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레벨업 속도는 9.8m/s^2 083화
평범한 데스크톱의 열 배 정도 되는 거대한 기계들 약 2,800개 정도가 줄지어 있었다.
“엄청나다…….”
윤성이 혀를 내둘렀다.
“지금부터 정보를 탐색해 보겠다.”
아톰은 슈퍼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삑!
<엑세스 거부.>
<권한이 없습니다. 에러 코드 71114>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비켜봐.”
윤성은 인벤토리에서 T505를 꺼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T505를 보고 아톰이 화들짝 놀랐다.
윤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빛의 탄환을 손가락 끝에 장착했다. 거기서 새어 나오는 열기로 T505의 어깨만 녹였다.
품번 코드가 적혀 있는 곳이었다.
“이놈으로 액세스해 봐.”
아톰은 T505의 어깨를 리더기에 가져다 댔다.
삑!
<액세스. 메인 시스템 접근.>
슈퍼컴퓨터가 작동했다.
“적의 침입 탐지……. 경고. 적의 침입…….”
약간 녹은 T505에서 로봇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급속 냉각 발동!>
윤성은 그를 다시 한번 얼려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잠깐 둘러보고 올게.”
‘다윤이 선물로 노트북만 사줄 게 아니라 데스크톱도 하나 줘야겠다. 여기서 한 대 장만해야지.’
윤성은 슈퍼컴퓨터의 데스크톱 중에서 가장 사이즈가 작아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마땅한 게 없군.”
일제히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균일한 규격이다. 이 크기의 데스크톱이 들어가면 동생들 방을 절반은 차지해버릴 거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윤성은 다시 슈퍼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정보 수집은 끝났다.”
아톰이 말했다.
“레지스탕스는 찾았냐?”
“정보처리 제어소에 레지스탕스의 정확한 위치가 있었다면 이미 마더가 그곳을 공격했을 거야. 당연히 수집된 주변 정보뿐이지. 하지만 단서는 몇 개 있다. 레지스탕스의 옛날 아지트라거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
“그렇군. 수고했어. 이제 어떡할 거야?”
“난 옛날 아지트를 찾아가 볼 거야. 다른 단서를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썩 내키지는 않는 제안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뭐가 위험해?”
“옛 아지트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것은 마더도 원하는 일 아니겠어? 마더의 병사들이 그곳을 뒤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렇긴 하지.”
그래도 옛 아지트에 간다고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레지스탕스가 그렇게 허술했다면 이미 망했겠지.
아무래도 이건 아리와 의논해 보는 게 좋겠군.
“혹시 데이터 백업 있냐?”
“사본은 있지만 외부 저장장치가 없다. USB 같은 것 있으면 백업해 줄 수 있어.”
“음.”
윤성은 고민하다가 다시 T505를 꺼냈다.
“이놈 머리에 넣어줘.”
T505의 머리를 녹이면서 윤성이 말했다.
***
약 한 시간 후, T505의 머리에 모든 데이터를 백업한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사용했다.
부우웅!
포탈을 타고 이동한 곳은 윤성의 방 안.
침대의 쿠션감이 엉덩이 아래에 느껴졌다.
처음 메탈로이드 제국으로 이동하기 전의 위치와 동일했다.
“뭐야? 어디 멀리 갈 것처럼 얘기하더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다윤이가 윤성을 보고 황당한 듯 말했다.
오빠가 사라진 지 불과 10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
“벌써 갔다 온 거야? 아니면 이제 나가는 거야? 방에 없었는데 아까는. 그래서 간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어. 순간이동석 충전하려면 오래 걸리는데. 하지만 레지스탕스 찾아서 더 헤매기 전에 아리랑 얘기를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레지스탕스?”
“그런 게 있어. 아리는?”
“설거지해.”
그 괴상하고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리.
그 장면은 꽤 가관이었다.
로랜드 고릴라와 팔씨름을 해도 이길 것 같은 거대한 채피의 두 팔로 그릇을 달그락달그락 씻는 꼴이란.
“아리.”
윤성이 부르자,
“네, 주인님. 찾으셨습니까?”
아리가 고개를 돌리고 반갑다는 표시로 눈에서 빛을 반짝거렸다.
“너를 개조할 물건들을 가져왔다. 네가 개조해야 하는 것들도 있고. 따라와.”
“감사합니다, 주인님.”
윤성은 아리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꺼내놓은 것은 살아 있는 T505.
그것을 발견한 아리가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이걸 가져오신 겁니까?”
“얼려서 요술 주머니에 넣어왔다.”
“역시 주인님이시군요. 대단합니다.”
“이놈 부품으로 널 개조해. 일단 죽여야겠지? 어딜 건드리면 가장 부품 훼손 없이 죽일 수 있는지 알려줘.”
“이놈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T505가 당황한 듯 말했다.
<급속 냉각 발동!>
한 번 더 얼리고,
“어딜 부숴버릴까?”
윤성의 물음에 아리는 T505의 가슴 부위를 가리켰다. 윤성은 아리의 지시에 따라 종단 속도의 단검으로 T505의 가슴 위 덮개와 내부 철판 껍질을 세심하게 열었다.
위이이이잉!
T505가 격심하게 엔진을 가동했다. 이젠 동력 신경이 손상되든 말든 상관없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급속 냉각 발동!>
T505의 가슴에 생긴 상처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윤성은 엔진에까지 스킬을 써버렸다.
마력으로 돌아가는 엔진은 얼어붙진 않았으나 그 에너지 전달 효율이 극심히 떨어져 버렸다.
“주인님, 마치 외과 수술을 하시는 것 같군요.”
다시 종단 속도의 단검을 들고 칼질을 계속하자, 아리가 감탄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게.”
“석션 준비할까요, 닥터?”
“뭐?”
“조크입니다. 엔진 뒤편에 있는 접속 단자를 끊으시면 됩니다.”
윤성은 아리의 말대로 T505의 엔진 뒤편에 연결된 파란색 두꺼운 케이블을 잘랐다.
부우웅 소리와 함께 T505의 두 눈에서 불이 꺼지고 몸을 순환하던 전력과 마력이 차단되었다.
T505는 마지막 순간까지 얼어있는 몸 곳곳을 녹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 차례군요.”
아리가 말했다. 로봇의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긴 쉽지 않은데 어쩐지 즐거운 듯한 느낌이다.
“교체하는 김에 T505 이놈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 좀 확인해 봐. 거기에 메탈로이드계의 레지스탕스 관련 정보가 있거든. 그걸 좀 이용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 끝나면 이것도 좀 해줘.”
“무엇인가요?”
윤성은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기계 두 개를 꺼냈다.
“슈, 슈퍼컴퓨터의 데스크톱?”
아리가 당황한 듯 말했다.
“로봇이 말을 더듬기도 하냐?”
“어땠습니까, 제 리액션?”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이걸 내 동생들이 쓸 수 있을 정도로 개조해줘. 부품들 적당히 뜯어내고 사이즈만 축소시키면 돼. 성능도 좀 하락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시중에 있는 컴퓨터보단 좋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 부품이면 기상청에 있는 슈퍼컴퓨터 수준의 데스크톱도 만들 수 있습니다. 주인님.”
“좋았어.”
아리에게 일을 맡기고 거실로 나온 윤성.
다윤이 그를 불렀다.
“오빠, 낮에 어떤 여자가 오빠 찾았어.”
“여자? 차희?”
“아니. 외국인 같았는데.”
에어포스인가?
“백발이야? 얼굴 하얗고?”
“아니. 얼굴 새하얀 건 맞는데 머리는 검고 갸름하고 인형 같이 생겼는데 유럽 같은데 좀 동쪽이나 남유럽 있잖아. 헝가리나 루마니아 이런 곳. 아, 그리고 눈동자 빨갛더라.”
그런 여자가 머릿속에 없어서 한참 고민하던 윤성은 무언가를 떠올리곤 헉 숨을 들이마셨다.
바토리!
아니, 우리 집 위치는 어떻게 알았지?
“뭐라던데?”
“오빠 없다고 하니까 다음에 다시 오겠다면서 갔어. 연락처라도 남겨달라니까 뭐라고 이상한 소릴 하던데.”
“이상한 소리?”
“하등한 전자 기기가 어쩌고 하면서. 좀 정신 나간 사람 같아. 오빠, 여자 만날 거면 차희 언니 만나. 그런 사람 말고.”
“……으응.”
바토리가 윤성을 찾아왔다면 당연히 마법책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 용무가 아니면 윤성을 만나려 할 일이 없으니까.
통역 마법을 랜딩 스킬로 먹었으니 사실 마법책은 필요 없는데.
방으로 돌아온 윤성은 휴대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에어포스(6)]
부재중 통화가 여섯 통이나 와 있었던 것이다.
윤성은 에어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에어포스입니다.”
“에어포스? 저 마스크맨인데요.”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전화 주셨더라고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헌터 협회에서 기수 각성을 합니다.”
기수 각성.
헌터 스쿨의 3학년들의 체력, 마력 감응도, 상황 대응 능력, 인·적성 검사 등을 거친 후 마력을 주입하여 각성시키는 일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들이 수능을 치는 것과 비슷한 빅 이벤트다.
수능보다 몇 주 빠르지만.
신차민 그 꼬맹이도 이번에 시험을 보겠군.
아마 김성인 대표 아들내미도.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근데 기수 각성을 하는데 저한텐 어쩐 일로?”
“아시겠지만 기수 각성은 상급 헌터들이 참관해야 합니다. A급이 최소 열 명, S급 이상이 두 명 필요하죠. 원래는 백마중 대표와 제가 맡을 예정이었습니다만.”
“다만?”
“최근에 협회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나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마스크맨에게 곧 말씀을 드릴 예정이지만 자세한 것은 다음에 알려드릴게요. 오늘 전화 드린 까닭은, 저 대신 기수 각성 참관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네에?”
“고제하 협회장님은 협회장 자격으로 참관하십니다. 백마중 대표님도요. 하지만 제가 이탈리아에 가야 합니다. SS급 안토니오 디 나탈레를 급히 만날 일이 생겼거든요.”
“다른 S급들이 있잖아요?”
“최수혁 헌터님은 요즘 길드 창설 문제로 굉장히 바빠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김성인 헌터님과 차예빈 헌터님이 있잖아요?”
“두 분 다 세인트 길드 소속입니다. 그리고 김성인 대표님의 아드님이 이번에 시험을 보시죠. S급 헌터의 직계 자손이 시험을 볼 때는 그 S급 헌터는 참관이 불가능합니다. 차예빈 헌터님 역시 김성인 대표님의 오른팔이라는 이유로 안 되시고요. 그래서 마스크맨에게 전화를 드린 겁니다. 당신뿐이에요.”
“하지만 전 S급이 아닌데요?”
“감히 누가 마스크맨에게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에이, 그래도 제가 어떻게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대신 마스크맨이 원하는 게 있으면 저도 들어드리죠.”
“그럼 한 가지만 알아봐 주실래요?”
“무엇이죠?”
“인사과에 A급 헌터 황동수나 C급 헌터 차태식이 올린 보고. 또는 이집트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 서류 같은 것. 혹시 있는지.”
아무래도 아직까지 협회나 경찰에서 소환하지 않는 게 너무 이상했다.
이런 질문 자체가 마스크맨이 윤성이라는 사실을 에어포스에게 알려주는 셈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에어포스는 이미 윤성의 정체를 캐려면 충분히 캘 수 있는 인물이니 알아채도 상관없다.
“알아보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괜찮아요. 대신 저 참관할 때 마스크 쓰고 가도 되죠?”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