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레벨업 속도는 9.8m/s^2 002화
1. J등급 헌터
경기도 포천의 한 D급 던전. 보스 방 앞에서 레이드 팀이 장비를 점검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부 D급, C급으로 이루어진 레이드 팀에는 E급 헌터가 한 명 포함되어 있다. 어제 협회의 지시를 받고 합류한 ‘강윤성’이다.
E급 헌터가 상위 던전에 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짐꾼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지금처럼 전투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팀의 리더 C급 탱커 송민석은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녀석’
강윤성의 별명은 ‘던전 성애자’ 헌터 학교를 졸업한 후 지난 4년 동안 무려 220개가 넘는 E급 던전을 클리어한 경력 때문이다. 이는 어렵다기보다는 힘든 일이다.
대충 계산해 봐도 1년에 50개 이상인데, 명절 연휴 없이 최소한 주 1회 이상을 꼬박꼬박 돌았다는 소리다.
진짜 미친놈 아닌가? 게다가 강윤성은 상급 던전들에 짐꾼으로 따라간 경력도 화려하다. 이쯤이면 ‘과로’ 같은 단어로 설명되는 수준이 아니다.
던전의 음산한 공기를 즐기는 변태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지만, 강윤성 본인이 밝힌 이유는 단순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각성한 후 판정받는 헌터 등급은 한 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상태창’을 볼 수 있는 상급 헌터들의 말에 따르면 ‘레벨’이라는 게 존재하고 레이드를 통해 올릴 수도 있단다.
게다가 레벨이 올라가면 마치 게임을 하듯 포인트가 생겨서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레벨 상승을 거듭해서 헌터의 ‘등급’ 자체가 바뀔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어쩌면 바가지로 강물을 퍼다 모아서 바다를 만들겠다는 것과 비슷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E급 헌터인 강윤성은 상태창을 아예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레벨업이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다.
한마디로 모든 게 미지수.
그래도 강윤성은 E급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E급 던전을 200개 넘게 클리어했지만 여전히 E급이다. 하지만 D급 던전을 클리어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강윤성.”
휴식을 취하던 강윤성을 리더 송민석이 불렀다.
“아까부터 자꾸 앞으로 나서던데. 진짜 죽고 싶어? 이번 던전이 이상하게도 마물이 별로 없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너 이미 목숨 나갔어.”
“죄송합니다.”
“D급 던전에 왔다고 네가 D급인 게 아니야.”
송민석이 기분 나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C급 헌터도 긴장해야 하는 순간들이 종종 있는 곳인데 E급 따위가.’
등급 업을 하고 싶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사실 송민석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동료 헌터들이 그를 싫어했다.
‘누군 등급업 하기 싫어서, 게을러서 이러고 있나? 보이지도 않는 상태창에서 레벨업을 쌓아서 등급업을 하겠다? 현실 감각 떨어지는 팔푼이의 허황된 꿈이다.’
송민석이 잔소리를 이었다.
“사냥 욕심에 눈이 먼 동료는 판단 못 하는 리더만큼 위험한 거다. 보스 방에서만이라도 내 앞으로 나가지 마. 네 위치는 안은실 양의 옆이다.”
그가 D급 힐러를 가리켰다.
강윤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본심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앞서 나갔어, 트집 잡긴.’
지난 4년간 받아온, 팀워크를 깬다는 시기 어린 힐난들 앞에서 그는 떳떳하다. 혼자 무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포지션을 지키며 제 할 일을 똑바로 해냈다.
그러니까 220개가 넘는 던전을 무사히 공략해낸 것 아닌가. 사고를 쳤다면 중간에서 협회가 제재하지 않았을까? 던전 클리어 경력 자체가 증거다.
하지만 이런 힐난은 익숙하다. 그냥 네, 네, 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윤성은 잡념을 털어버렸다.
손톱만 한 마정석이 박힌 검을 꽉 쥐며 보스 레이드 준비에 집중했다.
그러나 팀은 던전의 보스를 잡을 수 없었다.
보스 방에 보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있나? 보스 방에 보스가 없다니? 매우 드문 확률로 보스가 방을 떠나는 경우들이 있다고는 하던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강윤성이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뭔가를 떠올린 그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뭐라고?”
송민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어딜 나간다는 거야? 보스는 없어도 이 방에 뭔가 숨겨진 보물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어. 찾아볼 생각은 않고.”
“이 던전 유형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셨어요?”
“동굴 촉수…….”
특이하게도 던전 내에 마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이 동굴의 타입은 동굴 촉수다.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먹잇감이 접근하면 물어뜯는 잠복형 마수.
문제는 그것들이 ‘식물형’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스는 원래 보스 방을 떠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 이 던전의 보스는 ‘안’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못’ 떠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없다는 것은.
“누군가 보스를 없앴어요…….”
헌터가 잡았다면 협회에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불과 사흘 전에 나타난 신생 던전인 이곳에 그동안 출입한 헌터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던전의 보스를 없애버린 것은…….
“마수가 한 거예요.”
강윤성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의 정확한 급수는 파악되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적어도 D급 보스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설마 핏빛야수가?”
누군가가 말했다. 헌터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말도 안 돼.”
송민석이 딱 잘랐다.
“그건 뜬소문일 뿐이야. 상식적으로 그런 게 있겠냐? 다들 헛소리 그만하고 짐 챙겨. 완전 허탕 쳤군. 복귀하자.”
그가 장검을 질질 끌면서 앞장서 보스 방을 나섰다. 입구에서 꺾이는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싸각
소름 끼치는 절단음.
송민석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눈도 아직 감지 못한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서 보스 방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
“꺄아아악!”
“뭐야!”
“어떤 새끼야!”
모두가 비명을 지르면서 무기를 빼 들었다.
“시발…….”
등골이 오싹한 감각에 강윤성이 욕을 뱉었다.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적을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그 위압감이 전해진다.
이건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조르고 졸라서 짐꾼 신분으로 A급 던전에도 몇 번 들어가 봤던 그다.
어깨너머로 보았던 A급 던전의 보스들도 전율이 느껴지는 괴물들이었지만 이건 규격 외의 존재다.
핏빛야수.
인간처럼 던전을 돌면서 마수들을 소탕하고 장비를 모으는 S급 마수. 그게 뜬소문이 아니었다.
검은색 가죽 갑옷 같은 것으로 무장한 인간형의 마수였다. 양손의 손가락엔 길고 날카로운 클로가 달려 있었다. 입안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 눈에선 붉은 광채가 번들거렸다.
던전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
핏빛야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죽은 촉수 괴물의 보스.
사체가 질질 끌려오며 검은색 진물을 흘렸다.
-촤아악!
핏빛야수는 보스의 사체를 방 한가운데에 던졌고 속에서 마정석이 굴러 나왔다.
마치 레이드를 뛰다가 우연히 같이 들어온 팀들끼리 전리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느낌이다.
핏빛야수는 할 수 있으면 마정석을 가져가 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으…… 흐으으!”
그러나 헌터들은 벌써 전투 불능이다.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이 정도 마수를 상대하려면 A급 헌터로도 부족하다.
S급 헌터가 와야만 하는 상황. 레이드 팀으로선 졸도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다들 정신 차려요!”
윤성이 소리쳤다.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 역시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 어영부영했다간 순식간에 전멸이다.
윤성의 목소리에 팀의 부관인 C급 헌터 현철의 눈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이다.
윤성이 현철과 동료들에게 말했다.
“제가 정면으로 달려들면 현철 씨가 화염구를 날려요. 그때 다른 분들이 동시에 양옆에서 타격하는 겁니다.”
“네가 정면으로?”
“탱커인 리더가 없잖아요! 여기서 공격력이 제일 떨어지는 제가 몸으로 받아주겠단 겁니다. 그게 제일 효과적이니까!”
“으으…….”
다들 난감한 표정이었다.
젠장. 물론 못 믿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입니다!”
윤성이 정면으로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윤성의 백업으로 나서지 않았다.
핏빛야수의 칼날 앞에 몸을 던지면서 윤성은 보고 말았다.
그의 양옆으로 출구를 향해 도주하는 헌터들. 공포에 질린 옆얼굴들.
-쩍!
핏빛야수의 주먹에 얻어맞은 윤성이 휘청거렸다. 코피가 터졌다.
클로를 맞을까 봐 황급히 뒤로 몸을 뺐지만, 핏빛야수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싸악!
핏빛야수의 클로에 달아나던 D급 헌터 박윤수가 전투복째로 두 동강이 났다.
“으악!”
그 옆에서 도망치던 부관 현철이 공포에 질린 채 화염구를 날렸다. 포식자에게 붙잡힌 먹잇감의 최후의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쾅!
화염구는 핏빛야수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으나 야수는 조금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쓱- 소리와 함께 현철의 목이 떨어졌다.
전력 차는 압도적이고 팀은 무력했다.
핏빛야수의 클로에 비하면 헌터들이 입은 조악한 전투복이나 방패 따윈 있으나 마나였다.
가위로 종이 공예를 하듯이 싹둑싹둑 잘려 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강윤성은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쿵.
힐러 안은실이 주저앉았다. 전부 즉사해 버리니 힐링을 할 틈이 없다.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핏빛야수를 윤성이 막아섰다.
“야압!”
윤성이 단검을 역수로 쥐고 찔렀으나 핏빛야수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야수는 손끝을 슬쩍 휘둘러 조악한 단검을 튕겨냈다.
“크억!”
턱 아래의 강력한 충격.
윤성의 시야가 위로 홱 돌아갔다. 핏빛야수의 하이킥이 작렬한 것이다.
핏빛야수는 휘청거리는 윤성의 혁대를 쥐고 번쩍 들더니 반대편 벽에다 메다꽂았다.
-쿵!
벽에 부딪힌 윤성은 땅을 짚으며 착지했다.
왼손과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오른팔을 45도 각도로 펼친 3점 착지였다.
다음 순간, 핏빛야수의 눈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윤성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무너져 내렸다.
정신계 공격이다. 독한 양주를 원샷 해버린 것처럼 어지럽다.
“흑……. 흑흑.”
안은실의 울음소리. 핏빛야수는 그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의 목을 그었다.
“안…… 안 돼…….”
윤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예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핏빛야수의 전투력은 너무 압도적이었다.
윤성에겐 아직 투지가 남아 있었지만 힘도 체력도 없었다.
핏빛야수는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눈에서 기이한 마법을 쏘았다.
그리고 윤성은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