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레벨업 속도는 9.8m/s^2 036화
윤성은 어둠 속에서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분명히 불이 꺼지는 순간, 현관 쪽에서 시끄러운 발소리들이 울렸다. 그 무게감과 빈도로 볼 때 은행으로 들어온 이들은 성인 남성이고 최소 다섯 명 이상이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소등도 그들이 계획한 것이겠지.
‘은행 강도 같군.’
이미 창구의 안전 스크린이 내려오는 길을 막아버렸을 것이고, 안쪽에 돈주머니를 던져놨을지도 모른다.
불 켜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스타킹을 뒤집어쓴 남자들 다섯이 총을 들고 서 있는 장면일 것이다.
‘아니, 근데 여기가 고담 시티도 아니고 어쩌다 들른 은행에 갑자기 강도가 들어오는 게 말이 되나?’
황당한 기분이다.
얼마 전엔 그 드문 A급 급성 마굴의 범람이 한 지역에 연달아 두 개가 터지더니.
‘누가 날 엿 먹이려고 사건들을 몰아놓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잖아?’
하지만 일단 벌어진 일이라면 굳이 피할 생각은 없다. 해결할 만한 힘도 주어져 있으니까.
촤라락.
윤성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단 코트를 벗어서 넣는다. 은행에 들어온 후에는 계속 코트 단추를 꼭 채워놓은 상태였으니까 안에 입은 검은색 셔츠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복장이 바뀌면 걸릴 위험이 줄겠지.
검은 면바지는 흔하고 눈에 안 띄니까 상관없을 테고.
다음은 방독마스크.
이 마스크를 써서 사람들 어그로를 계속 끄는 게 옳은 건가 싶긴 한데, 일단 지금 가진 게 이것뿐이니까.
마스크를 쓰면서 윤성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자리에서 이동해 대기 고객용 소파 앞에 섰다.
달칵.
비상 전원이 들어오면서 불이 켜졌다.
예상대로 은행 강도 다섯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꺄아악!”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자,
탕!
강도 하나가 천장에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전부 엎드려!”
여기까진 전부 윤성의 예상대로다. 하지만 짐작지 못했던 전개가 하나 있었다.
‘강도들이 스타킹 대신 방독마스크를 쓰고 있잖아!’
마스크맨의 인기가 이 정도라니. 범죄자마저?
“뭐야?”
“뭐, 뭐지?”
강도들이 당혹스러운 듯 서로를 두리번거렸다.
숫자가 다섯에서 여섯으로 증식했으니까.
재밌게 돌아가는군. 이거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까.
“어, 어떡하죠, 대장?”
강도 중 하나가 은행 안쪽의 남자한테 물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요즘 마스크맨 인기가 대단하니 정신 나간 놈이 하나 있나 보지.”
리더가 대답했다.
“어이, 너.”
그는 3번 창구에 있는, 신차민의 그녀에게 커다란 주머니를 던졌다.
“금고에 있는 것 전부 여기 담아와.”
“네, 네에…….”
직원은 덜덜 떨면서 주머니를 들고 움직였다.
“전원 이쪽으로 이동해서 머리에 손 올리고 무릎 꿇고 있어.”
“얌전히 있으면 아무도 안 다친다.”
강도들이 소리쳤다.
“전부 머리 위에 손 얹고 엎드리라고. 빨리, 빨리!”
그중 하나가 신차민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하지만.
“윽.”
돌덩이를 찬 듯한 느낌.
강도는 황당한 표정으로 신차민을 바라보았다.
차민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이제 나설 차례인가.’
윤성이 양손에 빛의 탄환을 장착하려는 순간,
쾅! 쩍, 딱!
차민의 펀치가 번개처럼 강도의 명치와 턱, 뺨에 꽂혔다.
곧바로 나가떨어진 강도는 기절해 버려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뭐야, 이 새끼?”
다른 강도들이 차민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차민은 다람쥐처럼 몸을 날려서 소파 너머에 엎드려 총알을 한 번 피했다.
이어서 소파 테이블을 집어 든 차민.
“얍!”
그는 날쌘 동작으로 달려오며 테이블로 총알 몇 발을 막아내고는 강도들의 보스 등 뒤로 이동했다.
“전부 움직이지 마!”
차민이 소리쳤다.
“움직이면 당신들 보스 레알 모가지 꺾이는 각이죠. 헌터 지망생 앞에서 은행 터는 거 개에바 인정?”
그가 팔로 보스의 목을 껴안아 조르면서 말했다.
‘제법이잖아?’
차민의 움직임은 윤성에게도 예상외였다.
헌터 스쿨의 학생들은 졸업과 함께 협회에서 마력을 주입받아 각성한다. 그리고 각성 등급을 판정하는 심사를 진행하는 거다.
따라서 마력 주입 직전까지는 일반인과 크게 차이가 안 난다. 기껏해야 무술을 좀 배우는 정도.
하지만 그것 역시 상급 헌터의 재목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얘기다.
B급 이상의 헌터로 판정될 녀석들은 떡잎부터 남다르다. 학생 때 이미 힘이나 순발력, 지능 따위에서 하급 헌터들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게 된다.
에어포스쯤 되면 학창 시절에 만든 전설적인 사건들도 여럿 된다.
당연히 신차민은 그런 레벨은 아니지만 최소한 A급 이상으로 판정될 소년이었던 것이다.
“크크크.”
하지만 뒤를 붙잡힌 강도들의 리더는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웃어요?”
“헌터냐?”
“아니. 스쿨 학생인데.”
“각성했다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겠군.”
콱!
리더의 팔꿈치가 신차민의 아랫배에 꽂혔다.
휘청거리는 차민.
하지만 더 위험한 게 오는 중이다. 리더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언 피스트 발동!>
번들거리는 은색 주먹이 차민에게 날아들었다.
쾅!
“흐악!”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아이언 피스트를 간신히 피한 신차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콘크리트 벽이 박살 나 있었다.
“하하하, 끝났군.”
“멍청한 새끼.”
“어린놈의 새끼가. 쯧.”
강도들이 비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스크맨 같은 놈들이 나오니까 영웅놀이라도 하고 싶냐 애송아?”
리더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세상엔 너보다 훨씬 강한 빌런들이 가득하다. 나대지 않았으면 안 죽었을 텐데.”
리더의 주먹에 다시 강력한 마력이 쏠리면서 아이언 피스트가 발동되었다.
그가 차민의 숨을 끊어버리려던 찰나,
“잠깐만.”
윤성이 말했다. 강도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무리 시민들에게 헌신적인 헌터라 하더라도 생계가 위협받으면 절도나 강도 같은 걸 생각할 수 있어. 그건 인정해.”
한때는 윤성 본인도 카멜리 던전 범람 현장에서 마정석을 훔치려 했으니까.
“하지만 시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너무 간 거 아닌가? 심지어 까마득한 후배 격의 학생한테?”
“무슨 개소리야? 너 누구야?”
강도 중 하나가 윤성에게 총을 겨누었다.
“마스크맨.”
“마스크맨이라고? 네가?”
“그런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사고 터지는 걸 보니 코난 같기도 하고.”
“무슨 헛소리를……. 장난하냐?”
강도가 화가 난 목소리로 으르댔다.
“장난은 이런 거지.”
윤성이 그의 관자놀이를 겨눈 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상급 헌터들에겐 총 같은 건 의미가 없거든.”
그는 리더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이언 피스트의 위력으로 볼 때 B급 정도의 헌터로 보인다. 약 두 달 전 일이다. 레이드 도중 연쇄 살인을 저지른 상급 헌터가 있었다.
당시 인사과에서 출동한 헌터 경찰들은 그의 체포에 실패했고 아직까지 수배 중이다.
“그렇지, 방현식?”
윤성의 말에 리더의 머리가 움찔했다. 그가 마스크 안쪽에서 신경질적으로 윤성을 쏘아보았다.
“저 새끼 쏴 죽여.”
짧은 명령.
그러고는 다시 아이언 피스트를 바닥에 쓰러진 차민에게 내리꽂는 순간이었다.
콰악!
순식간에 코앞까지 달려온 윤성이 아이언 피스트를 맨손으로 막았다.
차민과 방현식이 경악했다.
아이언피스트를 맨손으로 막았어?
탕탕탕탕!
뒤늦게 그의 등을 향해 강도들이 수십 발의 총알을 쏘아댔지만.
“초, 총이…….”
총을 쏜 강도가 당혹스러운 듯 김이 올라오는 총구를 바라보았다.
윤성의 등에서 총알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유명산 정상에서 랜더의 전투화로 점프한 윤성의 버프는 754점.
랜더의 손목시계로 보정된 버프 시간은 아직 22시간이나 남았다.
800점이 넘는 힘.
웬만한 상급 던전 마수의 이빨에도 긁히지 않을 피부다. 권총 정도의 화력이야 간지럽지도 않다.
“아이언 피스트를 맨주먹으로…….”
당황한 방현식이 뒷걸음질을 쳤다.
“헌터 스쿨 꼬마야. 펀치를 쓸 땐 말이지.”
윤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쩍!
방현식이 쓴 방독마스크의 보안 유리와 호흡구가 모두 박살 났다. 입에서 왈칵 피를 쏟아낸 방현식이 풀썩 주저앉았다.
“제, 젠장. 죽여!”
그가 소리치자,
탕탕탕탕!
뒤에서 강도들이 윤성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윤성은 태연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총을 쏠 땐 말이지.”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빛의 탄환 발동!>
무자비한 난사. 마치 샌텀 타워 앞에서 에어포스가 골리앗들을 박살 내는 것과 비슷한 속도다.
순식간에 상황은 정리됐다.
강도 중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상처 부위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떨었다.
“모두 바닥에 총 버려.”
윤성이 명령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강도들은 모두 총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부상과 공포 때문에.
윤성은 그쪽으로 다가가 강도들의 총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미, 미친……. 너 대체 뭐야?”
방현식이 중얼거렸다.
“알면 뭘 어쩌게.”
윤성이 차갑게 대꾸하며 신차민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쉬익!
갑자기 방현식이 허리춤에서 꺼낸 헌터용 단검으로 신차민을 찌르려 했다.
“이런!”
윤성은 재빨리 차민을 잡아당겨 그의 등 뒤로 당겼다.
콱!
차민을 뒤로 보내면서 자세를 비튼 윤성의 허벅지에 방현식의 칼이 꽂혔다.
그러나 총알도 뚫지 못했던 피부다.
방현식의 단검은 마법 처리가 되어 있었고 본인도 마력을 담았으나 800점 힘을 가진 윤성의 피부에는 작게 긁힌 상처밖에 나지 않았다.
옷이 좀 찢어졌을 뿐.
똑똑 떨어지는 피 몇 방울과 함께 윤성이 인상을 쓰며 방현식을 쏘아보았다.
퍽!
윤성의 발차기가 그의 턱에 올려 꽂혔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방현식.
새삼 능력치가 얼마나 뛰었는지 실감된다.
총 든 일반인 넷과 B급 헌터 하나를 제압하는데 무슨 흙장난 치는 듯한 난이도다.
“다친 덴 없어?”
윤성이 차민에게 물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근데 리얼 오지시네요.”
“헌터는 원래 그래 인마.”
“혹시 경찰 부르신 분?”
윤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도 반응이 없다.
윤성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고 손을 넣었다가 멈칫했다.
‘어디 갔지?’
“휴대폰 찾아요? 여기 바닥에 떨어졌네.”
차민이 바닥을 가리켰다.
정말이다. 방금 방현식의 단검에 맞았을 때다. 하필 바지 주머니가 찢어져서 그 틈으로 휴대폰이 떨어진 것.
“제가 경찰 부를게요.”
차민이 말했다.
“좋아.”
윤성은 휴대폰을 집어서 반대편 주머니에 넣었다.
“경찰 오면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내 얘긴 가급적 하지 말고. 각성하기 전엔 가능하면 나대지 말고. 정의감은 좋다만.”
윤성이 차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난 간다.”
윤성은 재빨리 현장을 떠났다.
‘멋지다…….’
차민은 윤성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A급 게이트 하나를 혼자 닫아버린 정체불명의 헌터.
3번 창구의 직원도 묘한 눈빛으로 윤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쳇.
차민은 왠지 모를 패배감에 속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