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레벨업 속도는 9.8m/s^2 066화
마일하이클럽의 이용객 중에서는 여승무원들에게 폭력적인 남자들이 꽤 많다.
때문에 심채영은 마일하이클럽 비행기의 승무원으로 자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항공사 측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게 되었다.
윤성이라는 남자가 애초에 항공사의 지저분한 서비스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도 그녀의 선택에 한 몫 기여했지만.
추가로 들어온 두 사람은 인상이 별로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제 비행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맡은 일은 잘해내야 한다.
심채영은 세 헌터를 비행기로 안내했다.
***
An-338.
원래 50인승 비행기지만 객석 개조를 통해서 큰 객실을 세 개 만들고 가운데에 파티룸을 두었다.
마일하이클럽용 비행기 중 하나다.
심채영은 세 사람을 비행기에 태운 다음, 황동수와 차태식이 요구한 대로 준비한 여성들 일곱 명을 태웠다. 그녀들의 대기룸은 비행기의 뒤편의 조그만 방이다.
“저는 좀 자겠습니다. 밥때 되면 불러줘요.”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윤성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방에 들어갔다.
‘여기서 랜딩해 보자.’
만약 비행기에서 살짝 점프해 랜딩 자세를 잡으면 버프 기본값으로 유사시에 황동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착
랜딩 자세를 잡은 윤성의 눈앞에는 어떤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지면을 딛지 않으면 랜딩이 안 되는 걸까?
‘그냥 지금 황동수를 제압하는 건 어떨까?’
아직 버프가 남아 있다. 약 3시간 14분 정도.
이 시간이면 황동수를 십만 번 정도는 죽일 수 있다.
윤성은 주먹을 쥐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에이. 관두자.’
먼저 싸움을 걸어오면 모를까, 이쪽에서 갑자기 공격해서 처치하기는 좀 그렇다. 뒤처리도 걱정이고.
얌전히 있으면 사고가 날 일은 없을 거다. 황동수는 윤성을 꽤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협회에서 윤성은 A급을 상회하는 완력으로 황동수의 손목을 쥐어서 한 번 제압한 적도 있고, 백마중의 스카우트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황동수가 보냈던 암살자 김찬열은 B급 던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공식적으로는 구스타프에게 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눈다를 맞고 모두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짐꾼 윤성이 살아남았는데 김찬열이 죽었다는 점은 확실히 특이했다.
황동수는 윤성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먼저 공격해 오지는 않겠지. 이쪽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까.
한동안 황동수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좀 사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만약 시비 걸면 그때 생각하자.
‘잠이나 자자.’
윤성은 그냥 침대에 올라가 길게 누웠다.
3일간 잠이나 푹 자둘 생각이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파티룸 쪽에서 쿵짝짝 하는 음악 소리와 함께 차태식의 끔찍한 고성방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오 미친놈들. 대낮부터.”
아직 윤성은 버프가 남은 상태. 4,000점의 감각 능력에 차태식의 음정 박자를 다 무시한 고함 소리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어젯밤 호텔에서 들었던 소음들이 낫겠다. 이 새끼야!”
윤성이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잠에 들려고 애썼지만,
‘잠이 안 온다.’
한 번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보단 몸이 나았다. 저 소음이 신경 쓰일 만큼.
결국 윤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심채영이 앉아 있었다. 파티룸에서 손님들이 놀고 있는 동안 좀 쉬고 싶었던 것이다.
“안 주무세요?”
윤성을 보고 심채영이 물었다.
“잠이 안 오네요. 지금 고도가 몇 미터쯤 되죠?”
“고도요?”
자다 깨서 처음 물어보는 게 뭐 이래?
심채영은 복도 뒤편 끝의 계기판으로 이동해 고도값을 읽었다.
“4,280미터입니다.”
높군.
알리야랑 싸울 때보다도 더 높다.
윤성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이 높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겠네.
“어쩌다 이집트에 오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이집트를 오가는 무역을 하셨어요.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자주 따라다녔죠. 대학이나 다른 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랍어도 꽤 능숙해지고, 먹고 살려고 일자리를 찾다가 이 일이 적성에 맞아서.”
“항공사에서 근무하면 아버지 무역 사업을 도와드릴 방법도 있겠네요. 화물선 운항 정보 같은 걸 더 잘 아실 테니까.”
“그렇죠. 하지만 아버진 돌아가셨어요.”
“아.”
윤성이 잠깐 말을 멈췄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꽤 오래전 일이에요. 이집트에서 S급 게이트가 한 번 범람한 적이 있어요. 사실 지금도 그때의 여파에서 자유롭진 않죠. 그 게이트가 닫히지 않았거든요.”
“안 닫혔다고요?”
“다행히 도심 한복판에 범람한 건 아니었고 바닷가였어요. 그리고 마수는 해상 타입이었죠. 거대한 오징어 같은 것들이요.”
“흠.”
아마 재포니카 타입인 것 같다. 대왕오징어와 비슷하게 생긴 마수다.
다만 그 크기와 힘이나 마법력이 엄청나서 던전 하나가 능히 국가 하나를 위협할 정도라고 했다.
옛날에 헌터 도감에서 본 적 있지. 그게 중동에 터졌었군.
“근데 국제 사회가 던전 구축에 힘쓰지 않았나요? 왜 아직도 게이트가 남아 있다는 거죠?”
확실히 이상하다. 재포니카는 강력하지만 일산의 엘리지아 던전처럼 절망적인 레벨은 아니다. SS급 헌터 한두 명이 컨트롤러로 들어가서 S급 헌터들을 지휘하면 클리어할 만한데.
“게이트가 터진 게 홍해였거든요.”
심채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중해였다면 이탈리아까지 마수들의 활동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니까 어떻게든 게이트가 처리되었을 거예요. 이탈리아엔 SS급 안토니오도 있고, 일단 이탈리아라는 나라 자체가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국가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홍해는 아니에요. 그 마수들이 위협하는 나라들은 기껏해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같은 나라들이에요. 이런 약소국들을 위해서 국제사회가 위험을 무릅쓰고 최상급 헌터들을 투입할 리가 없죠.”
“그럼…….”
“게이트는 아직도 활동 중이에요. 이따금 해변을 운행하는 선박들이 박살 나곤 하죠. 저희 아버지의 무역선도 그중 하나였고요.”
“하지만 그대로 두면 무역을 못 하잖아요?”
“마정석이 연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확인된 후로 석유의 가치는 급격히 줄었어요. 중동에서 팔아치울 수 있는 가장 비싼 자원이 사라진 이상, 국제 사회는 굳이 중동과 큰 무역을 할 필요가 없어졌죠.”
“음.”
“그래도 그렇게 절망적인 건 아니에요. 최근 중동의 최상급 헌터들이 힘을 모아서 게이트 구축 계획을 세웠대요. 원래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반목하는 헌터들이었는데 알리야가 규합했다더군요.”
“알리야?”
“문제가 많은 남자죠. 현상금도 걸려 있고. 하지만 헌터 세계에서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왜요?”
그 알리야를 며칠 전에 죽여 버렸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윤성은 말을 삼켰다.
“그럼 그 게이트가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SS급 헌터가 가지는 않지만 S급 헌터가 다섯 명이나 간다고 들었어요. 그럼 할 수도 있겠죠.”
글쎄.
윤성은 비관적이다.
S급은 급수 내의 전투력 범위가 매우 크다. 알리야 같은 경우는 꽤 강했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들만 다섯 모여서 S급 재포니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국제 사회에서 S급 최상위권이나 SS급이 필요할 텐데.
-탁탁탁!
그때, 갑자기 여성 한 명이 파티룸에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찢어진 옷차림에 입술이 터졌고 눈에는 눈물에 마스카라가 번져 있다.
놀란 심채영의 앞에 풀썩 쓰러진 그녀는 심채영의 다리를 붙잡고 흐느꼈다.
“saeidni!”
“뭐라는 겁니까?”
시간이 지나서 통역 마법이 사라진 윤성이 물었다. 심채영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도와달래요.”
“네?”
여자가 다시 말했다.
“lm 'akun 'aerif ma kan ealayhi.”
“뭐라는 거예요?”
“이런 건 줄 몰랐다고…….”
“네?”
심채영은 여자와 아랍어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리비아 노예시장에서 팔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대요. 하지만 집안일을 하는 하녀 같은 것인 줄 알았답니다. 비행기에서 하는 것도 청소나 빨래 같은 일인 줄 알았대요.”
“아니, 뭔 개소리예요, 그게? 그럼 항공사 측에서 애초에 뭔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인신매매 당한 사람을 데려왔다는 거예요?”
“가끔씩 이래요…….”
“아니. 잠깐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윤성은 몇 마디 어버버하다가 간신히 얘기했다.
“애초에 한 나라의 항공사가 이런 걸 중개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거리 아니에요? 아무리 개막장이라도 그렇지. 가난한 여자들 돈으로 사와서 강대국 부자들한테 팔아치우는 것도 정상은 아닌데 설명도 제대로 안 해줬다고요?”
“솔직히 제 직장이지만 좀 엉망이죠.”
심채영의 귀가 붉어졌다. 수치스러웠다.
윤성이 이를 으득 깨물었다.
“좀 엉망이 아니라 이건 그냥 미친 거죠!”
“aismi mahik. khadhunaa 'iilaa almanzil. yjb 'an 'araa waliday”
여자가 펑펑 울면서 심채영에게 빌었다.
“이분 이름은 ‘마닉’이래요. 집에 데려다 달래요. 가족들한테 가야 한다고.”
“하, 참나. 어떻게 방법이 없나요?”
“으음.”
“walidaya hu tayrimun raja'an!”
“아버지 이름이 테리문이래요.”
“켁!”
윤성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설마 내가 아는 그 테리문인가?
“하지만 테리문이라는 이름은 꽤 흔해요. 그것만으로 찾기는 힘들어요.”
심채영이 안쓰러운 눈을 했다.
“kan yaemal fi kurya. ldhlk tatawaeat hadhih altaayiratu. li'anahum qaluu 'anaha kanat tustakhdam min qibal alkuriiyna. 'aradt faqat 'an 'arah.”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 때문에 이 비행기에 지원한 거래요. 한국인들이 있다고 해서 아빠를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맞을 확률이 급격히 올라가는군.
“제가 아는 사람일 것 같군요.”
“정말요? 어떻게요?”
“카이로로 오는 비행기에서 만났어요. 아무튼 일단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제 일이니 제가 해결하겠어요.”
심채영이 심호흡을 하고는 일어났다.
파티룸으로 이동하는 그녀를 윤성이 노파심에 뒤따랐다.
파티룸은 이미 클럽과 다름없는 상태다.
쿵, 쿵, 쿵 하는 요란한 비트에 어지러운 매직볼이 형형색색의 빛을 쏘고 있었다.
황동수와 차태식은 팬티 한 장 입은 민망한 차림새로 그들 옆에서 술과 카트를 하는 중이다.
“오오!”
황동수가 윤성을 보고 큰 소리를 냈다.
“결국에는 끼었구만.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남자라면 이런 거를 거부할 수가 없어. 이리 와.”
“미안하지만 난 관심 없어요.”
“그럼 왜 왔어?”
윤성은 심채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사측에서 고객님들께서 요구하신 서비스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좀 전에 들어왔던 여성 마닉 씨는 매춘 일인 줄 모르고 왔다고 합니다. 항공사 측에서 마닉 씨에게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어이, 잠깐만.”
취해서 비틀거리는 차태식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좀 전에 마닉에게 수작을 부리려다 실패한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지만 이런 상황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근데 우리는 분명히 일곱 명을 주문했다고. 한 명 모자라는데 그럼 그걸 어쩔 거야?”
“사측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배상하겠…….”
“아니!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를 못 받았잖아! 우리는 다시 여기 오기 힘들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엄청 바쁜 사람들이란 말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단가?”
“네?”
“마닉인지 소닉인지는 내 모르겠고. 어쨌든 일곱을 채우긴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차태식이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심채영을 훑어보았다.
“무슨…….”
“어때? 돈 많이 줄 테니까.”
그가 심채영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왜, 왜 이러세요! 전 스튜어디스예요!”
“그래서 더 좋은 거지.”
“잠깐만요. 손님!”
어쩌면 불안한 예감은 이렇게 빗나가는 법이 없는지.
“야.”
윤성이 차태식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태식. 놔라.”
“뭐야?”
“진상 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네가 뭔데 방해해?”
“안 하게 생겼냐?”
“차태식!”
황동수가 뒤에서 소리 질렀다.
“이리 와.”
“하지만 선배님.”
“빨리 와.”
차태식은 분한 표정이었지만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는 황동수 옆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황동수의 눈빛이 꽤 위협적이다.
“강윤성.”
그가 자리에서 쓱 일어나더니 윤성에게 다가왔다.
“자네 요즘 너무 눈에 밟히는군.”
“그렇습니까?”
“그거 아는가? 이렇게 높이 나는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르네. 내가 자네를 죽여서 창밖으로 던져 버려도 말이야. 그냥 사고가 났다고 하면 끝이지.”
“뭐, 한번 해보시죠.”
윤성이 말했다.
차라리 지금 싸움이 터지면 괜찮다.
알리야를 몇 초 만에 태워 버렸던 힘이 아직 남아 있다. 불과 1시간 44분 정도지만.
이 시간 안에 싸움이 벌어지면 그냥 황동수를 빈사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3일 동안 푹 쉬다가 내려가면 끝이다.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주면 정당방위니 걸릴 것도 없다.
“자네가 뭘 믿고 까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이 비행기를 탔다면 좀 사릴 줄을 알아야지.”
황동수가 마력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근접 계열이지만 그는 보조 마법도 웬만큼 다룬다. 그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스킬은 강력한 화염.
황동수의 등 뒤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
“선배님! 그런 거 쓰시면 비행기 고장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차태식이 충성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윤성은 너무 가소로워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황동수의 마법은 아르동이나 알리야랑 비교하면 거의 애들 장난 수준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호들갑 떨며 딸랑딸랑하는 차태식이라니.
“아니네. 내가 하지.”
황동수가 윤성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초 근거리 화염구 폭파.
인근 피해를 최소화하고 타깃에게 모든 화력을 집중시키는 스킬이다.
하지만,
-콰앙!
화염구가 터진 윤성의 가슴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핫팩입니까? 미지근한 걸 보니 터뜨린 지 꽤 된 모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