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레벨업 속도는 9.8m/s^2 085화
띵!
메시지 알림음에 윤성은 휴대폰을 꺼냈다.
[에어포스입니다. 황동수, 차태식 헌터님은 두 분 모두 실종되었고, 두 분과 관련되어 이집트 경찰에서 넘어온 자료는 수사 종결되었습니다.]
“실종이라고?”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민에 잠겨 있는데.
뚜르르르!
이번엔 전화가 울렸다. 다윤이다.
“여보세요?”
윤성은 황급히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원래 참관 중에 개인 볼일을 보면 안 되지만 동생 전화니 받아야지. 가뜩이나 수능 앞두고 정신없는 앤데.
-오빠! 그거 알아? 지금 협회에 마스크맨 있대.
다윤의 첫마디다. 윤성은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더라고.”
-오빠 지금 어딘데?
“협회.”
-마스크맨 봤어?
“어? 으응……. 봤지.”
아까 화장실 거울로 봤지.
-나 마스크맨 다시 보고 싶어. 스쿨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못 했는데 인사도 하고. 안 그래도 오늘 차민이 시험 보는 날이래서 응원하러 갈까 하다가 말았는데. 지금에라도 가야겠어.
“차민이 시험? 응원?”
-응. 신차민. 오빠 알지? 전에 학교에서 아는 사이 같았는데.
“옛날에 레이드 같이 했어. 근데 신차민이 시험 보는데 네가 왜 응원을 가?”
-나 걔랑 좀 친해졌거든. 원래는 잘 몰랐는데 스쿨에 오빠 왔던 날, 걔가 나 많이 도와줬어. 그래서 고맙다고 내가 밥 한 번 샀는데 그렇게 친해져서 요즘도 가끔 봐. 전에 같이 영화도 봤어.
“아니, 이 새끼가?”
-어?
“그 띨빵하게 생긴 놈이 순진한 척 다 하더니. 뒤로는 몰래 너한테 집적거리고 있었단 말이야?”
-집적거리긴 내가 집적거렸지. 걔 되게 귀엽지 않아?
“귀엽긴 개뿔. 멍청하더만! 각성도 안 한 주제에 맨손으로 헌터 범죄자한테 덤벼들기나 하고. 오빠는 그놈은 안 돼.”
-왜애! 아무튼 나 지금 간다? 오빠 협회 어디에 있는데?
“난 또 왜?”
-오빠한테 차민이 소개도 해주고. 그리고 마스크맨도 같이 보고. 오빠도 마스크맨한테 인사해야지. 그분이 오빠도 구해준 거잖아.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일이 바빠서.”
-일이 바빠?
“응.”
-할 수 없지. 차희 언니나 만나야겠다.
“소윤이도 그렇고 너도 대체 언제 차희랑 그렇게 친해졌냐?”
윤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띵!띵!띵!
종이 울렸다. 인·적성 시험 시간이 종료된 것이다.
“나 들어가 봐야겠다.”
윤성은 전화를 끊고 시험장 안으로 돌아갔다.
시험지들을 모두 걷고 협회 인사과로 전달한 후, 마지막 시험인 상황대응능력 시험에 들어갔다.
이번 상황대응능력 시험은 특별히 던전 현장에서 치러졌다. 세트장이 아니다. 범람한 E급 던전, ‘샤프 스네일.’
물론 던전은 이미 상급 헌터들이 클리어 직전의 상황으로 만들어두었다. 샤프 스네일들에게는 보조 계열 A급 헌터들이 엄청난 디버프를 걸어서 운신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아직 각성도 못 한 학생들에게는 쉽지 않은 상대다.
학생들은 5인 1조를 짜서 함께 샤프 스네일을 한 마리씩 처치해야 한다.
따라서 214명의 학생은 협회의 상급 헌터들과 함께 대관 버스 여섯 대를 타고 모두 샤프 스네일 던전이 있는 선유도 한강공원으로 이동했다.
협회 건물 안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학부모들, 그리고 상급 헌터로 판정될 학생들을 노리던 길드 스카우트들은 꽤 오랫동안 투덜댔다.
하지만 그들은 자가용을 타고 빠르게 학생들의 버스를 뒤따랐다.
‘제발. 다윤아. 오지 마라. 귀찮다.’
윤성은 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다윤은 차희와 함께 한강공원에 나타났다.
학생들이 5인 1조 팀을 짜는 동안, 윤성은 몰래 차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넌 여기 왜 있냐? 월급 루팡이냐? 업무 시간에 한강공원을 와?]
휴대폰을 본 차희가 피식 웃더니 윤성을 힐끔거렸다.
[ㅋㅋ나 없으면 누가 다윤이 길 안내해? 그리고 루팡 아니다. 나 오늘 연차♥야.]
[헬조선 직장의 표본이라는 협회가 연차 같은 걸 주냐?]
[그래도 공무원이잖아 ㅎ.ㅎ 법적으로 지정된 연차 안 쓰면 문제 생긴다고 강제로 다 쓰래. 연말이니까 해 넘어가기 전에. 근데 업무 밀리니까 대신 다른 날 야근해야 한대ㅜㅜ]
[미친놈들이네 진짜.]
[담에 마스크 쓰고 복지부서 와서 김시윤한테 그렇게 얘기 좀 해주라]
[생각해 볼게;]
[근데 다윤이 남자친구 있어?ㅋㅋㅋㅋ]
[왜?]
[다윤이 화장했엌ㅋㅋㅋㅋ 나한테 도와달래서 내가 해줬어ㅋㅋㅋ.]
[ㅁㅊ. 넌 왜 그걸 도와주고 그러냐.]
[잘 보여야 하는 애 있다는데 어떡해 ㅋㅋㅋㅋ. 아 진짜 귀엽다 풋풋해 얼마 전에 영화 보고 저녁에 손도 잡았대♥ 꺅.]
손도 잡았다고!
신차민 이 새끼가?
[내가 참관인 자격으로 여기서 한 명 탈락시켜도 합법 아니냐?]
[ㅋㅋㅋㅋㅋㅋ 왜 그래. 다윤이가 연애 좀 할 수도 있지. 못됐어.]
[그래 연애는 걔 자유지. 근데 그래도…… 좀 똑똑하고 잘생긴 애를 만났으면 좋겠다]
‘던전에 삼각대 들고 가는 멍청이 말고.’
윤성은 신차민을 흘깃 쏘아보았다.
학생들은 모두 팀을 짰다.
혼자 고군분투하던 백마중이 학생들의 순번을 정해주고 있었다.
김인식과 신차민은 다른 조였다. 김인식은 신차민과 같이 팀을 짜고 싶어 했지만 신차민은 엘리트들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했다.
C급 이하로 판정될 평범한 헌터들의 시험 점수를 높여주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냥 김인식이 맘에 안 들어서.
학생들은 총 42개 조. 여섯 명이 들어간 조가 몇 개 있다.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샤프 스네일을 제거하는 조가 우승이다. 걸리는 시간과 학생들의 부상 정도를 토대로 점수가 매겨진다.
시험을 감독하는 A급 헌터들이 총 열 명이기 때문에 열 개 조씩 총 네 차례 시험을 보게 되었다. 윤성과 백마중이 한 조씩 맡아주고.
“차민아 힘내!”
다윤이가 응원하는 소리.
‘아르동이랑 목숨 걸고 싸울 때도 저런 말 안 하더니. 가만 냅 둬도 알아서 죽을 것 같은 E급 마수 하나 잡는다고 저 난리를 치네.’
윤성은 어쩐지 신차민이 더욱 얄미워졌다.
하지만 신차민은 과연 수재다. 그가 들어간 팀의 구성원들은 전부 하급 헌터가 될 운명을 갖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애들이었지만.
“1분 19.4초.”
기록을 잰 A급 헌터가 혀를 내둘렀다.
엘리트로만 다섯이 모인 김인식의 팀보다 겨우 7초 정도 떨어진 값이다.
게다가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신차민은 타고난 리더였다. 그는 학생들의 거리와 타이밍을 정확히 지시하면서 멋지게 팀을 진두지휘했다.
“야! 지금 찔러! 그렇지! 캬아. 지렸슴다. 오지고요 지리고요 레이드 스케일이 스네일이고요.”
딱 하나 걸리는 건 요상스러운 말투뿐이다.
신차민은 자신의 팀의 기록에 매우 만족했지만 김인식은 아니다.
1분 12.85초.
정확히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동일한 점수가 다른 팀에도 있다.
하지만 준비된 디버프 스네일들은 이미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에 재시험을 치를 수는 없다.
두 팀 모두 다친 학생이 없어서 점수를 가려낼 다른 방법도 없다.
“어쩌면 좋을까요?”
백마중이 윤성에게 물었다.
맘 같아선 그냥 ‘김인식 실격.’ 해버리고 싶지만.
“둘 다 우승 주면 안 되나요?”
윤성이 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겐 안 됩니다. 상황 대응을 테스트할 다른 시험을 봐야 할 것 같은데.”
“대표님!”
김인식이 이쪽으로 달려와서 백마중을 불렀다. 그는 마스크맨을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꾸뻑 숙였다.
“저희 팀이 샤프 스네일 던전을 닫겠습니다.”
“뭐라고?”
“안 돼. 그건 위험해.”
윤성이 딱 잘랐다. 하지만 김인식은 완고했다.
“어차피 던전 클리어되기 직전이잖아요. 샤프 스네일들이 흩어질까 봐 남겨둔 거잖아요. 던전 게이트 근처에 이놈들을 묶어놓으려고. 이미 던전 보스도 목숨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백마중이 혀를 찼다.
“그래도 비각성 학생들한테 던전 보스를 잡으라고 하는 건 좀. 아무리 치명상에 디버프에 가만히 둬도 자연사할 것 같은 E급이라고 해도 그래도 한 던전의 두목이야.”
백마중과 김인식이 대화하는 동안 윤성은 차희와 다윤을 살펴보았다. 그쪽으로 신차민이 다가가고 있었다.
다윤은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귀 뒤로 넘기더니 신차민에게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어깨를 토닥여주고, 신차민은 물을 마시고. 땀에 젖은 목젖이 꿀떡거리는 걸 쳐다보며 다윤은 얼굴을 붉히고.
‘아주 그냥 청춘 멜로를 하나 찍네 이것들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마중이 윤성에게 물었다.
“좀 열받네요.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저런 놈팽이가…….”
“네?”
“아뇨.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김인식 학생 팀이 샤프 스네일 보스를 잡겠대요.”
신차민이 다윤을 살짝 포옹했다.
“아나 저 새끼가.”
당황한 백마중과 김인식을 뒤로하고 윤성은 신차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학생. 아직 시험 안 끝났는데 여자친구랑 놀믄 은 드즤.”
말끝으로 갈수록 이를 악물게 되었다.
마스크맨의 말에 신차민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다윤에게 말했다.
“나 시험 마치고 올게!”
“힘내! 시험 끝난 기념으로 같이 저녁 먹자. 내가 사줄게. 나 오빠한테 용돈 받았거든.”
그래 다 퍼다 줘라.
윤성은 속으로 툴툴대며 백마중 곁으로 돌아갔다.
“김인식 팀이 던전을 닫기로 했습니다. 성공하면 우승을 주고요.”
백마중이 말했다.
“동점 나왔다던 다른 팀은요?”
“보스 레이드를 포기했어요. 2등도 만족한다면서.”
백마중의 말대로 김인식 팀은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다섯 명 모두가 아니라 네 명만 있었다.
팀에서 가장 떨어지던 학생 하나가 자진해서 빠진 것이다.
그 자리에는 A급 헌터가 컨트롤러로 참가했다.
E급 던전에 A급 헌터라면 사고가 날 일은 없겠지.
에어포스가 탈 예정이었던 항공기 DH-431B는 S급 마정석을 가공한 엔진을 사용하여 마하 3의 속도로 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 중 하나다.
에어포스는 스킬 비행을 최고 위력으로 발휘할 때 DH-431B보다 약간 우세한 속력에 도달한다.
서울에서 피렌체까지는 DH-431B로 약 네 시간 반.
선유도 공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동안, 에어포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호텔 몬테벨로 내부 VIP 카페에 들어섰다.
SS급 헌터, 안토니오 디 나탈레.
고유스킬 ‘폭파’를 가진 세계 최강의 헌터 중 하나다.
그는 거만하게 두 다리를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음료를 마시며 종업원을 희롱하고 있었다.
풍문으로 떠도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인 안토니오는 만나는 여자마다 집적거리는 헌터계의 전설적인 카사노바였다.
“아가씨, 이 와인보다 당신의 목소리가 더 달콤하군요.”
“네?”
당황한 종업원이 웃음을 지었다.
“내 미팅 상대가 늦어져서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제게 이 와인이 몇 년산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 이건 21년산 발렌타인이에요.”
“하하. 와인인 줄 알았는데 위스키였군. 사실 술을 잘 모르거든요.”
“하하…….”
“하지만 여자는 잘 알죠. 당신은 어떤가요?”
“네?”
“몇 년산이죠? 이름은요?”
종업원이 황당해 우물쭈물하자 안토니오는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저는 며칠 전에 바티칸의 세인트 베드로 대성당에 다녀왔답니다. 이제 보니 당신의 목소리는 나비첼라 그림 옆에 세워진 종탑에서 숙성된 모양이군요?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 베드로의 유물처럼 아름답군요.”
“아하하…….”
“입구 회랑에 있는 포르타 싼타라는 청동 문은 교황만이 열고 닫을 수 있었답니다.”
안토니오는 종업원의 손을 살짝 그러쥐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의 문은 대체 누가 열 수 있을까요? 나는 수없이 많은 던전 게이트를 닫아왔지만 당신을 향해 활짝 열려 버린 내 마음의 문이 무엇보다 위험하군요.”
안토니오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것을 닫아버리지도 못하고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안토니오 님, 에어포스 헌터님이 오셨습니다.”
안토니오의 수행차 따라온 A급 헌터가 말했고 안토니오의 희롱은 중단되었다.
그는 종업원을 살짝 포옹하고는 보내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에어포스가 인사하며 그의 비서인 D급 헌터와 함께 들어왔다.
그녀는 정확한 시간에 피렌체에 도착했지만 정상적인 루트로 들어온 게 아니다 보니 입국 허가를 받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던 것이다.
에어포스는 조심스레 안토니오의 표정을 살폈다.
세계 최강의 헌터 중 하나다. 먼저 미팅을 요청해 놓고, 게다가 일산의 S급 던전을 정리하기 위해 힘을 빌리려는 입장인데 지각해 버렸다.
일이 틀어지는 건 아닐까? 화가 났으면 어쩌지?
하지만 에어포스가 들어서자.
“오~ 나의 세뇨리따!”
안토니오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