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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속도는 9.8ms^2-74화 (74/260)

# 74

레벨업 속도는 9.8m/s^2 074화

이어서 파리츠는 무릎을 꿇었다.

놀란 윤성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파리츠가 윤성에게 절을 올렸다.

파리츠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히샴과 아리즈, 아이샤가 차례로 윤성에게 절을 올렸던 것이다.

-찰칵, 찰칵!

-펑!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중동뿐 아니라 전 세계를 울릴 대 특종이다.

세계 헌터 기구가 가장 협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중동의 헌터들. 그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이라크와 사우디, 수단에서 온 S급 헌터들이 그 오만함과 자존심을 누르고 인간에게 절을 올렸다.

그것도 먼 동양의 한국인에게!

곧 자리에서 일어난 파리츠는,

“앞으로도 좋은 비즈니스를 기대합니다.”

윤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성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덩치 좋은 남자 한 명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파리츠의 운전 기사였다.

“가시죠. 왕자님.”

기사의 뒤에 거대한 세단 다섯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파리츠는 레이드팀 전원을 한 명씩 각각 세단에 태웠다. 각 차마다 기사가 있었다.

다행히 가는 길은 좀 편하겠군.

윤성은 뒷좌석 의자를 눕히고는 쿠션에 편안히 기대어 누웠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기자들이 그대로 뒤쫓았다. 심지어는 호텔 방까지 들어오려고 했지만 다행히 로비의 가드들이 막아냈다.

호텔 객실은 강윤성의 프로필로 예약했다.

입 싼 누군가가 있다면 마스크맨의 정체가 드러나겠지만, 그래도 5성급 호텔이다. 그렇게 쉽게 고객의 정보를 누설하진 않겠지.

사실 어찌 되든 이젠 상관없기도 하고.

호텔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었더니 4,000점의 감각 능력을 가진 시력에 무언가가 보였다. 멀리 떨어진 빌딩 옥상에서 망원경 같은 것으로 이쪽을 관찰하는 기자들.

“아오. 여기도 기레기들이.”

커튼을 치려다가 자세히 보니,

“외국인이잖아?”

외신 기자들이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

아무래도 S급 던전을 클리어한 것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다.

그동안은 국제 사회가 이런 곳에 S급 던전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 만큼 중동의 후진국들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부족했다.

그걸 클리어해서 안전해진 지금 이런 관심이 필요한가?

홍해에 하나씩 기어 나온 재포니카들이 선박과 해변의 시민들을 해치던 때에 이처럼 이슈가 되어야 했던 게 아닐까?

강력한 헌터 하나의 탄생이 이 땅에서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큰 화젯거리란 말인가.

윤성은 어쩐지 입안이 쓴 기분이었다.

‘아니지. 잠깐만.’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다.

‘나도 뭐 잘한 거 없잖아?’

전부 다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것들뿐이다. 애초에 알리야에게 납치되기 전에는 테리문의 도움 요청도 거절해 버렸다.

그 문제가 내 것이 되거나, 거기서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서지 않았던 거다.

그런 능력이 있었는데도.

‘이제야 관심을 갖는 외신이나 외국의 최상급 헌터들을 욕할 수 있을까?’

-촤악.

윤성은 커튼을 치고 비로소 방독마스크를 벗었다.

역대급으로 오래 썼군.

숨이 탁 트이는 기분.

윤성은 마스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침대에 뻗었다. 비로소 끔찍한 피로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윤성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일주일간의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왔다.

인천 공항 게이트로 나온 윤성은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차희?”

차희가 윤성을 마중 나온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대를 알려주긴 했지만 마중을 나올 줄이야.

“내 향수 가지러 왔어.”

차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바쁘고 정신없는 원정 중에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 용하고 대견하다.

윤성은 면세점에서 샀던 데카당스 향수를 내밀었다.

마크제이콥스 데카당스.

“꺄악!”

차희가 향수를 들고 폴짝 뛰었다.

“너무 좋아!”

“잘 있었어?”

“응! 그럼. 너 근데 장난 아니더라.”

“뭐가?”

“이거. 짜안~!”

차희가 꺼내든 것은 열쇠고리.

충격적이게도 방독마스크 인형이 달려 있었다.

“아니, 누가 이런 흉측한 걸?”

“한국의 마스크맨이 이집트에서 상급 던전들을 모두 소탕하고 S급 던전까지 클리어 했다고 요즘 매스컴에서 난리도 아니었어.”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다고?”

“원래는 별 관심 없지. 하지만 국뽕에 취하면 난리 나잖아? 한국에 이제 SS급 두 명이다! 이러면서 아주 그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꼬마들이 와르르 지나갔다. 마치 윤성의 인기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가방에 마스크맨 고리를 달았다.

“이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윤성이 중얼거렸다.

마스크맨은 최근 며칠 사이에 한국 헌터계 최고의 스타가 되어버렸다. 특히 파리츠가 아랍 언론들 앞에서 “마스크맨이 단독으로 보스를 처치했다.”고 발표한 부분은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S급 보스를 혼자 처치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강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의 토크와 칼럼이 모든 방송과 신문을 도배했다.

21. 조이스의 그림자

이튿날 오후, 차희와 함께 저녁을 먹던 윤성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혹시 시간 있으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갈래?”

“어디?”

“그 왜, 두어 달 전에 네가 구해준 어린애 있잖아. 기억나?”

“어린애?”

“유나.”

“아.”

기억났다. 랜딩 능력을 처음 각성하던 때, 역삼역 달동네 재개발 구역의 폐건물에서 구출했던 애다.

그 꼬마가 카멜리 두 마리에게 쫓겨서 긴급한 와중에 어쩌다 보니 난간 너머로 떨어지면서 랜딩 능력을 각성했었지.

“기억났어.”

“걔가 상태가 좀 이상한가봐. 보호소 유모님이 그러는데 애가 뭐에 홀린 것처럼 자꾸 방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여기저기 다치고 그런대.”

“다친다고?”

“얼마 전엔 놀이터 갔다가 팔이 부러졌대. 보호소 친구들하고도 못 어울리고. 요즘은 초등학교 다니는데 학교에서도 전혀 못 어울리고.”

“흠.”

“유모님 말로는 각성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고 헌터 협회에 검진을 요청하려고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막았어.”

“왜 막아?”

“그거 검진해서 마력이 진단되면 그 후에도 협회에서 계속 관심 갖고 지켜보잖아. 일 년에 한 번씩 면담도 해야 되고. 그런 부담 주기 싫었거든.”

차희는 은근한 목소리로 윤성에게 부탁했다.

“물론 측정기가 있어야 정밀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윤성이 네가 한 번 봐주면 안 돼? 각성 가능성이 있는지. 만약 진짜 각성자고 별로 소질 없으면 그냥 조용히 살게 해주고 싶어.”

윤성의 감각 능력은 거의 5,000에 가깝다. 걸어 다니는 마력 측정기라는 백마중의 감각 능력보다도 더 높다.

물론 차희는 윤성이 그 정도라는 것은 몰랐지만, 윤성은 충분히 측정기 없이도 아이의 각성 여부를 진단할 수 있었다.

“좋아. 한 번 볼게.”

유나는 랜딩 능력을 얻던 순간을 함께했기 때문에 꽤 인연이 깊다. 항상 챙겨줘야 한다거나, 뭐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책임감이 느껴졌다.

유나가 지내는 아동 보호소는 강서구 과해동의 ‘행복의 집’이라는 곳이었다. 차희는 이미 수없이 그곳을 드나들었지만 윤성은 처음이었다.

시내에서는 꽤 떨어진, 외진 골목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나타나는 크고 낡은 집. 사회봉사를 나온 대학생들이 꾸며놓은 벽화와 화분 따위가 산뜻한 분위기를 조성해주었지만, 어쩐지 쓸쓸하고 허전하다.

행복의 집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총 네 명. 온갖 기술적 잡일을 처리하는 50대 아저씨와 유모 셋이다.

유나를 담당하는 황숙미는 윤성과 차희를 반갑게 맞이했다.

“애의 정확한 상태가 어떤가요?”

손님 사랑방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윤성이 물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친구들하고는 거의 말 한 마디 섞질 않고. 하루 죙일 그냥 방에 틀어박혀가지고 로봇만 가지고 놀아요.”

“로봇이요?”

“대학생들이 기증하고 간 장난감 중에 하난데, 사람 모양이고 크기는 한 이만한?”

황숙미가 양손을 벌려서 시츄 한 마리가 들어갈 만큼의 품을 만들었다.

“별로 크진 않군요.”

“보통은 남자애들이 그런 걸 좋다고 가지고 노는데 유나가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밖에 놀러 나갈 때도 항상 그걸 가지고 가고.”

“그 로봇이 오기 전후로 뭔가 바뀐 게 있습니까?”

“로봇이 오기 전에는 더 음침하고 우울했는데, 그게 온 후로는 그래도 좀 밝아졌어요. 하지만 친구들하고는 더 안 어울리게 됐죠.”

차희가 으스스한 표정으로 윤성을 쳐다보았다.

“뭐야. 왠지 무서운데.”

“별거 아닐 거야. 선생님, 유나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황숙미는 두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 유나의 방과 부엌, 거실, 놀이방을 차례로 뒤진 끝에 결국 뒷마당에서 유나를 찾아냈다.

유나는 로봇을 상대로 혼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잠시 후, 황숙미가 유나를 데리고 사랑방으로 돌아왔고, 유나의 옆구리에는 로봇이 껴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데.”

유나가 들어오자마자 윤성이 차희에게 속삭였다.

“각성?”

차희가 깜짝 놀라 물었지만,

“아니. 저 나이에 이 정도의 마력을 발산하려면 에어포스 수준의 인재야. 당연히 그건 아니고, 저 로봇한테서 마력이 느껴진다고.”

“로봇에서?”

차희가 식겁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귀신 들린 거야?”

“뭐래. 그럴 리가 있냐.”

윤성은 유나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눈을 지그시 맞추고,

“유나야, 오빠 기억하니?”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뭐가?”

“저 구해줘서요.”

“아. 그거.”

꽤 오래된 일에 대한 감사 인사다.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유나가 로봇을 꼭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가 이럴 때 고맙습니다 하는 거랬어요.”

“아리?”

“아리.”

유나가 로봇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알루미늄과 철로 만들어진 장난감. 눈에는 불이 들어오는지 연두색의 손톱만한 램프가 박혀 있고, 가슴에는 별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 새겨진 제조사의 레이블.

-일루미나.

윤성은 로봇을 빤히 쏘아보았다.

헌터 용품이 아니라도 마력이 담긴 용품을 만드는 제조사들은 꽤 많다. 크게는 자동차나 항공기, 엘리베이터처럼 엔진이 들어가는 기계와 가전제품들. 그리고 작게는 이런 장난감들.

로봇의 마력은 D급 마정석과 비슷한 수준이다.

실제로 마정석을 넣어서 만든 장난감이라면 특수한 기능이 있을 텐데. 특정한 신호를 보내면 움직인다든가.

아마 유나는 그 신호를 우연히 알아냈을 것이고 로봇의 신비함에 홀렸을 것이다.

크게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군. 좀 크다 보면 장난감에 질릴 테고, 친구들하고 놀게 될 거다.

유나를 돌려보낸 윤성은 차희에게 말했다.

“각성은 없어.”

“그래?”

차희가 안도했다.

“그리고 그 로봇. 기증받은 거라고 하셨죠?”

윤성이 황숙미에게 물었다.

“네.”

“꽤 비싸 보이더군요. 그거 팔면 중고라도 백만 원 정도는 나올 거예요. 유나가 로봇 졸업하고 나면 팔아버리고 컴퓨터나 한 대 사주세요.”

“와아.”

황숙미는 깜짝 놀랐다.

그만한 물건을 기부로 받았다니, 운도 좋군.

볼일을 마친 차희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저희는 다음에 또 올게요.”

“저희라니. 나도 또 오는 거야?”

윤성이 반 장난으로 물었다.

“오면 좋지.”

차희가 피식 웃으며 윤성의 팔을 잡아당겨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잠깐만요!”

황숙미가 그들을 붙들었다.

“차희 씨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뭐죠?”

“유나 지금 초등학생인 거 아시죠?”

“네.”

“원래 2학년 나이인데 1학년으로 들어갔어요. 애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근데 다음 주에 학예회를 하거든요.”

“학예회요?”

“학부모들이 참관해야 해요. 염치없지만 혹시 차희 씨가 가주실 수 있을까 해서…….”

“네에? 하지만 선생님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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