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레벨업 속도는 9.8m/s^2 026화
7. 동창회
이틀 후 금요일 저녁 6시. 민차희는 정각이 되자마자 크로스백을 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며칠 전부터 팀장님에게 계속 못 박아두었다. 오늘은 반드시 칼퇴근을 한다고.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
동창회 정도는 가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차희는 직원들에게 쾌활하게 인사한 후 협회 건물을 나섰다. 오늘 동창회를 그녀가 기대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바로 윤성이 나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던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차희 씨?
“이제 말 좀 놓지? 오늘 동창회에서도 그럴 거야?”
-어, 음.
윤성이 말했다.
-그래. 차희야. 윽. 좀 어색한데.
윤성은 멋쩍어 머리를 긁적였다. 차희가 물었다.
“근데 왜 전화했어? 장소 까먹었어?”
-아니. 지금 협회 앞인데 혹시 지금 퇴근하면 같이 갈까 해서.
“오! 좋아. 어디야, 어디?”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윤성은, 그녀가 상상도 못 했던 곳에 있었다. 약 5미터 앞, 방금 막 출고된 듯 광이 나는 롤스로이스.
운전석의 번쩍이는 문이 열리더니 윤성이 내렸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양복까지 입으니 완전 딴 사람이다.
“뭐, 뭐슨야?”
당황한 차희의 혀가 꼬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뭐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너?”
“나야. 강윤성.”
“어떻게 된 거야 이거?”
“가자.”
윤성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차희는 몇 번이고 차 안 곳곳을 살펴보고 윤성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처음 동창회 가는 거라서 머리도 좀 만지고 양복도 입은 건데……. 이상하냐?”
“아, 아니! 멋져!”
너무 오버했다. 그녀의 귀가 약간 붉어졌다.
“근데 어디서 이런 돈이 난 거야? 너 로또라도 됐어?”
“양복은 원래 있던 거야. 그리고 차는…… 빌렸어.”
“빌렸다고?”
“아는 사람한테.”
물론 산 거다. 바로 어제 매장에서 연락을 받고 뽑아서 시운전을 해본 롤스로이스 애퍼리션 퍼스트.
아직 비행 기능을 써보진 않았지만 차량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다.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써버렸다는 점이 속 쓰렸지만.
동창회는 강남의 에스티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호화로운 엘리베이터 크기가 윤성의 원룸보다 더 컸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윤성이 감탄하는 것을 보고 차희가 빙긋 웃었다.
“태식이가 돈 좀 썼어.”
동기 중 가장 잘나가는 녀석이었다. 지금 C급 헌터로 뛰는 그는 꽤 잘나가는 길드에 들어가 한 달에 평균적으로 3천만 원 이상을 벌고 있다고 했다.
차희의 연봉에 필적했다. 윤성이 일주일 전에 번 돈의 1/45이었고.
태평한 표정으로 회식 장소에 들어서는 윤성이었다.
“오, 강윤성!”
“윤성이!”
반겨주는 동창들. 몇 년 안 지난 것 같은데 남자들은 꽤나 아저씨들이 되어버렸군.
스쿨을 다닐 때 그리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옛 얼굴들을 보니 의외로 흐뭇하다.
“네가 E급 헌터였나?”
모두들 헌터 학교 동기였지만 대부분은 헌터와 관계없는 평범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일부는 차희처럼 협회에서 일하는 사무직이 되었고.
그들 중에서 헌터로 살고 있는 사람은 윤성을 포함해서 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잘나간다고 할 수 있는 차태식은 상석에 앉아서 비딱한 자세로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가 윤성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우리 동기님한테 내가 한 잔 줘야지.”
차태식이 말했다. C급이면 사실 협회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직급이지만 이곳에서는 으스댈 수 있는 수준이다.
어쩐지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군.
J등급 윤성은 그 꼴이 약간 우스웠다.
“얼마 전에 짐꾼으로 B급 던전 갔다가 죽을 뻔했다며? 천만다행이야.”
말을 건 사람은 E급 헌터인 박미나였다. 차태식이 아는 척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나한테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들인데. 윤성이한텐 진짜 절망적인 수준이었겠지.”
차태식의 ‘상대하기 까다로운’이라는 표현은 꽤 틀린 것이었다. C급 헌터인 차태식이 본 던전의 보스들조차 구스타프보다는 한참 아래일 테니까. B급 던전과 C급 던전 사이에는 그만큼 큰 갭이 있다.
하물며 핏빛야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마 상상도 못 했겠지. 그건 A급 던전에서도 보스로 출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지. 핏빛야수는 ‘보스’ 같은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존재다.’
그 괴수는 상태창을 볼 줄 알았다. S급 던전 보스들조차도 그런 걸 한다는 보고는 없었다. 마수 같은 것과는 조금 다른, 더 이질적인 개념.
‘차라리 헌터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는 것.’
그게 핏빛야수에 대한 윤성의 솔직한 평가였다. 마치 이계에서 온 것 같은 타종족의 헌터.
“그러고 보니까 윤성이는 임무 안 들어온다더니 어째 하나 물었네?”
E급 헌터 박미나가 물었다.
뜨끔한 차희가 목이 말랐는지 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일해서 다행인데 그동안은 어떻게 했어?”
박미나가 물었다.
“던전 범람한 곳 돌아다니면서 마정석 슬쩍하며 살았겠지. 뭐.”
차태식이 말했다.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도 있다.
“윤성이는 그럴 애 아냐.”
차희가 실드를 쳐줬지만 차태식은 전혀 듣지 않았다.
“아니긴. 야 강윤성이. 너 일감 끊긴 지 한참 됐다고 들었는데 요새 대체 어떻게 먹고사냐? 모아놓은 돈도 얼마 없었을 거 아냐?”
차희가 움찔했다. 윤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음……. 도와주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대충 둘러댄 말이었다. 박미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태식은 피식 웃었다. 협회 상당수가 윤성을 싫어하는데 도와주긴.
“포천에서 그 난리 치고 동료 살인자라고 찍혀 있는데 누가 널 도와줘? 솔직히 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해서 섭섭했다 야. 힘들었지? 밥은 잘 먹고 다녔냐?”
“잘 지냈어.”
“어휴. 야, 새꺄. 너도 줄을 좀 서라. 응? 협회에서 급수 낮은 놈들이 살아남으려면 줄을 잘 서야 돼. C급 헌터인 나도 B급 헌터님들한테 명절마다 선물 보내고 찾아가고 그런다고.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거야 인마.”
“그래?”
“그래! 아, 그리고 레이드 돌다가 찍혔던 시점에 그냥 아싸리 사무직으로 옮기든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든가 했어야지. 사실 너 살인 혐의 때문에만 일감 끊겼던 건 아니었잖아? 솔직히?”
“그랬지.”
“나 같으면 씨바 그럴 바엔 그냥 사무직으로 옮겼다. 꾸역꾸역 E급으로 헌터일 할 필요 있냐? 그거 레이드 열심히 뛰던 때도 벌이 시원찮았을 거 아냐. E급이 벌어봤자 얼마나 번다고.”
정작 윤성은 태연했지만 박미나를 포함한 몇 명의 E급 헌터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차태식은 앗차, 싶은지 잠깐 생각했다가 다시 떠들었다.
“길드 소속이었으면 주기적으로 월급이 나오니까 E급이어도 괜찮은데, 넌 아니잖아.”
대부분의 E급 동기들은 길드 소속이다.
“불규칙한 박봉으로 생활하다가 그것마저 일감 없어서 끊겼어? 아오, 나 같았으면 그냥 진즉에 때려치웠다. 왜 나한테 도와 달라 안 했어? 인마, 내가 너 하나 사무직으로 못 옮겨줬겠냐. 거 멍청하게 왜 가만히 있었어? 사무직 가면 일감을 안 줘도 월급은 조금씩 나왔을 텐데.”
발에 챌 정도로 많은 C급 나부랭이가 부서 이동을 어떻게 시켜.
정작 도와달라고 전화하면 피할 놈이 이래라저래라 인생 훈수를 두니 듣기가 좀 거북하다.
하지만 윤성은 내색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처음 온 동창회에서 싸움질부터 할 순 없지.
“그러게. 그냥 차희처럼 사무직으로 돌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지금도 안 늦었어.”
“뭐가?”
“이번에 짐꾼으로 레이드 갔다고 해도 앞으로 일감 잘 들어오리란 보장 없잖아. 게다가 잘 들어온다 해도 기껏해야 다시 포천 사건 때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데. 헌터로서 감도 많이 떨어졌을 테고. 재기할 수 있겠냐?”
“글쎄. 열심히 하면 되겠지.”
“에라이. 네가 열심히 해봤자 또 E급 던전 겁나 파고 다니겠지. 아냐? 맞아, 아냐?”
“뭐 E급이든 아니든 할 수 있으면 기회 되는대로 열심히 해야지.”
“아니, 하하, 이 새끼 웃긴 놈이네, 진짜.”
차태식이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E급인 네가 E급 던전 가지, 그럼 어딜 가냐? 그 꼴을 보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E급 던전들 줄창 털면서 무슨 등급업을 하겠다고. 그게 솔직히 말이 돼? 그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미련한 거야. 어? 꿈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목소리가 좀 커졌다. 차태식의 인상이 찌푸려지자 옆에 있던 동기 김윤석이 말렸다.
“야, 왜 이렇게 흥분했어? 좀 진정하…….”
“아니.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등급업을 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긴 있냐? 애초에 검사 실수로 E급 D급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거 말고 말이야.”
곧 보게 될 거다.
윤성은 속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직까진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차태식은 계속 쏘아댔다.
“길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은데, 아니잖아? 너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냐? 결혼도 하고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사무직으로 돌려서 돈 모아야지. 애초에 네가 E급으로 성공하려면 여기저기 선배들한테 쏘다니면서 인사도 하고 인마. 그래서 길드 들어갈 생각을 했어야지 뭔 E급 던전들만 줄창 털면서 등급업 한다고. 그게 처음부터 문제였어. 나 같았으면…….”
“뭐, 그럴 수 있지.”
적당히 대꾸해서 넘겨 버리려 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차희는 아니었나 보다.
그녀의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원래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다. 황동수한테도 박박 악을 쓰면서 대들지 않았던가?
게다가 차태식은 평소에도 E급 동기들을 은근슬쩍 무시하는 발언들을 종종 분별없이 쏘아대곤 했다. 안 그래도 그걸 못 마땅히 여겼던 차희가 이번엔 폭발해 버렸다.
그녀는 차태식이 들으라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윤성에게 빈정거렸다.
“난 윤성이가 E급이고 일감 끊기고 여기저기 딸랑딸랑 안 해도 자기 일 열심히 하니까 자기 잘난 맛에만 사는 C급보다 훨씬 멋지다고 생각해. 그치? 왜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나 몰라.”
“뭐?”
차태식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차희는 여전히 쌀쌀맞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왜? 뭐 문제 있어?”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나도 윤성이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오, 그게 생각해 준 거였어? 그런 걸 보고. ‘꼰대질’이라고 하는 거야! 네 꼰대질이 너무 심해서 난 방금 우리 부장님이 와 계신 줄 알았다, 야. 방금 퇴근했는데 출근한 줄 알았네! 그리고 대체 남 결혼 걱정은 왜 해주는 거야?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런 잔소린 안 해. 넌 결혼할 사람 있어? 인성 보면 생기지도 않겠구만, 네 걱정을 먼저 해야지.”
“아니, 무슨…….”
“너 평소에도 동창회에서 다른 사람들 무시하는 거 보기 안 좋았어. 술 먹고 다 같이 즐거운 자리에서 동기한테 꼭 그래야겠니? 누군 사무직 돌리는 걸 몰라서 E급 던전 200개를 털고 다녔겠어? 힘들 때 전화 한 통 안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열심히 사는 애한테 꼰대질을 해? 걱정을 해줄 거면 돈으로 해주란 말이야.”
차희가 속사포처럼 다다다 쏘아붙이자 차태식의 입이 다물어졌다.
‘래퍼인 줄 알았네…….’
윤성은 감동과 감탄을 동시에 느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차태식의 몹쓸 버릇에 대해서는 그동안 차희와 다른 동창들이 몇 번 어르고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오래전에 터져야 할 싸움에 차희가 총대를 메준 셈이다.
하지만 동창 중 차희를 돕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엔 차태식의 C급 헌터라는 직위는 꽤 컸다.
“아, 나,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이게 뭐가 꼰대질이야? 야, 강윤성. 내가 꼰대질했냐?”
화가 난 차태식이 윤성에게 소리를 질렀다.
“좀.”
윤성이 무뚝뚝하게 답하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에잇. 씨벌.”
“‘씨벌’ 말고 ‘미안’이 나와야지?”
차희가 빈정거렸다. 차태식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윤성은 책임감을 느끼고 중재하고 싶었지만 끼어들 각이 마땅찮았다.
차태식이 항변하기 시작했다.
“나도 솔직히 전화 한 통 안 했지만, 그동안 강윤성 도와준 사람 있냐? 얘 학교 다닐 때도 아싸였고 친구도 없잖아. 협회에선 찍혀 있었고. 솔직히 지가 자기 인생 관리 못 해서 조진 게 사실인데, 내가 C급으로서 몇 마디 조언한 게 뭐가 문제야.”
‘어떻게 이렇게 무례한 말을!’
차희가 깜짝 놀라더니 이를 으득 깨물었다.
표정이 살벌하다.
윤성은 차희를 말리려고 했지만 늦었다.
“윤성이 도와주는 사람 있어.”
차희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나. 복지부서잖아. 그동안 계속 도와줬어. 됐냐?”
“쳇.”
차태식이 짜증스럽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복지부서에서 돈 지원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민차희.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윤성이 개인적으로 돈 빌려줄 거면 나한테 얘기해라. 내가 빌려줄 테니까. 네 연봉이 뭐 얼마나 된다고 윤성이 돈을 빌려줘 빌려주길. 쟤 능력에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걸.”
차희는 뭐라고 받아치려다 멈추었다. 윤성을 힐끗 돌아보는 눈빛. 화를 참느라 고통스러워하는 게 고스란히 보인다.
‘600만 원 갚은 거 얘기하려다 멈췄구만.’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꽤 돈이 많은 편이니까. 그것도 세탁된 걸로.
“사실 차희가…….”
윤성이 대신 얘길 하려던 찰나였다.
“얘들아.”
차태식이 동기들을 불렀다.
“오늘은 더치하자. 나 못 사겠다. 짜증 나서.”
동기들 몇 명이 경악했다. 이렇게 사람이 찌질할 수 있다니…….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뒤에 나왔다.
“그럼 내가 살게.”
윤성이 말했다. 차태식,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기회를 주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