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Epilogue
반년.
에이션트 드래곤인 칼리만을 쓰러뜨린 지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반년은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이지만, 항상 옆에 있던 발렌이 사라진 내겐 너무나 길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오늘도 여기 계세요?”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만들어진 발렌의 동상과 무덤은 발렌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의 전투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발렌이 싸운 것도 모두 지켜봤기에 그를 기억해줬다.
많은 사람이 발렌을 기억한다는 건 내게 기쁜 일이었다.
흰 눈이 내려서 동상 위에 얹힌 눈들을 털어내며 내가 하고 있던 붉은 목도리를 동상에 걸쳐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허전하네요.”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뒤 숨을 크게 내뱉자, 동상을 가리던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컵라면을 발렌의 동상 앞에 내려놓았고, 채하나가 그걸 보고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덤 앞에 라면을 놓는 사람은 최현 씨 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라면 말고도 다른 것도 많이 먹여줬을 텐데.”
그리고 반년이란 시간은 우리의 많은 걸 바꿔놨다.
“죄송하지만, 바쁘니까 이동하면서 브리핑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던전 완전 공략에 성공했지만, 나는 여전히 던전 공략 총지휘관 자리에 있다.
이름과 다르게 하는 일은 던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이런 업무는 나보다 백진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협회의 일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오늘로 한 달째 던전에서 사망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던전에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헌터들이 싸우는 건 새로 생겨나는 게이트의 몬스터들 뿐이다.
던전 공략이 끝나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몬스터들에 대해 분석을 끝냈고, 안전한 공략법을 만들어서 헌터들에게 배포했다.
덕분에 지금 헌터라는 직업은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안전한 직업이 됐다.
“현재 3층까지 광석 채광을 마친 상태입니다. 내일부터 4층 채굴에 들어간다고 해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게이트 외엔 몬스터가 없으니 던전에 있는 자원은 모두 안전하게 채굴할 수 있게 되었다.
던전 자체에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지만, 게이트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개념이기에 게이트에 있는 자원을 캘 수 있도록 연구 중이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협회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까만 정장을 입고 있는 하루가 나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훨씬 연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대하는 건 껄끄러웠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별일 없으시죠?”
하루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 이민하 씨는 잘 지내시나요?”
“그럼요. 너무 적응을 잘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헌터예요.”
이민하는 우리 길드를 떠나 신월로 소속을 옮겼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러기엔 우리 길드는 너무 작은 길드였다.
신월에서 스카웃을 해왔기에 신아람은 그녀를 기쁜 마음으로 보내줬다.
나 역시 이민하가 어디서든 잘되면 그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최현 씨도 오실 생각 없나요?”
“아쉽게도 저는 저희 길드가 좋아서요.”
“최현 씨라면…….”
“어디 보자, 이신예 씨 전화번호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연락처를 찾는 시늉을 하자, 순간적으로 하루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원래 미소로 돌아왔다.
신월은 너무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얌전히 있지도 않은 상태로 협회와 화이트 소드에서 실속을 챙기며 가장 큰 성장을 이룩했다.
그 자체로 이미 하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지만, 모두가 그 상황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새로운 헌터들이 신월에 들어갔고, 하루는 신월이라는 브랜드를 좀 더 높게 올리기 위해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과거엔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마치 화이트 소드처럼 엘리트의 느낌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신예는 진지하게 우리 길드로 넘어올까 고민하고 있었다.
“예전엔 좀 더 순수한 분이셨는데, 많이 변하셨네요.”
과거엔 호구였는데 이제 안 통한다는 건가.
“똑똑해진 거죠.”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봬요.”
하루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다시 만나지 않길 기도했다.
어쩐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채하나가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왜요?”
“그냥요. 서두르죠. 회의 늦겠어요.”
“으윽.”
내가 하는 업무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이 회의다.
밑바닥 헌터에서 올라온 나는 전문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회의가 썩 반갑지 않았다.
갈색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가자 백진철이 날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서오세요.”
“제가 늦은 모양이네요.”
이미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려 있었다.
바닥 헌터 출신인 나는 여기서 제법 미움을 받는 모양이었다.
협회 임원들은 내가 백진철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백진철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내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다.
“이번 달엔 신입 헌터가 20명 정도 늘었고, 5명의 헌터가 은퇴했습니다.”
“헌터 지원자 수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네요.”
“좋은 현상이지만, 안정적인 게이트 공략을 위해선 확실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헌터 협회는 헌터에 대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있기에 회의 내용이 다양했다.
공략 총지휘관이라는 자리 때문에 이곳에 있지만, 사실 항상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고 회의를 듣다가 나가는 게 전부다.
“최현 씨 생각은 어떠신가요?”
백진철의 물음에 다시 한번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질문이 뭔지도 듣질 않은 터라 멍하니 있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행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백진철의 저 무한한 신뢰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백진철이 따로 내게 다가왔다.
“회의 자리가 불편하시다면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그런가요? 아무래도 협회 운영에 관한 내용이 오고 가다 보니 저와 잘 맞지 않는 거 같긴 해서요.”
“사실 나중에 최현 씨를 협회로 모실 생각이라 업무에 대해 미리 알려드리려고 했거든요.”
백진철의 말에 흠칫 놀라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최현 씨는 전혀 이쪽에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하하, 아직 직접 움직이는 쪽이 좋아서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좀 더 현장에 남아 있겠습니다.”
게이트 공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네이비 라벨이 출현하는 게이트는 여전히 SS급 헌터가 동행한다.
나중에 공략이 더 안정적으로 바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이곳에 필요하다고 느낀다.
“알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협회장님고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백진철이 나를 불렀다.
“최현 씨!”
“……?”
고개를 휙 돌리자, 백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술 한잔해요.”
“… 그러죠.”
어쩐지 그와 술자리는 편안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으아악! 그게 아니라고! 누가 재료를 낭비해서 이딴 쓰레기를 만들라고 했어!”
신아람의 대장간엔 항상 그녀의 포효 소리가 들린다.
새로 들어온 신입 대장장이들은 철을 두드리는 소리보다 잔소리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는 소문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내가 잠깐 쉴 시간을 주기로 했다.
“저 왔어요.”
“아! 왜 이렇게 늦었어?”
날 보고 반갑게 맞아준 그녀는 뒤에 있는 채하나에게도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레이븐 길드는 조금씩 성장해서 지금은 길드원도 늘어나고 길드 랭킹도 상당히 올랐다.
전에도 말했듯이 지원하는 지원자는 많았지만, 신아람은 그다지 길드원을 많이 늘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장 알 수 없는 건 그녀가 신입을 뽑는 기준이었다.
실력이나 스팩은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뽑고 싶은 사람을 뽑는 괴상한 기준에 많은 지원자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새로운 신입이 들어와서 소개해줄게!”
“네? 신입은 최근에도 항상 들어왔잖아요.”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신입이 늘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신입을 보여준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봐!”
신아람의 말에 대장간 뒤쪽에서 율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뭐… 뭐?! 설마……!”
“정답! 율이가 우리 길드에 들어왔어.”
입을 떡 벌린 채로 율이와 신아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약 덕분에 건강해진 율이는 이제 보통 사람만큼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 후로 그녀는 열심히 운동에 매진해서 남들보다 건강한 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헌터 길드에 들어오다니…….
“너… 뭐야?!”
“지금까지 오빠 몰래 헌터 공부를 해서 합격했거든! 하자마자 여기 길드로 지원했지.”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낙하산 아니야. 율이는 율이 실력으로 들어온 거라고.”
“아무리 건강해졌다고 해도 갑자기 헌터라니…….”
순간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고개를 휙 돌려 채하나를 노려봤다.
“채하나 씨도 알고 계셨군요.”
“하하, 죄송해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오빠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 걸. 괜찮아. 헌터라고 다 싸우는 건 아니잖아. 길드 운영 쪽에서 일할 거니까. 나도 이제 나이가 있고 직장이 필요하다고.”
하긴, 이제 몸도 건강하고 율이가 하고 싶은 게 이거라면 막을 생각은 없다.
위험한 일이라면 절대 반대지만.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율이는 하나가 일을 가르쳐줄 거야. 잘 따라다니면서 배우도록 해.”
들떠서 웃는 율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뭐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내 역할이니까.
“아, 마침 여기 계셨군요.”
뒤에서 나타난 유미래가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다급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건 내가 일할 시간이란 뜻이다.
“네이비 라벨이 10마리 이상 발견된 게이트에요. 다른 SS급 헌터들이 움직일 수 없어서 최현 씨가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이비 라벨이 10마리요?!”
무작위 게이트 속에서 간혹 이런 위험한 게이트가 나오기도 한다.
“알겠어요. 바로 던전으로 갈게요.”
“그럼 다른 팀원은…….”
“혼자 가겠습니다. 네이비 라벨이 그렇게 많으면 너무 위험해요.”
유미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보고해둘게요.”
채하나는 뒤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저도 따라갈까요?”
“혼자면 충분해요. 그리고 셀렌도 있으니까.”
“에헴, 나만 믿어.”
옆에서 튀어나온 셀렌을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잖아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는 거. 금방 다녀올게요.”
채하나를 안심시키고 던전쪽으로 몸을 돌려 서둘러 걸어갔다.
여전히 죽는 건 고통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아무리 죽어도 난 앞으로 나아간다.
내 라이프는 9999개니까.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