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레벨업 속도는 9.8m/s^2 075화
차희가 황당한 듯 묻자, 황숙미는 우물쭈물하며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유나는 보호소에서도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려요. 근데 학교에서는 친구 사귀겠어요? 당연히 왕따죠.”
“따돌림을 당한다고요?”
“처음엔 아니었대요. 근데 애들이 유나랑 얘기하다 보니 자기들보다 한 살 많은 걸 알았고, 집에 가서 그걸 부모들한테 얘기했고, 이상하게 생각한 부모들 중에 헌터 협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 물어서 복지 부서에서 유나가 아동 보호소에서 지낸다는 얘기까지 퍼졌나 봐요.”
“이런.”
차희의 표정이 구겨졌다.
“바보같이. 그걸 왜 비밀 유지를 안 하는 거야. 남의 개인 정보인데! 또 어떤 놈이야 진짜.”
“아무튼 그 때문에 애들이 유나를 놀리나 봐요. 그리고 학부모들도 유나랑 놀지 말라고 한 것 같고.”
“아니 대체 왜요? 애들은 그렇다 치고 어른들은 왜?”
황숙미가 고개를 떨구었다.
“전에는 유나가 향수를 사달라기에 그게 왜 필요하냐니까 자기가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알아보니까 애들 부모들이 애들한테 보호소 애들 냄새나고 병 옮는다는 식으로 가르쳤나 봐요.”
“미친 거 아냐?”
차희가 분개했다.
“조이스 사건 알죠?”
황숙미의 말에 윤성과 차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이스 사건.
엘리지아 던전이 범람한 후 터졌던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다. 일산 지역을 모조리 감염시킨 엘리지아 여왕은 어느 날 어린 여자애를 삼켰다.
그 아이의 이름은 조이스.
필리핀 혼혈아였고 일산에서 부모를 모두 잃었다.
에어포스를 필두로 한 헌터 협회가 일산 일부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조이스를 발견했다.
엘리지아는 막 태어난 유체기 때에는 이성도 폭력성도 없다는 게 정설. 조이스 역시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헌터들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아동 보호소로 보냈다.
조이스한테서는 마력이 느껴졌지만 유체기라서 그 정도가 미약했고 S급 던전의 감염 지역에 있었으니 피폭되었으리라 추측했다. 조이스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 역시 충격에 의한 실어증으로 진단되었다.
시간이 지나 조이스는 영등포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딱 일주일 후에 엘리지아 아성체기에 접어들었다.
협회의 헌터들이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피바다였다. 그 사고로 조이스의 같은 반 아이들 28명 전체와 교사 넷을 포함하여 교내에서 9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엘리지아는 아성체기에만 접어들어도 B급 헌터 수준의 전투력을 갖게 된다. 공격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에게는 치명적이라 93명 중 사망자가 89명이었다.
“하지만 엄청 옛날 일이잖아요.”
윤성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산 감염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엘리지아가 밖으로 나올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들 마음은 혹시나 싶은 거죠.”
“쳇. 애가 무슨 죄야. 게다가 유나는 마력도 안 느껴질 테고 조이스하고 달리 말도 잘 하잖아?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애라고.”
화가 난 차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차희 씨한테 부탁드리는 거예요.”
황숙미가 말했다.
“학예회에 제가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애기 엄마들 다 젊고 예쁠 텐데, 나이 많고 못생긴 50대 아줌마가 가면 유나가 더 창피해할 거예요.”
“말도 안 돼요!”
차희가 소리쳤다.
“하지만 애들은 그런 것에 민감한걸요. 아무리 어려도 말이에요. 아무튼 그래서 차희 씨가 저 대신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제가 갈게요!”
차희가 흔쾌히 승낙했다. 윤성이 황당한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 회사 스케쥴 한 번 보지도 않고, 학예회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저질러도 되는…….”
“당연히 되지! 복지부서에서 사회복지 일을 하는데 뭐 어쩔 거야? 이건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차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황숙미 선생님도 같이 가야 해요! 선생님이 빠진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유나도 창피해하지 않을 거라고요.”
“음.”
황숙미가 고민에 잠겼다.
“저도 유나가 라인 댄스 추는 걸 보고 싶긴 해요. 가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리고 학예회. 후후, 선생님.”
차희가 눈을 빛냈다.
“아주 어마어마한 게스트를 한 명 초대해드릴게요. 유나 기 살려주기 대작전. 기대하세요.”
차희가 양손으로 애교스럽게 황숙미를 쏘며 눈을 찡긋했다.
‘어마어마한 게스트?’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에어포스라도 데려갈 생각인가?
황숙미와 인사하고 차희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길, 윤성은 롤스로이스 차 안에서 차희에게 물었다.
“그 게스트가 누구야?”
“그것은 바로, 두구두구두구두구~.”
차희가 양손으로 조수석 앞을 드럼 치듯 두드렸다.
“마스크맨입니다!”
“켁!”
하마터면 운전대에서 손을 놓을 뻔했다.
“내가 왜?”
“좀 도와주라. 이집트 가서 그 난리 치고 와서 한동안 할 일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내가 학예회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아빠 역할이라도 해달라고? 이 나이에 아빠……. 나 아직 20대 후반인데.”
“그런 건 아니고. 애들도 어차피 유나 부모 없는 거 다 알아. 유나도 그것 자체를 부끄러워하진 않을 테고.”
“그럼?”
“요즘 학예회는 사실 학부모들의 파워 게임이야. 애들 재롱 보면서 같이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심지어 학원 선생님 붙여서 월 10만 원짜리 개인 레슨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갖다놓고 난리를 친다고.”
“미친.”
“그렇게까지 오버하는 이유는 다 자기 애가 학예회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려는 거지. 애 기를 살려주려고. 하지만 생각해 봐. 요즘 인기 절정을 찍는 정체불명의 슈퍼 히어로 같은 헌터가 와서 유나와 친분을 과시하면?”
“너……. 날 그런 식으로…….”
“그랜드 피아노가 뭐야, 마스크맨 등장하는 순간부터 애들 전부 눈 뒤집어질 텐데. 으흐흐흐.”
“너도 지금 눈 뒤집어졌는데.”
얘 눈빛이 맛이 갔다.
뭔가 좀 부당한 게 보인다 싶으면 못 참고 펄쩍펄쩍 뛰는 여자다. 딱 보니 지금 유나 괴롭힌 학부모들 참교육할 생각에 엄청나게 신났군.
‘하지만 일하는 건 나란 말이야!’
윤성이 난처한 듯 선뜻 답하지 못하자, 차희는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졸랐다.
“좀 도와주라! 윤성아. 응? 그리고 네가 나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뭔데?”
“마스크맨이 얼굴 비춰주고 나면, 안전한 아이라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앞으로 안 건드릴 거야.”
“으음.”
“나 그동안 네 동생들 열심히 봐줬어.”
차희가 재차 부탁했다.
“물론 정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좋아.”
윤성이 허락했다. 약간 귀찮긴 하지만 은근히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작전은 이렇다.
유나는 1학년 라인 댄스를 할 거다. 라인 댄스가 끝나면 학부모들이 한 명씩 올라와서 자기 아이를 안아주고, 아이랑 같이 인사하는 코너가 있다.
그때 차희가 마스크맨과 함께 올라가서 유나에게 마스크맨을 넘겨주고 내려온다.
마스크맨이 유나와 같이 인사한 다음, 학부모나 다른 아이들하고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거다.
그걸로 충분하다. 마스크맨을 동경하는 아이들은 이후 유나와 친하게 지내려고 할 거고, 학부모들은 마스크맨의 등장에 안심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선입견을 창피해할 터.
유나는 왕따 탈출이고 모두가 해피한 결말. 담임과는 미리 얘기를 해놓으면 된다.
***
딱히 레이드는 하지 않고 일일 랜딩만 했는데도 날짜가 죽죽 지나갔다.
일주일이 지나서 마일하이클럽 랜딩의 버프가 20일 쯤 남았을 무렵 토요일 오전.
이상하게도 협회에서는 아직까지 윤성에게 재각성 검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황동수의 면상을 아작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소환되지도 않았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잘못한 것 없이 떳떳하고, 재각성 검사도 언제 받든 준비되어 있으니 상관없다.
오히려 37일짜리 4,000점 버프를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재각성 검사는 미룰수록 좋았다.
신경 쓰지 말자. 그보다 오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소윤아 이것 봐.”
윤성이 소윤을 불렀다.
하지만 소윤만이 아니라 다윤도 함께 나타났다.
“뭐야? 어디 가?”
정장을 쫙 빼입은 윤성을 보고 다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츄리닝 차림에 반바지만 입고 생활하던 오빠가 웬일로?
“초등학교 학예회 가는데. 좀 오버냐?”
“초등학교 학예회를 왜?”
“그럴 일이 있어.”
다윤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어디서 사고쳤어……?”
윤성은 재빨리 해명했다.
“아냐. 아니야. 헌터 협회 복지부서에 딸린 아동 보호소에서 생활하는 애야. 복지부서에 있는 친구가 부탁해서 갈 일이 생겨서.”
“으응.”
“아무튼 이상하냐?”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초등학교 학예회 같은 걸 가본 적이 없는데. 아니지, 가본 적은 있겠지. 초딩 때라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하긴. 애들이 이런 걸 어떻게 알아.
게다가 생각해 보니 어차피 마스크맨으로 갈 거라면 아예 마스크맨 전투복을 입고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여차하면 갈아입어야겠군.
윤성은 전투복과 랜더의 코트, 전투화, 종단 속도의 단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집을 나선 윤성은 곧바로 강서구의 초등학교로 향했다.
윤성보다 30분 일찍 학교에 도착한 차희는 황숙미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나한테 몇 번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녀는 별 대꾸가 없었다. 유나는 이번에도 ‘아리’라는 이름의 그 로봇을 꼭 안고 왔는데, 로봇하고만 놀았던 것이다.
이제는 학예회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사람이 꽤 많아졌다.
하지만 마치 차희와 황숙미, 유나 근처에 누가 결계라도 쳐놓은 것처럼 그들 주위만 의자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너무하네.’
차희는 은근히 속상하고 기분도 나빴지만 유나 앞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다.
“유나 보호자분이세요?”
갑자기 한 여자가 차희와 황숙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성재희. 1학년 2반 김예림의 어머니다.
“네. 그래요.”
황숙미와 차희가 답하자,
“젊은 분도? 보호소 직원이세요?”
성재희가 물었다.
“복지부서 민차희라고 합니다.”
차희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가시 돋쳐 있었다.
차희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젊은 엄마는 친절한 눈웃음 속에 고압적인 자세를 깔고 있다.
“어머, 저희 남편도 협회 직원이에요. 오호호.”
성재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 네에.”
“근데 남편이 그러던데 영등포 초등학교가 협회랑 더 가깝다던데, 왜 은평구까지 온 거예요?”
“네?”
“아, 나는 유나가 힘들까봐 그러죠. 영등포 초등학교로 가면 걸어서도 갈 수 있지 않아요? 근데 왜 굳이 강서구까지 왔는지 궁금해서.”
힘들까봐 그러긴 개뿔.
말투는 영등포 초등학교에 보내지 왜 여기로 보냈느냐고 따지는 투다. 차희는 기분이 나빠졌다.
게다가 영등포 초등학교는 조이스 사건이 벌어졌던 그 학교다. 이후 학부모들의 기피 1순위가 되면서 아이들이 가지 않았고, 지금은 가난한 집안 아이들만 가는 폐교 직전의 학교가 되었다.
영등포 초등학교로 왜 안 보냈느냐는 질문은 마치 유나가 조이스가 아니냐고 돌려 묻는 듯한 느낌.
혹은 ‘영등포 초등학교에나 가야 할 그런 애를 감히 우리 집 애랑 같은 학교에 보내?’ 하는 것.
“유나 집은 협회가 아니고 강서구에 있는데요.”
차희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실이다. 아동 보호소는 강서구에 있으니까.
“아 그래요? 내가 그건 몰랐네.”
“이 학교가 가장 가까워서요.”
차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근데 영등포 초등학교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여기서 적응하기도 힘들어하는 것 같던데.”
“네?”
“아니, 우리 애가 그러더라고. 반에 유나라는 친구 있는데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리고 그런다고.”
차희는 황급히 유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 아줌마가 애 듣는 데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미쳤나.
차희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앞으로 잘 어울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1학년 2반 김예림이 쪼르르 걸어왔다. 꼭 인형 같은 애다.
저렇게 예쁜 애의 엄마가 인성이 저 모양이라니.
성재희는 딸을 안아 들고는 차희에게 인사했다.
“나중에 또 봐요.”
“네, 가세요.”
차희는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를 보냈다.
돌아보니 황숙미도 기분이 나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안쓰러워.’
차희는 딱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곧 1학년 라인 댄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를 맡던 신입 교사가 마이크에 대고 발표했다.
“유나야, 네 차례야.”
차희가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못 하겠어요.”
“괜찮아. 잘할 거야.”
황숙미와 차희가 달래주었지만, 풀이 잔뜩 죽은 유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애들 눈치는 어른들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예민하다.
아까 얘기를 들은 게 분명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속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