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레벨업 속도는 9.8m/s^2 078화
윤성은 아리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유나와 차희, 황숙미는 이미 비상계단으로 내려온 후였다. 그들은 윤성과 바깥에서 합류했다.
“어떻게 됐어?”
“살려줬지, 뭘 어째.”
차희의 물음에 윤성이 답했다.
“어, 어떻게……. 마스크맨을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황숙미가 놀랍다는 얼굴로 차희에게 물었다.
“뭐, 저도 협회에서 일하고 있으니까요. 여차저차 몇 다리 건너면 연락할 수 있죠.”
차희가 둘러댔다.
윤성 일행은 모두 유나의 보호소, 행복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리는 죽었다.
그 용감한 꼬마 로봇은 김휘철의 공격을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윤성과 차희, 황숙미는 유나와 함께 아리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들은 뒷산에 올라가서 땅을 파고 그곳에 아리를 묻었다.
이별이라는 걸 처음 겪어본 유나는 세상 서럽게 울었다.
“아리랑 많이 친했니?”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의 집에서 아리를 처음 만난 날. 유나는 그게 요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이고 말도 했기 때문에.
아리와 함께 놀러 나가면 아리는 항상 유나가 다치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
‘정말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애가 마수랑 친구가 되다니.’
윤성은 황당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도 유나는 이제 인간 친구를 사귀어야지.
학교에 돌아가면 망할 애새끼들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유나에게 씌워진 선입견들이 이렇게 간단히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잘 헤쳐나가고 꿋꿋이 버텨내길 바랐다.
“유나.”
행복의 집에서 맏이 노릇을 하는 중학교 1학년 송수빈이 산을 올라왔다.
그녀의 손에 작은 인형이 안겨 있었다.
“아리는 아니지만, 내가 아끼는 인형이야. 너한테 줄게.”
송수빈이 유나에게 인형을 안겨주었다.
행복의 집 안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유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인형을 받았다.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샘솟았다.
“근데 넌 왜 우냐.”
윤성이 황당한 듯 차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슬프잖아.”
차희가 눈물을 찍어냈다.
곧, 황숙미는 차희, 유나, 송수빈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윤성은 볼일이 좀 있다며 남았다.
그들이 모두 떠난 후에 비로소 윤성은 마스크를 벗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휴. 좀 살겠군.”
마스크 쓰면 항상 갑갑한 게 젤 문제다.
“야, 로봇.”
윤성이 땅을 발로 쿡쿡 밟았다.
“나와.”
윤성이 말하자 아래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아리는 혼자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윤성이 땅을 파주어야 했다.
디스트로이어를 쓰러뜨린 후, 윤성은 아리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윤성에게 디스트로이어의 엔진과 배터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윤성은 디스트로이어의 마정석을 챙길 때 엔진과 배터리를 뽑아서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이 영악한 꼬마 로봇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체 너 정체가 뭐냐.”
땅에서 나온 아리의 발치에 디스트로이어의 엔진과 배터리를 두면서 윤성이 물었다.
“잠, 깐, 만, 요.”
아리는 떨리는 양손으로 디스트로이어의 부품들에서 나사와 볼트 따위를 분해하더니, 자신의 몸에서 낡은 부품들을 제거하고 하나씩 교체했다.
엔진은 아리의 부서진 D급 마정석 엔진 대신 갈아 끼웠고, 배터리는 외장메모리처럼 등 아래에 하나를 더 끼웠다.
“좀 살겠군요.”
“너 뭐냐고.”
윤성이 재차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메탈로이드계의 T504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T504?”
“그렇습니다. 주인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리가 고개를 꾸뻑 숙이며 인사했다.
“누가 네 주인이야.”
“그 강력한 힘! 저는 반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디스트로이어로부터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참나. 네 원래 이름이 T504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무슨 뜻이지? 누가 지어준 거야?”
“우리의 메인 시스템인 마더께선 전투 로봇들에게 높은 인공지능을 부여해서 새로운 전사를 생산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셨습니다.”
“마더?”
“메탈로이드계를 지배하는 보스입니다. 주인님의 세계의 언어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아리가 말했다.
“SSS급 마수라고 하는 게 가장 적당하겠죠.”
“SSS?”
윤성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인간이 지배하는 현대 지구 차원에는 트리플 S가 없습니다.”
아리가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지구들에는 트리플 S급 존재들이 꽤 있죠. 마계의 마왕. 엘리지아 차원의 퀸. 그리고 메탈로이드 차원의 마더.”
“설마 너네도 여기 침공하러 온 거냐?”
“그럴 목적으로 마더께선 인공지능을 가진 전투 로봇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그거라며?”
“네.”
“그럼 내가 널 죽이면 되는 건가?”
“아닙니다!”
아리가 황급히 부정했다.
“T504는 실패했습니다. 너무 자아가 강했거든요. 마더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체들이 되었습니다. 마더는 모든 T504를 전량 폐기했지만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았죠.”
“흠.”
“수호자가 차원문을 열었기 때문에 저는 지구 차원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버려진 로봇 장난감을 연기하다가 고물상에 팔려가고 여기저기 떠돌다 유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럼 마더란 놈은 다른 로봇을 만드는 중인가?”
“그렇습니다. 디스트로이어도 그중 하납니다. T601. 제 후배격인 로봇이죠.”
“하지만 너보다 훨씬 강하던데.”
“T504는 마더와 동일한 수준의 인공지능을 불어넣은 실험적인 제작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약하게 디자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아리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 끝에서 새빨간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디스트로이어가 쓰던 파괴광선.
“우리는 부품 교체와 엔진 흡수를 통해서 다른 로봇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원래 마더는 T504의 효율이 좋으면 곧바로 부품만 바꿔서 지구에 투입시킬 생각이었으니까요.”
“흠.”
“저는 가능한 지구에 숨어서 얌전히 살고 싶습니다. 혹시 저를 지켜줄 생각이 있으신지.”
나쁜 놈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마수.
“내가 널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하나만 줘 봐.”
그러자 아리는 자신의 가슴을 열더니 안쪽 깊숙한 곳에서 조그만 리모컨을 꺼냈다.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
그 끝에는 빨간색 버튼 하나가 붙어있다.
“제 작동을 조절하는 리모컨입니다. 그걸 누르면 저는 작동 중지 상태가 됩니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 조그만 놈이 유나를 위해서 김휘철과 싸우려던 게 자꾸 떠오른다.
“혹시 마더가 있는 메탈로이드 차원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순간이동석을 드리겠습니다. 충전도 다 되어있습니다.”
아리가 다시 가슴을 열고 그 안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생각지도 않게 순간이동석이 세 개나 되어버렸군.
윤성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살펴보았다.
-랜더의 코트
-랜더의 전투화
-종단 속도의 단검
-순간이동석(탑)
-순간이동석(마계)
-순간이동석(메탈로이드)
뭐, 나쁘지는 않네.
“넌 그럼 어디서 지낼 거냐?”
“주인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주인님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뭐라는 거야? 왜 나야?”
“저는 쫓기는 몸입니다. 하지만 설마 마수가 헌터의 집 안에 있으리라고는 마더도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주인님은 매우 매우 강력한 헌터입니다. 저를 지켜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너한테만 좋은 거고. 내가 너랑 왜 같이 지내냐고.”
“저는 청소와 빨래와 식사 준비에 능숙합니다. 저를 써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전투도 꽤 합니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엔 헌터와 전혀 무관한 일반인 애가 둘이나 있다. 내 동생들이지.”
“저는 애 보기도 잘합니다.”
“그 정도로 어린 애들은 아냐. 하지만 너 쫓기는 몸이라며? 집에 뒀다가 사고 나면 어떡해?”
“위치 신호가 꺼져 있고, 지금은 엔진과 배터리까지 갈았기 때문에 마더도 저를 추적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이 거대한 지구에서 발로 뛰어서 절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헌터의 집 안이라면요.”
“디스트로이어가 널 봤으니까 지구를 통째로 조사할 필요는 없지. 한국만 뒤지면 되니까.”
“디스트로이어의 메모리는 배터리와 일체형입니다. 아까 제가 정보를 확인해보았는데 마더에게 전송된 분량은 한국에 오기 전 부분이었습니다. 그 후에 제 위치 신호를 잡고 한국으로 왔죠.”
“전송된 정보가 왜 그렇게 적지?”
“와이파이가 안 터져서…….”
“뭐?”
“조크입니다. 한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 그 디스트로이어는 웜홀을 통과했는데 그러면 마력 파장 간섭이 일어나서 정보 전달이 불가능해집니다. 한국에 온 후에는 거의 바로 전투가 벌어져서 전송에 배터리를 쓰지 않은 모양이고요.”
아리가 설명했다.
“따라서 마더는 지구에서 절 찾으려고 한다면 뉴욕부터 뒤질 테고, 한국에 오려면 한참 걸립니다. 절 찾아낼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죠.”
“하지만 그 벼락의 가능성을 굳이 우리 집에 데려갈 필요가 있냐?”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1년 내에 메탈로이드가 지구를 침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 그들의 마력 파장을 읽을 수 있으니 던전이 열릴 조짐이 보이면 바로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함께 있는 편이 오히려 더 안전하죠.”
“흐음.”
약팔이한테 당하는 기분인데.
이놈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기는 좀 찝찝하다. 혼자 산다면 또 몰라, 동생들하고 같이 두기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넌 마수잖아. 네가 내 동생들을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제 프로그램을 재설정하십시오.”
“뭐?”
아리가 눈을 번쩍이더니 눈앞에 거대한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랜딩 메시지창과 비슷하다.
-T504_A_302788
주인 : 강윤성
상태 : 너무 강한 엔진. 너무 강한 배터리. 왼팔 손상. 윤활액 부족. 오른쪽 라이트 접촉 불량.
능력치 보기
능력치 보기 버튼을 누르자,
<힘 : 87, 순발력 : 105, 감각 능력 : 421, 지능 : 275>
<스킬 : 파괴 광선>
메시지창 둘이 떠올랐다.
“이걸 뭐 어쩌라고? 재설정을 어떻게 하는데?”
“주인 버튼을 누르시면 인물을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윤성이 주인 버튼을 누르자 그 위에 윤성이 아는 모든 인물이 떠올랐다. 수없이 쏟아지는 메시지창 폭탄에 윤성이 당황하자 아리가 말했다.
“동생분들의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
“강다윤. 강소윤.”
윤성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모든 메시지창이 지워지고 둘만 남았다.
다윤과 소윤의 간단한 프로필.
윤성은 두 사람의 프로필 홀로그램을 손가락으로 눌렀고, 아리의 상태창이 수정되었다.
-주인 : 강윤성, 강다윤, 강소윤
“이거 재밌군.”
“저는 주인으로 설정된 이에게는 대들 수 없고 명령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자살하라는 명령조차도요.”
“근데 이상하잖아? 이렇게 훌륭한 시스템이 있다면 마더가 왜 너희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지? 주인을 마더로 두면 될 텐데.”
“그게 마더의 실수였습니다. 자신을 주인으로 두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자아를 가진 전투 로봇을 창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T504의 반란이었고 결국 모두 폐기되었던 것이죠.”
“그럼 네가 더 강력한 로봇의 부품을 가지면 더 강해질 수 있나?”
“그럼요. 지금은 엔진과 배터리는 A급이고 나머지는 모두 D급이라서 디스트로이어 같은 전투력을 발휘 못 하겠지만 부품 전체를 갈면 가능합니다.”
“디스트로이어의 사체를 가져올 걸 그랬군.”
“하지만 너무 거대했으니 주인님께서 옮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엔진과 배터리만 챙겨달라고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그래. 지금은 협회에서 사체를 수거해갔을 거야.”
“그걸 찾아올 수는 없습니까?”
“마스크맨의 정체를 밝힌다면 가능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군. 일단 내가 널 데려가겠어. 함께 가자.”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성은 아리를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왔다.
앞으로 써먹을 여지가 굉장히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