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레벨업 속도는 9.8m/s^2 018화
포천 사건 첫 공판 때 대거 참석했던 S급 헌터들 중에 백마중도 있었다. 당시에 재판 과정에서 강윤성의 등급 재심사를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으니까.
당시에 분명 E급이었던 헌터가 갑자기 A급 수준으로 뛰어오른 것은 백 퍼센트 재각성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등급 재심사를 안 받는다는 게 웃기는군. 핏빛야수 때의 혐의가 부활할까 봐 그런 건가? 일단은 이쪽 사정을 모르니까 비밀을 맞춰준다. 백마 길드로 스카우트한 후에 재심사를 권유해야지.’
“백마 길드의 A급 헌터에 대한 대우는 다른 대형 길드들보다 훨씬 좋습니다. 레이드를 안 해도 연봉 3억을 기본급으로 보장합니다. 물론 레이드 수익은 길드에 내는 10%를 제외하고 전부 가지실 수 있고요. 10%를 떼인다고 해도 세금 감면 혜택 때문에 실수령액은 프리랜서일 때보다 더 높고요.”
백마중이 품속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게다가 신축 아파트에 입주권도 드립니다. 코르소, 카다시안 부부와 홍창민, 표진수, 김진명 같은 유명 A급 헌터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곳이죠. 그리고…….”
“고맙지만 됐습니다.
윤성이 딱 잘라 거절했다.
너무 단호한 말투여서 백마중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뭐, 뭔가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습니까? 염두에 두신 다른 길드가 있다거나.”
“아뇨. 그냥.”
윤성이 황동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황동수 선배도 그곳 소속 아닙니까?”
“입단하려고 하셨는데 몇 가지 조건이 안 맞아서 아직 저희가 맞이하진 못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받으실 수도 있겠군요. 제가 황동수 선배한테 감정이 좀 있어서요. 저는 됐습니다.”
황동수의 얼떨떨한 표정.
그는 백마 길드에 입단하려고 상당히 애를 썼다. 하지만 오랜 헌터 경력에 비해 레이드 회수가 너무 부족했고 근접 계열이라는 이유로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다.
현재는 마법 계열만 뽑는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인사 담당이었던 A급 표진수는, 연봉이나 복리후생에서 약간 떨어지는 조건의 계약을 쓴 후에 A급 근접 계열의 자리가 비면 최우선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황동수가 자존심이 상해서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윤성은 길드의 최고 경영자가 직접 최고의 대우로 데려간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는 건 강윤성이 백마 길드에서 찾는 마법 계열 인재라는 말인가? 하지만 아까 이놈 근접형 상급 헌터처럼 힘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아니, 그보다, 이놈은 일단 E급 헌터잖아!
“설마 제가 직접 영입을 했는데 실패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시다니.”
백마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안해 주신 것은 감사히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지요.”
백마중이 윤성에게 인사했다.
“잠깐만요, 대표님!”
황동수가 끼어들었다.
“지금 강윤성 이놈이 A급이라는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마중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음.”
“옛날 강윤성 씨의 등급 심사를 제가 했습니다. 윤성 씨의 능력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제가 정확히 알아요.”
백마중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놈이 A급인 것을 아직 아웃팅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말 잘못 했으면 온갖 길드에서 다 찾아갈 테니까. 다음에 다시 스카우트할 때까진 E급으로 살게 내버려 둬야지.
“윤성 씨는 E급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가능성이 보이는군요. 아무튼 황동수 씨가 오늘 일에 대해 밖에서 쓸데없는 소리 않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떠나는 백마중의 뒷모습을 보면서 윤성이 황동수에게 말했다.
“아직 차희한테 볼일 더 있습니까?”
“어……. 어? 아, 아니. 이제 됐네.”
“그럼 가보시죠. 제가 볼일이 있어 먼저 왔지만 동수 선배 때문에 제대로 얘길 못 했군요.”
“어, 으응…….”
황동수는 붉어진 얼굴로 부서를 빠져나갔다.
윤성은 김시윤 차장을 힐끔 돌아보았다.
“차장님이 차희의 상관이시죠?”
윤성이 말했다.
“전에 제 빚을 구실로 황동수 씨의 비서직에 절 붙여주셨던 것. 아직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차장님한테 감정은 없으니까. 차희가 좋은 분이라고 하더군요.”
윤성이 김시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다음 주 주말쯤, 차희랑 저녁을 먹기로 했거든요. 그때도 차희가 차장님이 좋은 분이라고 얘기할 거라 믿어요.”
“음.”
김시윤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마중이 편들어주고 나니까 상황 처리가 편하네.”
윤성이 차희에게 속닥거리며 웃었다.
차희는 몹시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대체 뭘 어쩐 거야? 진짜야?”
“A급? 그거 나중에 얘기해 줄게. 언젠간.”
“아니. 다음 주 저녁 약속……. 진짜냐구.”
그게 포인트였냐?
김시윤을 협박하려고 대충 둘러댔던 것이지만,
“뭐, 난 시간 많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차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다음 주 금요일에 우리 동창회 있어.”
“아. 그랬지 참.”
전에 그런 얘길 했던 것도 같다.
“그럼 동창회 갔다가 그 다음 날, 토요일에?”
“좋아!”
차희가 환하게 웃었다.
“맛집 찾아놓을게.”
5. 핏빛야수
3일 후. 윤성은 송파구 B급 던전 게이트 앞에서 코르소의 레이드 팀에 합류했다.
코르소와 카다시안 킴.
매우 유명한 A급 헌터 부부지만 윤성은 두 사람 다 처음 보았다.
‘카다시안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군.’
뭐랄까, 고혹적인 외모다. 과연, 미국의 잘나가는 A급 헌터가 한국에 이민 올 정도.
반대로 코르소는 근육질에 빡빡이다.
‘딸이 납치되면 권총 한 자루 들고 갱단 하나 전멸시킬 것 같은 외모인걸.’
“당신이 강윤성입니까?”
코르소가 윤성과 악수를 하며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코르소. 이 사람은 나의 부인, 칼-다씨얀 킴.”
네이티브 발음 소름 돋네…….
윤성은 코르소와 인사한 후 B급 헌터 둘을 살펴보았다. 송민구와 김찬열. 둘 다 꽤 이름 날린 헌터들이다. 윤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지. 굳이 친해질 마음도 없다.
윤성은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쿠우우우-
흘러나오는 마력은 체감상 동굴 고블린이 나오던 던전보다 한 수 아래다. A급 헌터가 둘이면 무난히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셋이니까 뭐 애들 장난 수준이지.’
윤성은 즐거운 기분으로 리더 코르소에게 말했다.
“렛츠고.”
“나 한국어. 잘 합니다. 유 돈 햅투 스픽 잉글리쉬. 오케이? 코리안만 사용해도, 나는 다 합니다. 이해.”
“잘 못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잘 하니 걱정 마세요.”
카다시안 킴이 말했다.
“슬슬 들어가죠. 전부 모였으니까.”
코르소가 장검을 빼 들고 앞장섰다.
***
늪지다.
종아리까지 오는 탁한 물. 기이하게 구부러진 맹그로브 나무들. 울창한 수풀.
아마존 밀림의 한 부분을 떼어다 놓은 것 같다.
윤성이 입을 딱 벌렸다.
하급 던전은 거의 대부분 동굴형이지만 상급 던전 중 어떤 것들은 이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던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거대한 기암괴석과 나무들 사이로 굽이굽이 구부러진 물이 느린 유속으로 천천히 흘렀다.
“와아.”
윤성이 감탄하자 코르소가 눈을 찡긋했다.
“쏘 뷰티풀.”
“가자. 코르소.”
카다시안이 앞을 가리켰다.
“어떤 몬스터가 나올까요?”
송민구의 질문.
카다시안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밀림 타입은 보통 셋 중 하나에요. 1번, 거대한 독충 타입. 만약 그랬다면 이미 자잘한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을 거예요. 2번, 육지 맹수 타입. 재규어와 비슷하지만 크기는 다섯 배 이상인 재크로미아 같은 마수가 출현하는데 가장 까다로운 타입이죠. 하지만 이 타입이었다면 저 나무들에.”
카다시안이 근처의 맹그로브 나무들을 가리켰다.
“영역표시 자국이 있었을 거예요. 마수들도 마력이 강한 게이트 인근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고 싶어 하니까.”
“그럼 3번은요?”
윤성이 물었다.
“파충류 쪽이죠.”
“윽.”
랜딩 능력을 각성했던 날, 폐건물에서 싸웠던 카멜리가 생각났다.
“그나마 이쪽이 제일 괜찮습니다.”
김찬열이 말했다.
“독충 타입이었다면 독 때문에 고생했을 테고, 재크로미아라면 날쌔서 잡기 어려우니. 파충류 쪽이 제일 수월해요.”
“하지만 독충이어도 카다시안 헌터님이 계시니까 해독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재크로미아든 파충류든 코르소가 있으니까 다 잡아 족칠 수 있죠.”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A급이 둘이나, 아니. 셋이나 있는데 아무리 어려운 타입이 걸린다 해도 뭐 어쩌겠어.
“하지만 파충류 계열이어도 문제. 있습니다. 가끔씩은.”
코르소가 말했다.
스르릉-
그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마정석으로 강력하게 가공된 마법 장검.
코르소는 장검을 똑바로 세워 들었다. 그의 눈이 마력으로 빛났다.
코르소는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오러블레이드 발동!>
-콰아앙!
그가 세로로 휘두른 장검이 거대한 붉은 색 파동을 날렸다. 파동은 늪을 가르며 날아가 저 끝의 나무를 쩍 갈랐다.
“키약!”
나무 바로 아래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질렀다.
“악어?”
A급 부부 둘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워낙 움직임이 없고 색깔이 바위와 똑같아서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그것은 거대한 악어였다.
“구스타프.”
카다시안이 말했다.
“파충류 계열 중에선 가장 강한 적입니다. 무엇보다 늪지에 숨어 있을 수 있어서 위험하죠.”
“그럼 어떡해요?”
윤성이 묻자 코르소가 씩 웃었다.
“돈 워리. 날 믿습니다.”
그가 첨벙첨벙 물을 발로 걷어차면서 전진했다.
“구스타프는 위험합니다. 벗, 매우 본능적입니다. 상대가 자기보다 센 걸 알면 안 뭅니다. 유 노우 왓 아이 민? 내가 앞장서면 그들은 도망갑니다. 롸잇?”
“오, 오케이.”
윤성과 김찬열, 송민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랐다.
하지만 얼마 진행하지 않았을 때,
“어라.”
윤성이 움찔했다.
“왜?”
“왓쓰업?”
송민구와 코르소가 윤성을 돌아보았다.
“음.”
윤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건너편에서 막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벌써 보스 방에 도달했을 리는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 있어요?”
카다시안이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걸 A급 헌터 중 하나가 느껴줬으면 좋겠는데.
중요한 정보를 알고도 말하지 못하니 답답하다.
‘5분만 더 진행해 보고 그래도 눈치 못 채면 그때 알려주자. 하지만 A급이 둘인데 설마 일 터지기 직전까지 모르진 않겠지?’
윤성은 카다시안을 믿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약 3분 정도를 더 진행한 후, 윤성의 바람대로 카다시안이 코르소를 멈추었다.
“잠깐만, 코르소. 스탑.”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적으로 감각 능력은 마법 계열 헌터가 근접 계열보다 훨씬 높다. 힐러인 카다시안의 기감은 코르소보다 한참 위였다.
“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