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레벨업 속도는 9.8m/s^2 048화
집을 구한다면 당연히 초고층 아파트다.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것은 신차민이 살고 있는 행복아파트.
세인트 길드에서 지은 그 아파트는 신설 당시 입주권을 상급 헌터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정했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상급 헌터들을 세인트로 영입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그 아파트에는 상급 헌터들이 꽤 많이 살고 있다. 차민의 부모님 두 분이 A급 헌터라고 했지?
가까운 곳에서 던전이 범람해도 제법 안전할 테고, 윤성의 미래를 생각할 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최고층이 몇 층입니까?”
부동산에서 윤성이 물었다.
40층. 들은 대로다. 높이는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160미터. 옛날 같았으면 백화점에서 떨어지던 몇 주 전만 해도 군침을 삼켰을 높이지만, 샌텀 타워의 고도에 익숙해진 윤성은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랜더의 전투화가 있지.’
게다가 랜더의 손목시계 덕분에 버프 기본값도 있고.
이젠 레벨도 30이다. 그 둘을 잘 조합하면 160미터 아파트 옥상에서도 760점 이상의 버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윤성은 바로 아파트를 계약했다. 옵션은 기본적인 것 외엔 추가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자기 방을 가져본 게 처음이었다. 물론 윤성도 집을 소유한 것은 처음이다. 모든 것을 직접 고르고 싶었다.
그러나 핏줄은 못 속인다고, 윤성의 동생들도 인테리어에는 재주가 없었다. 이젠 돈 때문에 못 고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예쁜 방을 꾸미기가 어려워서였다.
“이런 거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소윤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건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긴 했지. 윤성은 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휴대폰을 들어 구원 투수를 불렀다.
-집을 샀다고오?
수화기 너머로 충격에 빠진 차희의 목소리가 퍼졌다.
“그렇게 됐어.”
“무슨 돈으로?”
“뭐, 여차여차해서 좀 번 게 있어서.”
“세상에! 축하해! 역시, 윤성이는 잘 될 줄 알았어!”
차희는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다. 윤성의 집에 들이닥친 그녀는 처음 보는 윤성의 동생들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학교 후배처럼 대했다.
“이거 어때? 이건?”
그녀는 인터넷으로 각종 가구를 띄워놓고 다윤과 소윤을 불러모은 다음,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원목 가구가 튼튼하고 오래 써. 이 테이블은 좀 아니다. 꼭 회사에서 미팅할 것처럼 생겼잖아? 이런 게 더 예쁘지 않니? 모서리 둥근 소파 테이블을 이쯤에 배치하고, 안쪽에 책상. 여기에 침대. 창문에는 암막 커튼을 치자. 어때? 어때?”
“좋은…… 것 같아요……. 소윤아, 넌 어때?”
처음 보는 언니가 어색함도 없이 신나서 떠들어대자 다윤이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침대 써본 적 없는데…….”
“바닥에서 자는 게 더 편하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소파 베드 같은 건 어때? 공간 많이 차지하지도 않고 침대로 쓸 수도 있고. 게다가 침대 싫으면 소파로 써도 되니까. 그게 좋겠다. 소파 베드 아까 예쁜 거 있었는데.”
웹 페이지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던 차희가 헉, 소릴 냈다.
“좋은 생각 났어. 얘들아, 철망을 달아놓는 건 어때? 다이소 가면 철망 그물 3,000원이면 사거든. 그걸 책상 앞에다가 붙여놓고 전시회 티켓이나 영화표 같은 것들 이것저것 집게로 집어놓는 거야. 어머 완전 예쁘겠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동생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희의 놀라운 친화력에 제압당했다. 불과 20, 30분이 지나자 작은 방에서 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차희의 수다는 무려 세 시간이 지난 후에 끝났다. 윤성의 휴대폰에 가구들의 링크 주소가 우르르 날아온 후였다.
“고마워.”
방에서 나온 차희에게 윤성이 말했다. 그와 함께 윤성이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차희가 호기심을 가지고 쇼핑백을 열어보는 동안 윤성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자한테 이런 선물을 주는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차희는 너무 고마운 친구다. 이보다 더한 것들도 아깝지 않다.
“어머, 뭐야 이거? 구찌?”
쇼핑백 안에서 핸드백이 나오자 차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물이야.”
“세상에……. 전혀 생각 못 했는데. 윤성이가 이런 걸 다 챙길 줄 알고. 뜻밖인데? 고마워. 잘 쓸게.”
사실 차희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감동한 척했다.
“근데 윤성이 네 방은 어때?”
“어? 내…… 내 방?”
차희가 사악하게 웃었다. 인테리어 2차전이 시작된 건가?
차희는 윤성의 손을 붙잡고 안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녀는 휑한 방 안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근데 나도 이렇게 큰 아파트 안방은 어떻게 꾸며야 할지 잘 모르겠네. 다른 사람들 인테리어를 좀 찾아보자.”
둘은 바닥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함께 아파트 안방 인테리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신혼부부의 인테리어였다.
아파트 안방을 인테리어 하면서 차희와 함께 이런 것을 찾아보고 있으니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차희도 마찬가지였다.
“헤헤, 이러니까 무슨 신혼부부 같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 집에서 오래 살 거지?”
“응.”
“그럼 아예 살림집으로 만들자. 방이 크니까 침대도 큰 거 들여도 상관없을 거야. 더블베드를 이쯤 놓고, 여기 카펫, 음. 회색으로 이쪽에 책상.”
“더블베드?”
“뭐……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차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인테리어의 꽃은 역시 조명이지. 아까 동생들 방도 조명 고르는데 시간 다 보냈어. 스탠드를 쓰자. 어머, 이거 너무 예쁘다!”
차희가 웹페이지의 주황색 스탠드 조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140센티미터 정도 높이의 구부러지는 스탠드. 침대 옆에 놓기 딱 좋은 물건이었다.
신나서 가구를 고르는 차희의 옆모습을 보면서 윤성은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가구들은 차례차례 도착해 계획해둔 위치로 쏙쏙 들어갔다. 차희의 인테리어 솜씨는 제법이어서 며칠 사이에 제법 집안 꼴을 갖추게 되었다.
그동안 윤성은 꾸준히 유명산에서 일일 랜딩을 하며 능력치를 쌓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테스트해 본 것이 하나 있다.
<종단 속도의 단검 : 사용 가능. 115㎧의 속력으로 투척할 수 있음. 또한 사용자가 원할 때 회수할 수 있음.>
이건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윤성은 단검을 공중에 휘릭 던졌다가 잡아보았다. 가볍다. 가볍고 단단하다.
아르동 던전을 클리어한 바로 다음 날부터 강도와 절삭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절벽 인근의 공터에서.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단검을 꺼냈다. 헌터의 품격 주인 김수철이 비싸게 팔았던 보급형 중 최고의 단검이다. 윤성은 두 단검 날을 힘껏 부딪쳐보았다.
팅!
놀랍게도 보급형 단검이 단칼에 잘려나갔다. 이쪽이 더 단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투척 쪽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며칠간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차츰 손에 익었다.
가장 좋은 점은 바로 ‘기본 속력’ 개념이다.
윤성은 멀리 떨어진 나무를 노려보며 투척하는 상상을 했다.
<단검 투척 타겟>
그러자 나무 위에 메시지창이 생성되었다.
아르동을 없앨 때 단검은 윤성이 던지지도 않았는데 공중에서 저절로 아르동을 향해 날아들었다.
윤성은 단검을 나무를 향해 던지는 대신,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살짝 튕겼다.
쐐애액!
그 순간 공중에 잠깐 떠올랐던 단검이 별안간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콰앙!
그러고는 굉음을 내며 나무를 관통해버렸다.
‘처음 이걸 알았을 땐 소름이 다 돋았었지.’
저 위력을 단번에 0으로 만들 정도로 강한 장갑을 만나지 않는 이상 저 속력이 유지된다.
‘기본 속력’이기 때문에.
게다가 그 기본값은 더 높일 수 있다.
종단속도의 단검을 처음 얻었을 때는 기본 속력이 51㎧였다. 그걸 얻었던 당시 탑에서 맨몸으로 랜딩했을 때의 최종 속력이 51㎧였기 때문.
하지만 그 후 2.3톤으로 보정한 윤성은 유명산에서 115㎧의 최종 속력을 최고 기록으로 세웠다.
그 순간 종단 속도의 단검의 기본값도 변한 것이다.
115㎧.
일반인 메이저리그 투수 중 최고가 170㎞/h 정도의 속력으로 투구할 수 있다. 환산하면 47㎧ 정도 된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최고속구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 게다가 윤성이 던진 것은 야구공보다 20배 이상 무거운 단검이다. 충돌했을 때의 위력은 당연히 작은 나무 한 그루쯤 뚫어버릴 만했다.
그게 ‘기본 속력’이다. 손가락으로 튕기기만 해도 타겟을 향해 저 속력으로 날아간다는 거다.
거기다 힘을 줘서 던지기라도 한다면? 1,900점의 버프로 보정된 힘으로 가속시킨다면?
웬만한 S급 마수의 장갑도 뚫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경매장에 내놓아도 S급으로 분류될 보물이다. 어느 정도 가격이 잡힐지 상상도 안 되는데.
쾅!
저편에서 끔찍한 굉음이 울렸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쩍 갈라져 있다. 절반 정도를 파고든 단검에서 더운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었다.
이 미친 스펙의 단검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사용자 임의로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
윤성이 주먹에 힘을 주는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을 향해 단검이 튀어 올랐다.
손잡이가 손아귀로 들어와 손바닥에 착 감긴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조그만 애완동물 같다. 하지만 애완용이라기엔 파괴력이 맹수를 넘어서 괴물 수준이지만.
“정말 대단해.”
윤성은 흐뭇한 표정으로 단검을 허리춤에 찼다.
‘혹시 탑에 다시 가면 또 이만큼 대단한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꺼내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순간이동석(탑) : 4%>
하지만 메시지창이 뜨면서 텔레포트에 실패했다.
4%?
이게 뭐지?
윤성은 휴대폰을 꺼내어 순간이동석의 퍼센티지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별로 쓸모 있는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애초에 순간이동석이라는 아이템 자체가 워낙 희귀하다 보니 알려진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쓸 수 없다는 거군.
움찔.
윤성의 귀가 예민하게 움직였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토리?”
윤성의 눈이 커졌다.
멀찍이 떨어진 나무 옆에 바토리가 있었다.
꽤 추레한 몰골이었다. 마계에서 보았던 오만함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앞까지를 가리고 있었다.
정수리에 솟은 뿔과 빨간 눈동자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소극적인 변장이었다.
“뭐야? 왜 여기에 있어?”
바토리는 우물쭈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가 아르동을 쓰러뜨리고 생긴 포탈이 너무 컸다. 내 발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지. 그 때문에 나도 이곳으로 와버렸다.”
“맙소사. 그럼 어떡해?”
“나도 모른다. 한동안은 여기서 살아야겠지. 돌아가는 길을 찾을 때까진.”
바토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약간 비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 혹시……. 먹을 것 좀 있느냐.”
“여기로 온 후에 쭉 굶은 거야?”
“산에서 과일 따위를 먹으려고 했지만 늦가을엔 먹을 게 마땅치 않더군.”
하지만 바토리도 A급 마족들을 손쉽게 두들겨 패던 실력자다. 그 힘이면 어느 식당에서든 무전취식하고 나와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할 텐데.
수배령이 떨어져 있는 편이 차라리 그럴싸하지, 그 오만한 캐릭터가 쫄쫄 굶은 끝에 먹을 것을 구걸한다고?
윤성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바토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미안하다. 내가 쓸데없는 부탁을 했군. 못 들은 것으로 해라.”
“하여간 자존심은 더럽게 세가지고. 왜 사람들 삥은 안 뜯은 거야?”
“삥?”
“왜 돈을 안 뺏었냐고.”
“어리석긴! 마계의 귀족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는다. 약자를 쉽게 해치지도 않지. 나는 이곳의 인간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제법이군. 합격이다.
“자.”
윤성은 지갑에서 현금을 한 뭉치 꺼냈다.
“근데 너 여기 화폐 단위 아냐?”
“모른다. 난 금화밖에 써본 적이 없다.”
바토리의 얼굴이 다시 수치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잘 봐. 이게 만 원이고. 이게 오만 원. 이건 천 원. 오천 원.”
금화밖에 써본 적 없는 바토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해됐어?”
“그래, 고맙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으마.”
“안 갚아도 돼. 또 도움 필요하면 다음에 얘기하라구. 아 그리고!”
윤성이 바토리를 붙잡았다.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 건데, 다음에 또 마주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마스크맨인 거 알리면 안 돼.”
“알겠다. 주의하지.”
헌터 도감은 마족을 몬스터의 일종으로 분류해서 헌터들에게 토벌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윤성은 굳이 바토리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계에 떨어졌던 윤성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까. 비록 건방지긴 했지만.
아르동처럼 인간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바토리를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본인 말마따나 사람에게 해 끼칠 것 같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