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레벨업 속도는 9.8m/s^2 076화
차희는 다시 한번 분노를 느꼈지만 꾹 억눌렀다.
조금만 참자. 빨리 와, 강윤성!
“잘할 수 있어.”
그녀는 유나의 뺨을 양손으로 꼭 감싸고 이마에 키스했다.
“끝나고 엄마랑 같이 인사하는 거 어떡해요?”
“언니가 올라갈 거야.”
차희가 처음에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도록 했기 때문에 그녀의 호칭은 계속 언니였다. 차희는 유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한 명 올라갈 거야. 유나, 보면 깜짝 놀랄걸?”
“누구요?”
“그런 사람이 있어. 다들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야. 그리고 유나도 연습 오래 해서 라인 댄스 잘 하니까 걱정하지 마.”
차희가 유나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황숙미도 옆에서 거들었다.
“전에 엄마한테 보여준 거 있지? 그렇게만 하면 돼. 그보다 못해도 상관없어. 엄마는 잘하든 못하든 유나가 자랑스러워.”
“유나는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무대에서 숨만 쉬어도 다들 박수를 쳐줄 거야. 겁먹지 마.”
두 사람은 유나를 다독여 무대로 보냈다.
“근데 그 다른 인물이라는 거 누구에요?”
황숙미가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선생님도 보시면 놀랄 거예요. 잠깐만요.”
차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대 뒤의 학부모석으로 이동했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윤성을 찾고 있었다.
입구 근처의 암막 커튼 옆, 소품 창고.
“헉.”
차희가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 마스크맨?”
마스크맨이 있었다. 그것도 다섯 명이나!
“아, 하하하. 아닙니다.”
마스크맨 중 하나가 말했다.
“저는 1학년 5반 박빈수 아빠예요.”
“저는 김예림 아빠요.”
“네에?”
차희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요즘 마스크맨이 인기고 하니까. 마스크맨으로 컨셉을 잡아봤어요. 애들 놀래켜주려고.”
“저희 셋이 그렇게 짜고 왔는데, 와보니까 마스크맨이 둘 더 있더라고요.”
“하하하!”
아빠 다섯이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좀 있으면…… 한 명 더 오는데. 그것도 진짜가.
“어머!”
뒤에서 나타난 성재희가 호들갑을 떨며 마스크맨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너무 잘 어울린다. 역시 오빠는 진짜 헌터라서 태가 다르구나!”
차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와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 어디야?
윤성에게 보내는 메시지.
“여기.”
입구의 문이 철컥 열리며 윤성이 들어왔다.
잘 다져진 몸에 제법 정장핏이 좋았지만 그는 아직 마스크맨으로 변신하진 않은 상태다.
여차하면 인벤토리에서 마스크만 꺼내서 덮어써도 되니까 뭐.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그래도 안 늦었지?”
“응. 이제 곧 시작이야. 근데 큰일 났어.”
“뭐가?”
“마스크맨이 다섯이나 돼.”
차희의 말에 윤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다섯이나 된다고?”
“응.”
“사실 내가 이집트에서 내 도플갱어를 다섯 마리 잡아왔지. 인천 공항에다 풀어놨는데 전부 여기 몰려왔나보군.”
“장난하는 거 아냐. 지금 학부모 중에서 마스크맨 분장하고 온 아버지들이 다섯 명이나 있단 말이야.”
“정말이냐?”
“큰일 났어. 어쩌면 좋지?”
데자뷰가 느껴지는군. 꼭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옛날에 은행에서.
“스킬이라도 좀 쓸까?”
“미쳤어?”
“빛의 탄환 같은 스킬은 천장으로 발사하면 안전할 거야. 강당이 작살나긴 하겠지만.”
“안 돼!”
차희가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가짜들 때문에 진짜의 유니크함이 사라지다니, 이걸 어쩌지?
“많이들 기다리셨죠?”
신입 선생님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암막 커튼이 올라가고 있었다. 무대에는 귀엽게 차려입은 1학년 아이들이 쭉 늘어서 있다.
“다음은, 1학년 어린이들의 라인 댄스가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와아아!”
박수갈채.
“일단 난 자리로 가야겠다.”
차희가 말했다.
“이따가 봐.”
무대에서 춤을 출 때 객석에 차희가 안 보이면 유나가 당황할지도 모른다.
차희는 황급히 객석으로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예쁘게 꾸민 유나는 정말 열심히 라인 댄스를 추었으나, 미안하게도 차희의 머릿속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눈으론 보고 있고, 입은 웃고 있고, 손은 박수치고 있었으나 뇌는 딴 생각을 하는 중이다.
이걸 정말 어떡하지? 유나한테 괜히 기대감만 불어넣어줬잖아.
무대에 올라갈 학부모들은 대부분 엄마들일 테고, 사실상 아빠는 아까 다섯이 거의 전부다. 그럼 무대에 올라가는 남자들은 죄다 마스크맨인 거지같은 전개가 벌어질 텐데.
마스크맨이 여섯이나 올라오면 애들이야 좋아하겠지만, 과연 유나도 좋아할까?
‘차라리 지금에라도 윤성이한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내가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와아아!”
학부모들의 박수와 환호성.
공연이 끝났다.
부모들이 차례로 무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스크맨이 여섯 명 등장했다. 객석 사이를 우르르 지나치는 그들 중 하나가 차희에게 다가왔다.
“누, 누구세요?”
당황한 황숙미를 뒤로하고,
“지금 올라가면 되는 거지?”
윤성이 차희에게 물었다.
차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숙미에게 마스크맨을 불렀다고 설명했다.
“일단 같이 올라가자.”
차희가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윤성을 돌려보내면 그것도 이상하다. 마스크맨 여섯이 등장해서 무대로 올라가다 하나가 집에 가버리면 웃긴 꼴 아니겠는가.
망했네 진짜!
차희는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미안해 유나야!
“마스크맨이다.”
“우와. 마스크맨!”
“여섯 명이나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은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좋아할 뿐.
천만다행히도 유나 역시 아직까지는 괜찮다. 차희가 윤성과 함께 올라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머, 어머. 마스크맨?”
성재희가 차희와 윤성을 보고 말을 걸었다.
“남자친구예요? 우리 남편도 마스크맨인데.”
그녀가 옆에서 무대로 올라가는 마스크맨을 가리켰다. 윤성의 오리지날을 매우 비슷하게 흉내 낸 짭-마스크맨.
짭 마스크맨이 팔에 힘을 불끈 넣어 자신감을 보였다.
윤성은 풋,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윽고 차희와 성재희는 무대에서 내려갔고, 위에는 아이 하나에 학부모 한 명씩만 남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능력이 좋네. 마스크맨 슈트 핏이 은근히 어렵거든. 저기 봐. 우리 남편 말고는 다들 배 나온 아저씨라서 몸매가 안 되잖아?”
“남편 분이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차희가 속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우리 남편은 헌터거든! 진짜 마스크맨처럼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 핏을 소화하는 거지.”
“아, 제 남자친구도 헌터라서.”
“진짜요?”
사실 진짜는 아니다. 헌터라는 부분이 아니라 남자친구라는 부분이. 이것까지 사실이었으면 좋겠지만.
차희는 팔짱을 끼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나 지켜보았다.
윤성은 의외로 유나와 다정하게 대화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가 중학생이었을 때, 유나 나이였던 소윤이를 대하듯 하니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무대에 일렬로 선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회를 맡은 신입 교사가 매우 흥미로워하며 마스크맨 여섯 명과 아이들을 앞으로 끌어냈다.
“아니, 마스크맨들, 다들 누구십니까?”
교사의 질문에 끝에서부터 한 명씩, 짭들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1학년 몇 반, 김땡땡의 아버지 김뚱뚱이라며 소개를 하지만 윤성은,
“저는 유나의 삼촌, 정체불명의 헌터, 마스크맨입니다.”
하고 말했다. 이름을 노출할 순 없으니.
“삼촌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온갖 상급 던전들을 클리어하면서도 비밀을 유지했던 마스크맨의 정체를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오픈할 순 없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진짜 마스크맨이신 건가요?”
교사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역시 마스크맨이시군요.”
“저는 김예림의 아버지 김휘철입니다.”
“네, 예림이 아버님. 그럼 마스크맨은 아니신 거죠?”
“아니요. 제가 마스크맨 맞습니다. 마스크맨이 김휘철인 거죠.”
“하하하.”
교사가 웃자,
“보여드릴까요?”
김휘철이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오른손을 쫙 폈다.
-탁, 타다다닥!
손바닥 위에 라이터를 켠 것처럼 불꽃이 피어올랐다.
헌터였군.
윤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 계열. 한 B급 정도 되겠다. 불꽃 마법을 매우 작은 규모로 세심하게 컨트롤해서 작은 불을 켠 것.
“우와아!”
아이들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
성재희는 연신 차희의 어깨를 두들겼다.
“봤죠? 봤죠? 어머,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차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윤성아 그냥 손가락 마법총 한 방 갈겨버려!’
차희가 윤성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펴고 뒤집는 시늉을 했다.
“대단하군요.”
하지만 윤성은 박수만 쳤다.
대단한 건 사실이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쇼를 할 수 있는 마법이라니. 미니멀라이즈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헌터, 뭐 그런 것. 박수칠 만하다.
“어떻습니까? 진짜도 이런 것 하실 수 있나요?”
교사가 물었다.
“음. 더 큰 건 할 수 있는데, 했다간 강당이 무너질지도 몰라서요.”
“푸하하. 역시 대단하시군요!”
윤성의 대답이 재치 넘치는 위기 모면이라 생각한 교사는 웃음을 터뜨리고 무대를 정리했다.
“우리 예쁜 1학년 어린이들에게 다시 한번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지고, 무대의 사람들이 끝에서부터 우르르 내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잠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방독마스크 안에서 윤성의 미간이 묘하게 구겨졌다.
이곳의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감각 능력이 5,000에 육박한 윤성은 소리의 진원지를 명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아리.
유나가 데려온 로봇이 객석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아리는 다다다 뛰어와서는 무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
“아리야!”
유나가 반가운 표정으로 아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콰악.
윤성이 그녀를 억세게 붙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이 로봇. 마력을 뿜고 있잖아?
이제 보니까 그냥 장난감이 아니다. 어쩌면 이건…….
“마수냐?”
김휘철이 말했다.
“어떻게 마수가 초등학교 학예회에 들어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