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레벨업 속도는 9.8m/s^2 056화
다윤이와 소윤이는 윤성에게 한동안 집을 비워도 상관없다고 했다. 둘이서도 끄떡없다고.
그래도 노파심에 마음이 안 놓인다.
‘애들이잖아.’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들이다. 중딩, 고딩. 애들이지 완전.
특히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동네 적응도 안 되었을 텐데 애들만 두고 집을 오래 비운다니.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던 윤성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고 생각을 바꿨다.
차희가 소윤과 같이 있었다.
차희.
성격이 워낙에 거리낌 없고 진실해서 황동수한테도 따발따발 쏘아붙이고 덤벼드는 사람이다.
그 성격이 호감 쪽으로 작용하면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30분 이상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친화력이란 게 폭발해버린 이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소윤이와 매우 절친한 모양새로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 여기 와 있어?”
“어?”
윤성을 발견한 차희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퇴근길에 마주쳤거든. 나 소윤이랑 저녁 먹었다!”
차희가 소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언니가 사줬어.”
“뭐 사줬어?”
“파스타.”
소윤이 헤실거리며 차희의 팔짱을 꼈다.
진짜 꽤 친해졌나 보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인테리어 때문에 겨우 한 번 본 사이 아니었냐?
어리둥절한 윤성의 표정을 보고 차희가 빙긋 웃었다.
그녀는 인테리어 때 다윤, 소윤과 친해진 후 이게 윤성과 친해지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윤, 소윤은 차희와 성격도 잘 맞아서, 평소에도 동생이 있었으면 했던 차희에겐 딱이었다.
***
“나 이집트 간다.”
다음날 오후, 점심시간에 나온 차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윤성이 말했다.
“이집트? 여행?”
“응.”
“언제?”
“내일 아침 비행기.”
“우와! 좋겠다. 나 낙타 타는 거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
업무량에 찌든 차희는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기념품 뭐 사올까?”
“음. 글쎄, 난 다 좋은데. 모래시계?”
“진심이냐?”
“아니면 면세점에서 뭐 사주라. 향수. 마크제이콥스 데카당스.”
“좋아.”
윤성은 돈부리를 몇 숟갈 떠먹고는 주저하며 말했다.
“혹시 내 동생들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눈치 빠른 차희는 단번에 윤성의 포인트를 읽어냈다.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윤, 소윤이와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다. 윤성과도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이런 걸 놓칠 수야 없지.
이튿날 오전, 윤성은 인천 공항에 있었다.
그가 끊어둔 티켓은 대한항공에서 제공하는 인천-카이로 직항. 한때 폭탄 테러로 인해 이 루트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최근에 풀렸다.
아직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철수 권고’ 레벨이다.
‘나도 안전한 곳 가고 싶지만, 3일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빙빙 돌아주는 서비스를 해주는 곳이 이집트 항공뿐이어서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윤성 같은 상급 헌터에게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테러’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론 무지막지한 위협이다. 왜냐하면 테러리스트 중에도 상급 헌터 수준의 각성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B급 이상의 인재들은 국가적인 자원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비싼 돈을 주고 데려가므로 테러 집단에 남아 있는 경우가 적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테러 조직에는 상급 헌터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여객기를 노리기도 한다.
“잠깐만요, 손님. 이건 헌터 용품이 아닌가요? 왠지 미세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대한항공의 가드, A급 헌터가 윤성을 붙잡았다. 윤성이 입고 있는 코트에서 마력을 느낀 것이다.
모든 헌터 용품들은 게이트를 통과할 때 걸러진다. 수하물로 붙여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윤성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랜더의 코트나 랜더의 전투화는 검출기에서 마력이 잡히지 않았다.
종단 속도의 단검은 마력과 특성을 제하고 봐도 물리적으로 흉기이기 때문에 수하물로 맡겼지만.
윤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게이트에서 보내주던걸요. 이건 그냥 패션입니다.”
A급 헌터는 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윤성을 보내주었다.
‘검출기로도 잡히지 않는 물건을 알아보다니.’
상당히 기감이 좋은 헌터다.
실제로 윤성은 랜더의 전투화를 신고 다니는 동안 거기서 특별한 마력을 느끼는 상급 헌터를 만나보지 못했다.
기감 뿐 아니라 모든 능력치가 한국 1위인 에어포스조차도 윤성의 단검과 전투화를 보고 마력이 느껴진다고는 했지만 그 수준에 설레발치진 않았다.
랜더의 용품들은 그 압도적인 성능에 비해서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마력은 매우 미세한 수준인 것이다. 그걸 느끼고 그 수준을 감지하려면 엄청난 기감이 필요하다.
‘다윤의 말에 따르면 마계에서 아르동이 코트를 보고 엄청난 마력이 느껴진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던데.’
하인스도, 바토리도 기감은 뛰어났다. 마족의 특성인가?
‘저 새끼 설마 마족은 아니겠지?’
윤성은 A급 헌터를 힐끔 돌아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돼.
윤성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비행기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서서히 올라가는 고도.
이 국제선은 10,000미터 고도로 올라가서 비행할 것이다. 상당히 탐나는 높이. 하지만 중간에 뛰어내릴 방법은 없다.
이집트에서 얻을 수 있는 버프는 이보다는 훨씬 낮다. 항공사 측에 문의했을 때, 그들은 마정석 엔진과 연료 효율 때문에 그 고도에서 3일을 비행하기는 어렵다고 했던 것이다.
기껏해야 4천 미터 정도.
상관없다.
4천 미터 높이라도 30분 랜딩 임무는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모든 능력치에 4천 점이라는 버프를 가지면 이집트의 그 누구도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에어포스 같은 SS급이 죽자고 덤비지 않는 이상.
하지만 이집트에는 SS급 헌터 자체가 없다.
3일간 하늘 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다가 랜딩하는 순간 아프리카 대륙에서 손꼽히는 톱 헌터가 되는 거다. 한국으로 돌아와도 톱 헌터다. 그 버프가 꽤 장기간 유지될 테니.
윤성은 부푼 꿈에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전에 화장실부터 좀 가고.’
객석에서 빠져나와 뒤쪽의 화장실로 이동하는데,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 윤성을 덥석 잡았다.
“이봐요, 당신 혹시 헌터입니까?”
멋지게 기른 콧수염, 가무잡잡한 피부와 선이 굵은 이목구비.
곱슬머리의 중동 사람이었다.
“왜요?”
“아까 가드가 당신한테 이거 헌터 용품 아니냐고 물었잖아요.”
그가 윤성의 코트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뭐가요?”
“헌터라면 혹시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도움이요?”
“제 이름은 테리문. 한국에서 일하는 이집트인입니다. 저희 가족들이 지금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귀국하는 길이에요.”
“위험?”
“저희 가족들은 이집트의 메르사마트루 도시에 살고 있어요. 그곳은 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죠.”
윤성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무슨 고전 RPG 게임도 아니고…….’
이 얘길 정말 들어야 하나? 왠지 엄청 귀찮은 일에 말려들 것 같은데.
그러나 그만하라고 딱 잘라 버리기에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 절박했다.
윤성이 머뭇거리는 사이 테리문이 말했다.
“리비아는 지금 두 개의 정부로 나누어져 있어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상태예요. 굉장히 혼란하고 치안도 엉망이죠. 그쪽에서 나오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세력들은 국경을 넘어서 이집트로 계속 유입되고 있습니다.”
“이집트로?”
“네! 그리고 최근에 저희 가족들이 있는 메르사마트루 근처를 테러했답니다.”
“음.”
“헌터님도 결국 얽히게 될 일입니다. 헌터님이 이집트로 가신다면요. 그놈들이 큰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테러를 또 준비 중이라고요?”
“네!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 가족들은 아직 살아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끌려간 것 같습니다. 리비아에 있는 노예시장으로 넘겨졌을 거예요. 그곳에서 몇백 달러에 사람들이 거래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노예시장이요?”
실화냐? 21세기에 노예? 진짜?
윤성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중동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테리문은 침울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집트에도 강한 헌터들이 있지만 저 같은 일반 시민을 위해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부탁입니다. 얼마든지 사례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전 E급 헌터라서 그런 것 못 합니다.”
윤성은 옛날에 쓰던 E급 헌터 자격증을 보여주었다.
좀 마음이 안 좋았지만 솔직히 그에게 많은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여기 차희가 없어서 천만다행이군. 걔 성격에 도와주자고 난리 쳤을 테니.
“차라리 저쪽 A급 헌터한테 부탁해보는 건 어때요?”
윤성이 그의 코트를 탐색하던 헌터를 가리켰다.
테리문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걸 보니 좀 미안하긴 한데.
‘하지만 내가 리비아 가서 다 때려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힘도 없고.’
어떤 정의 구현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비행기에서 랜딩한 이후다. 지금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화장실에 다녀온 윤성은 의자 등받이를 눌러 기대며 눈을 감았다.
카이로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 잘 생각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우리 여객기는 곧 카이로 공항에 도착합니다.”
안내방송이 들렸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수하물로 맡겼던 짐을 찾고 공항에서 나온 윤성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찾아 헤맸다.
“웨얼 이스 더 버스 스탑?”
안 되는 영어로 좀 애를 썼다. 하지만,
“노, 노노! 똔 유즈떠빠쓰. 뽈티빠운드 택씨.”
“왓?”
이건 코르소가 들어도 이해 못했을걸. 얘 뭐라는 거야?
윤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버스 타지 말고 택시 타라고 하는군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은 테리문.
아직도 포기 안 했나.
윤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저 앞에 있는 줄이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같죠?”
테리문은 도로 앞에 늘어선, 열댓 명의 인파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저거 다 택시 기사들이에요. 삐끼들이죠.”
“고맙습니다. 버스는 어디서 탈 수 있죠?”
“저쪽. 길 건너편에서 우측으로 돌아나가야 합니다.”
테리문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윤성은 이동했다.
그가 알려준 택시 삐끼들이 수없이 윤성의 옷깃을 붙잡고 캐리어를 붙잡았다.
“뽈티빠운드.”
“뽈티빠운드 애니웰!”
“응,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