신 받아낸 신차민은 그대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 쓰러졌다.
“꺄아악!”
“으악!”
“살려줘!”
시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피하는 중이다.
A급 헌터들과 백마중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쓰러진 신차민의 눈에 그 모습이 천천히 중계되었다.
하지만 황동수가 더 빠르다. 그의 손이 차희를 죽여 버리기 직전.
“야!”
간신히 상체만 일으킨 신차민이 소리를 질렀다.
“윤성 형님이랑 싸우고 싶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뭐?”
“하지만 네가 그 사람들을 죽이면 알려주지 않을 거야.”
“재밌는 놈이군. 네가 아니래도 강윤성은 찾아낼 수 있다. 협회 자료를 뒤져보면 금방이지.”
“형님은 협회를 나오셨다. 그리고 지금 이 근처에 있다고.”
물론 마스크맨의 정체를 모르는 차민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근처에?”
황동수는 차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신차민을 향해 움직였다.
그가 약 네 걸음 정도를 뗀 순간,
퍼억!
황동수의 머리가 움푹 패었다.
백마중이 스킬 <바람 칼날>을 사용한 것이다.
시민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각도가 나오지 않았지만 신차민이 저놈의 주의를 돌려준 덕에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놈에겐 아직 큰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황동수의 머리가 재생되었다.
이게 엘리지아와 싸울 때의 가장 큰 문제다. 핵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몸을 재생한다. 이론적으로는 거의 무한히.
“그래, 저것들을 먼저 치워야겠군.”
황동수가 백마중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엘리지아에 감염된 헌터의 가장 위험한 점은, 감염된 헌터는 인간이었을 때의 스킬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화염 폭발 발동!>
또한 그 위력은 엘리지아가 되어 수배로 배가된다.
폭탄을 터뜨린 듯한 거대한 불꽃이 A급 헌터들을 덮쳤다.
하지만.
<배리어 발동!>
백마중은 한국 최고의 마법사다.
그가 사용한 방어 마법이 헌터들을 감싸면서 화염으로부터 지켜주었다.
“돌격!”
백마중이 소리쳤다.
헌터들은 일제히 황동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드득.
윤성은 쓰러진 차태식을 잘근잘근 밟았다.
아성체 엘리지아. 헌터 기반이라 강하다 해봤자 S급엔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지금의 윤성은 S급에서도 최상위권이고.
“크으윽.”
차태식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핵이 어디냐. 시간 없어 빨리 말해.”
윤성이 빛의 탄환을 다시 차태식의 복부에 박으면서 말했다.
이 망할 새끼가 엘리지아의 끈적거리는 몸뚱이로 윤성을 계속 붙잡으며 시간을 질질 끈다.
그렇다고 죽이려니까 재생력이 너무 좋아서 쉽게 죽지도 않는다.
핵을 파괴해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정말 큰일이다. C급 헌터였던 차태식이 엘리지아로 각성해서 A급 이상이 되었다면 황동수가 엘리지아로 각성했다면 백마중이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핵이 어디냐고!”
윤성이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