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레벨업 속도는 9.8m/s^2 024화
“세상에, 그걸 협회에서 단속을 안 하나요?”
“하는데 못 잡는 것이죠. 중국 은행을 통해서 자금을 세탁하기도 하고. 워낙 교묘하게 일을 진행해서 안 걸리게끔 한다더군요.”
“밀수라면 세금을 안 떼니까 협회보다 더 비싸게 팔 수도 있겠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째서요?”
“헌터님 같은 분들이 팔러 가는 거니까요. 보통은 이런 물건을 입수했다는 것 자체가 헌터로서 명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세금을 웬만큼 떼이더라도 헌터 협회에 판매하죠. 그리고 이런 걸 얻을 정도의 헌터들이라면 돈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재력이 충분하고요.”
듣고 보니 설득력 있다.
하지만 윤성은 아직 돈에 연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세금을 피하는 것이 좀 양심이 찔리지만 성장한 후에 내지 뭐.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봐요.”
떠나려는 윤성을 김수철이 황급히 붙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쇼, 헌터님. 저희 샵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 몇 개 있는데 혹시 쓰실 만한 게 있는지 봐주시죠.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김수철이 헐레벌떡 샵 안쪽으로 들어갔다.
윤성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잠깐 시간을 보냈다.
따릉-
현관 벨이 울리면서 중절모를 쓴 남자와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엇.”
윤성이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백마중 헌터님.”
“오, 윤성 씨. 또 뵙는군요.”
백마 길드의 수장, S급 헌터 백마중이 윤성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헌터의 품격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윤성이 물었다.
“저희 길드에서 하급 헌터들을 다수 모집 중인데, 그들의 장비를 맞추려고 왔죠.”
사실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고, 윤성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백마중은 빙긋 웃으며 윤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윤성 씨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장비를 맞추려고 왔죠.”
윤성이 새로 산 전투복과 무기를 보여주었다. 백마중은 주의 깊은 눈길로 물건들을 관찰했다.
“흠. 나쁘지 않지만 기껏해야 C급 헌터들 정도에서 쓸 법한 보급형 장비군요. 윤성 씨 정도라면 훨씬 더 세밀하게 가공된 상급 용품을 쓰실 수 있을 텐데요.”
“E급 헌터가 어떻게 그래요.”
윤성이 웃음을 터뜨리자 백마중도 따라 웃었다.
“어떻습니까? 저희 길드로 들어오시면 A급 장비를 지원해 드릴 수 있는데. 길드 창고에 보관 중인 물건들 말입니다.”
“아직도 저를 영입하려 하시는군요?”
“윤성 씨.”
백마중이 윤성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손을 잡아주면 A급 이하의 조무래기들은 윤성 씨에게 말도 못 붙입니다. 백마 길드가 직접 보호해 드릴 테니, 재각성을 공개하시죠.”
재각성.
그 단어에 윤성의 눈이 약간 날카로워졌다.
‘능력치들이 올라간 걸 기감으로 진단했고, 그 이유를 재각성이라 짐작하고 있군.’
“고마운 제안입니다만, 저는 이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데 지쳤습니다. 소일거리 하며 조용히 살고 싶군요.”
“핏빛야수 혐의 때문입니까?”
백마중의 물음에 윤성이 뜨끔했다.
하지만 백마중은 매우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당신이 재판받던 때는 E급이었던 것은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A급 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도 혐의가 부활하진 않을 겁니다.”
“정말인가요?”
“당시에 당신의 전투력을 심사했던 게 접니다. 당시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 증명할 수 있어요. 그깟 해묵은 혐의가 귀중한 상급 헌터의 재각성을 가로막아 인적 자원이 낭비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재각성 심사를 받아야 하나요?”
“그렇죠.”
윤성은 고민에 잠겼다.
안 된다.
협회의 각성 등급 심사는 기본적으로 버프가 모두 지워진 바닐라 상태의 심사다.
‘버프 클린업’이라는 마법을 걸어서 모든 버프와 디버프를 없애는 거다. 랜딩 버프도 그걸로 지워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버프 클린업이 먹힌다면 E급의 몸이 될 테고, 백마중은 어찌 된 일이냐고 추궁할 테고, J등급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되면 그대로 핏빛야수 혐의가 부활해서 법원으로 끌려가는 거다.
백마 길드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을 막아줄 방법은 없다. 재각성과 버프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니까.
‘살인할 땐 랜딩 버프를 갖고 있었고 재판 땐 버프를 리셋한 상태였다’라고 검찰 측에서 주장하면 어떻게 변호하겠는가?
“고맙지만 제겐 과분한 제안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과분하다뇨? 윤성 씨. 당신 주력 능력치가 800에서 900점 정도 된다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 S급 커트라인 바로 아래까지 간 상태 아닙니까? 그런 힘을 썩힐 생각인가요?”
900점? 아닌데. 기껏해야 500점대 정도인데.
뭐야, 이 사람 기감이 너무 뛰어나서 별명이 진단 기계라더니. 완전히 오판하고 있는데?
‘아!’
모든 능력치가 500을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능력치 총합만 따지면 2,000이 넘으니까 A급 최상위권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백마중이 이 정도로 안달복달 못하며 영입하려고 애쓰는 것이었군. A급 최상위권인 줄 알고!
“헌터님!”
샵 카운터 안쪽에 딸린 창고에서 김수철이 소리쳤다. 숨을 할딱이며 무언가를 잔뜩 안아 든 채 튀어나왔다.
“헉!”
백마중을 발견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 백마중 헌터님이 여긴 어쩐 일로…….”
“하급 헌터용 장비 계약을 좀 하려고 왔습니다. 50구 정도.”
“50구!”
오늘 무슨 경사가 난 거지? 가게 오픈한 후 역대급 대박 터지는 날이다.
“하지만 윤성 씨 거래부터 처리해주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아, 네, 넵!”
김수철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윤성에게 다가오던 그가 멈칫했다. 백마중이 E급 강윤성 이름을 어찌 알아?
“윤성 씨를 아십니까?”
김수철이 백마중에게 물었다.
“알죠. 제가 아끼는 분입니다. 저희 길드로 영입하려고 애쓰는 중이죠. 하지만 스탠다드가 좀 높으신 분이라. A급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안 오시더군요.”
우당탕-
김수철이 들고 있던 장비를 후두둑 쏟아버렸다.
백마중은 윤성을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두 번이나 영입에 실패해서 속상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한 표정이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노골적인 눈치 주기에 윤성이 대답했다. 백마중은 그제야 빙긋 웃으며 윤성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백마중은 김수철이 가져온 장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은 뭡니까?”
“저, 저희 샵에 있는 마법 물품들입니다. 보급형이 아니고 경매장에서 산 것들입니다.”
“윤성 씨한테 팔려고요?”
“그렇습니다.”
“윤성 씨가 필요하다는 것들 전부 주십쇼. 계산은 내가 할 테니.”
백마중이 비서에게 카드를 하나 건넸다.
“이거 거래 끝나고 계약 견적 잡을 때 불러요.”
김수철이 가져온 물품들은 마법 반지, 망토, 목걸이와 팔찌였다.
윤성은 하나씩 물건들과 품질보증서들을 살펴보았다.
<세텔론의 반지 : 마법 공격력 6% 상승.>
<니담 망토 : 이동속도 4% 상승>
<보호의 목걸이 : 쿨타임 4시간, D급 방어막 마법 시전>
<카인 브레이슬릿 : 힘 15 증가>
전부 나쁘지 않지만 망토는 좀 걸리적거릴 것 같고.
“백마 길드에서 사주는 거죠?”
윤성이 비서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빼먹을 수 있는 건 빼먹어야지.
“반지와 목걸이, 브레이슬릿 주세요. 얼맙니까?”
윤성의 질문에 김수철은 일생일대의 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연산이 지나갔다. 좀 비싸게 불러도 백마 길드 정도면 그냥 사줄 테지만 50구나 되는 장비 계약을 앞두고 바가지요금을 씌울 순 없다.
“셋 합쳐서 1억만 주십쇼.”
정가보다 약간 비싼 정도. 김수철은 윤성과 비서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여기 있습니다.”
비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백마 길드에게 1억은 푼돈이다. 특히 영입 대상인 헌터 앞에서 씀씀이를 보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비서가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를 하면서 김수철은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윤성이 흐뭇하다.
김수철한테는 옛날부터 신세 많이 졌지. 랜딩 명소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윤성은 김수철과 비서에게 인사하고 가게 문을 닫고 나섰다.
가게 앞에 고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창문이 내려가더니 안에서 백마중이 손을 흔들었다.
“신세 졌습니다.”
윤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 떠났다.
***
다음 날 아침, 윤성은 마정석을 가지고 차이나타운으로 이동했다. 혹시 몰라서 차이나타운의 높은 빌딩들을 몇 개 검색해 두었다. 놀랍게도 그중 하나가 밀수업자들의 본산이었다.
C+타워. 400미터. 70층 건물이며 마정석 샵이 입점된 곳은 50층이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에서 대놓고 밀매라니.
타워 앞에 도착한 윤성은 A급 마정석을 가지고 가면 꽤 환대받을 거라고 은근히 기대했지만 착각이었다.
오히려 타워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50층에 볼일이 있다고 하니까 가드가 막은 것이다.
“죄송하지만 몇 급이십니까?”
“E급입니다.”
“50층은 B급 이상 마정석을 취급하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헌터님께선 어떤 업무로 마정석 샵을 방문하려 하십니까?”
입구의 가드가 물었다.
윤성은 A급 마정석을 배낭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이걸 팔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한 번에 출입 허가가 떨어지진 않았다. 가드들은 어딘가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고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윤성에게 물었다.
“어디서 났습니까?”
“여긴 출처를 묻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저희 샵은 출처를 묻는 것이 ‘매뉴얼’입니다. 예컨대 하급 헌터가 대형 길드의 물건을 빼돌려서 여기서 판다거나. 그런 경우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캬, 속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매뉴얼’에 힘을 줘서 얘기한 것은 ‘절차상 그렇지만 당신 하는 것을 봐서 출처를 안 물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어차피 국가적 재물을 밀매하는 것이라서, 공사인 협회와는 사이가 나빠져도 상관없지만 대형 길드와 마찰이 생기는 건 사업하기 곤란하니 안 된다는 뜻이다.
즉, 길드에서 훔쳐온 물건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해주면 매뉴얼을 어기고 사주겠다는 말.
그러나 사복 헌터 경찰이 조사차 나온 거라면 “너네 밀매하지?” 하고 추궁하기는 어려운 답변이다. “출처를 묻는다”고 대답하는데 뭐라고 추궁을 하겠는가.
과연, 이렇게 장사를 하니까 협회가 못 잡는구나.
“레이드를 뛰어서 얻은 겁니다.”
“흠.”
윤성의 대답에 가드들이 다시 의심쩍은 눈빛을 했다. 누가 봐도 윤성은 잘 쳐봐야 D급 헌터였다. 장비를 볼 때 돈이 좀 있는 D급. 본인 말로는 E급. 이런 귀한 마정석을 입수할 만한 레벨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거래처에서 고민할 일이다. 입구의 1차적 스크린은 형식일 뿐, 사실 가드들에게 A급 마정석을 가져온 고객을 돌려보낼 권리는 없다.
“들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