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레벨업 속도는 9.8m/s^2 009화
“네?”
“오늘 본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어요?”
“어…….”
하긴 얘기한다고 누가 믿겠냐만. 어차피 윤성의 이름도 모른다. E급 헌터는 발에 챌 정도로 많다.
윤성은 자리에서 훌쩍 점프했다.
약 4미터 높이로 쌓인 빌딩의 잔해를 한 번에 넘었다. 이미 리나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점프하면서 윤성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도약하여 추락할 때 랜딩 자세를 취하면 버프가 생길까?
그는 건물 잔해 반대편에 착지하기 전에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최종 속력=8.74㎧, 낙하 거리=3.95m, 낙하 시간=0.90s>
<랜딩 성공!>
<랜딩 버프 : 이미 상위 버프가 존재합니다. 남은 시간 22초. 이미 상위 랜덤 스킬이 존재합니다. : 염력 남은 시간 22초>
되긴 되네.
이건 또 하나의 새로운 수확이다. 만약 랜딩 버프가 2초 정도 남았을 때 온 힘을 다해서 점프하면 어느 정도 랜딩 버프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힘껏 점프하면 10미터 정도는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10미터에서 랜딩하면…… 별로겠군. 생각해 보니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신촌을 빠져나온 윤성은 곧장 마정석 샵을 찾아갔다. C급 마정석을 올려놓자 직원의 눈이 커졌다. 동네 조그만 마정석 샵에서는 가장 큰 물건이다.
“이 정도면 천사백만 원 정도 쳐 드릴 수 있습니다. 세금 떼고 헌터님이 받으실 돈으로요.”
직원이 탐스러운 듯 마정석을 더듬으며 말했다. 윤성은 계좌번호를 써주었다. 입금되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마정석을 넘겼다.
이 돈으로 할 일이 셋 있다.
하나는 차희의 돈을 갚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밀린 집 월세를 내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이모 댁에 송금하는 거다.
윤성의 여동생 둘은 이모 댁에 얹혀산다. 윤성이 동생들을 부양할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헌터 학교를 졸업한 후 윤성은 매달 100만 원씩 이모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그걸 못 한 지 세 달이 되었다.
윤성은 먼저 300만 원을 이모에게 송금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석 달 치 돈입니다.]
동일한 메시지를 집주인에게도 보냈다. 월세는 50만 원이므로, 실시간으로 줄어든 돈은 이제 900 정도가 남았다.
자, 그럼 다음에는 차희의 돈을 갚아야지.
윤성은 재빨리 차희의 계좌번호로 600만 원을 찍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손가락을 멈추었다.
차희가 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혼자 땅굴벌레를 잡았다고 하면 의심받을 테고, 협회에서는 등급 테스트를 다시 하려고 할 거다. 차희에게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하면 지켜주긴 할 테지만.
아무튼 이렇게 갑자기 입금을 할 수는 없다. 만나서 얘길 해봐야겠군.
J등급을 숨기려니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꽤 있을 듯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자.
버프로 상승된 능력치를 토대로 빠른 레벨업을 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고속 성장을 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핏빛야수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언젠가 그놈을 처치하는 거다.
하지만 그때까지 차희에게는 어떻게 돈을 갚지?
지원 요청을 받고 온 황동수는 얼이 빠진 얼굴로 현장에 서 있었다.
집게벌레는 물론 C급 땅굴벌레까지 이미 전멸해 있었다.
E급, D급 헌터들은 전부 다 밀폐 벙커로 대피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 건 아니다. 제삼자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대체 누가?
땅굴벌레의 크기와 독샘을 볼 때 이 녀석은 C급에서도 최상위권이다.
C급 헌터라도 이놈을 잡으려면 5인 이상이 모여 레이드를 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벌레들의 시체에 남아 있는 것은 일정한 크기의 아이언피스트의 흔적뿐이다. 파이어볼이나 인시너레이트 같은 마법을 사용한 흔적도, 장검이나 방패를 쓴 흔적도 없다.
즉, 이것은 한 명의 헌터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B급. 어쩌면 A급일지도 모른다.
“어떤 놈이 협회에 보고도 안 하고 이런 짓을 했지? 어이, 지금이라도 보고 들어온 것 있나?”
황동수가 함께 동행한 협회의 C급 헌터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CCTV 있나?”
이번엔 현장에 대해서 리포트를 하던 D급 헌터에게 질문했다.
“아, 옛!”
“B급이나 A급이면 내가 아는 얼굴일 텐데. 대체 어떤 놈이 날 헛걸음 시켰는지 한 번 보자구.”
그는 재빨리 황동수를 신촌의 파출소로 데려가 신촌 거리의 CCTV 녹화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화질이 안 좋고 화면이 너무 작아서 아이언피스트로 벌레들을 두들겨 팬 헌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누군지는 못 알아보겠군. 근접 전투형이라는 것 말고는.”
황동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동차 번호판 같은 게 찍힌 건 없나? 저 녀석이 CCTV 화면에 잡히기 시작할 때부터 보게 좀 더 앞으로 당겨봐.”
D급 헌터는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앞 시간대로 당겼다.
“자, 저기, 잠깐! 스탑! 멈춰!”
황동수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진하게 번졌다.
화면에서는 박살 난 현대백화점의 1/3 정도 되는 거대한 잔해가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그쪽을 향해 손을 뻗어서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염…… 력……?”
황동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도 안 돼. 벌레들을 때려잡던 아이언피스트의 전투력을 볼 때 저 녀석은 분명 힘과 순발력을 중점으로 한 근접 전투형이다. 그런데 염력을 쓴다고? 그것도 저 정도 크기의 잔해를 떠받칠 정도라면 마법 계열 B급 헌터 수준이다. 저 남자가 근접 전투형이 맞다면 S급 헌터라도 이런 건 못한다.
“더. 더 앞으로 당겨봐! 어서! 저놈이 어디서 나온 건지 봐야겠…….”
화면을 앞으로 당기자 남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정지!”
황동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여기서부터 1초씩 뒤로 천천히. 옳지……. 이런 X바…….”
남자가 나타나는 절묘한 순간을 땅굴벌레가 가렸다. 그런데 땅굴벌레가 가렸다고 해도 녹화 자료를 앞뒤로 움직여보면 걸어오는 장면이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닌 이상 갑자기 저 자리에 뿅 하고 나타날 수 없는데. 진짜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순간이동이라도 쓰는 건가?
***
차희는 퇴근하다가 부재중 통화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성이었다.
‘웬일로 사무실로 전화를 걸지 않고 휴대폰으로 걸었지?’
“여보세요?”
-차희 씨, 퇴근하세요?
“네. 지금 가려고요.”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무튼, 시간 좀 있어요?
“네. 시간은 있는데.”
-지금 협회 정문 앞이에요.
차희는 깜짝 놀라며 두리번거렸다. 저쪽 벤치에 윤성이 앉아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술이나 한잔할래요?”
윤성이 웃으며 말했다. 차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좋아요.”
윤성은 차희를 데리고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했다. 작은 전골을 하나 시키고 차희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웬일이에요? 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녔어요?”
협회에 입사한 후에 몇 번 있었던 입사 동기 모임 때도 한 번도 윤성을 본 적 없었다. 헌터 스쿨에서도 어디 가서 노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런 일중독자가 갑자기 술을 마시자니?
“그냥 마시고 싶었어요.”
윤성이 웃으면서 답했다.
“윤성 씨.”
“네.”
차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살하면 안 돼요.”
한참 힘들 때 몇 번 유혹이 있긴 했습니다만……. 이젠 상황이 다르지.
“그런 짓 안 해요.”
“근데 왜 갑자기 술이에요? 이상하네, 정말.”
“차희 씨, 저 믿어요?”
“네? 믿으니까 600만 원이나 빌려줬죠. 당연하죠. 저 신입으로 입사하고 여태 모은 돈 1,500밖에 안 되는데 그중에서 절반을 빌려준 거라고요.”
“저도 차희 씨 믿어도 돼요?”
“그럼요. 우리 동기잖아요?”
“그랬지. 동기였죠.”
두 사람이 잔을 한 번 부딪쳤다.
“우리 동기가 누구누구 있죠?”
“음.”
차희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세었다.
“민성이, 태식이, 준수, 동인이, 한나, 영이……. 꽤 많죠. 지금 헌터로 뛰는 사람도 좀 있고. 헌터 협회에서 사무 보는 사람은 꽤 많고.”
“그 헌터 중에선 제가 꼴찌인가요?”
차희가 피식 웃었다.
“아니거든요? 동인이가 꼴찌예요. E급 랭킹에서도 윤성 씨가 높다고요.”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에요? 동인이는 어쩌구.”
윤성은 당황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차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들은 술을 몇 잔 더 나누었다. 그리고 한 병 반을 비웠을 때, 차희는 벌써 조금 취기가 오른 모습이었다.
“차희 씨.”
“응.”
차희가 피곤한지 벽에 머리를 기대놓고 반쯤 풀린 눈으로 윤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 놓은 거 보니 헤롱거리는 모양이군.
“정말로 제가 차희 씨 믿어도 되죠?”
“그럼~! 나 아니면 동기 누가 챙겨!”
윤성은 휴대폰을 들어서 600만 원을 입금했다. 그녀의 휴대폰에 띵! 하고 문자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차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이 확 깬 표정이다.
“뭐예요, 이거?”
차희가 물었다.
“불법적으로 번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요.”
“그럼요?”
“믿어도 된다면서요? 부탁이니까 지금은 묻지 말아주세요. 돈 생겼더라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무에게도 출처를 알리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음.”
차희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윤성과 문자 메시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불법적인 게 아니라곤 했지만 진짜 믿어도 되는 걸까.
“정말 어디다 신장 하나 떼놓고 온 거 아냐?”
차희가 인상을 썼다. 그녀가 윤성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티셔츠를 위로 당겼다.
“뭐, 뭐 하는 거야!”
놀란 윤성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차희는 헤실헤실 웃었다.
“후후. 난 윤성이가 언젠가 성공할 거라고 봐. 학교에서도 항상 열심히 했었구. 헌터 된 후에도 항상 열심히 했구.”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등급 상승을 어떻게 하냐고 비웃으면서.”
“그 녀석들이 성격이 못돼먹어서 그런 거지. 일감 안 끊겼으면 지금쯤 D급 됐을 수도 있찌! 왜 우리 윤성이 욕해!”
“아무튼 나에 대한 건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요?”
“응. 응.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렸다. 생각 이상으로 취한 것 같다.
“시간 늦었는데 일어나죠.”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차희는 비틀거리면서 윤성을 따라 카운터로 이동했다. 그녀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아니에요. 이건 내가 살게요.”
윤성이 카드를 내밀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다구!”
“아까 갚은 거 보면 몰라요?”
“우음…….”
차희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윤성을 흘겨보았다.
그래도 안 알려줄 거다. 차희는 남의 비밀을 쉽게 누설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밀이라는 것은 혼자만 알고 있을 때 ‘비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 맞아. 오늘 신촌역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던전에서 나온 곤충형 마수들을 전부 퇴치했대!”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윤성은 간신히 침착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그…… 래요?”
“응. 근데 아이언피스트로 다 때려잡았는데 염력도 쓰는 사람이래.”
“그런 건 어떻게 안 거예요? 그리고 남자인지는 어떻게 알았대요?”
“CCTV가 있었나 봐.”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