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라이프x9999 (5)
하루, 이틀? 아니, 일주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지금의 나는 동물보다 더 짐승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부활하면 눈앞에 있는 칼리만을 상대로 달려들어서 대미지를 입고 죽는다.
어떻게 죽는지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젠 통증조차 큰 의미가 없으니까.
스킬의 쿨타임이 돌면 스킬을 써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대미지를 입히고,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면 죽기 전에 달려든다.
“주인, 이러다 주인이 먼저 망가지겠어.”
“…….”
“벌써 한 달이나 이 짓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 달이라는 말에 앞으로 걸어가던 걸음이 멈췄다.
한 달이라고?
내가 한 달이나 이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건가.
“뭘 먹기는커녕 잠도 자지 않고 싸우기만 하잖아. 그러다 정신이 망가져.”
“…괜찮아. 이제 곧 끝이야.”
죽고 난 후엔 기력과 체력, 모든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먹거나 자는 행위가 필요하진 않지만, 그만큼 내가 기계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데스나이트와 싸울 때도 저녁이 되면 놈들이 움직이질 않아서 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라이프는…….”
[최현 Lv.88
체력: 8850/8850 마나: 880/880 기력: 30/30
힘: 221 민첩: 144 지능: 97(사용 가능 포인트:0)
라이프 : 8512개]
싸우기 전에 9700개 정도였으니 벌써 1200개를 소모했다.
스킬로 사용한 걸 제외하더라도 거의 1000번 정도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칼리만에게 입힌 대미지는 라이프마다 평균적으로 200 정도.
스킬을 썼을 땐 더 큰 대미지를 입힐 수 있지만, 어쩔 땐 아예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죽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벌써 20만의 대미지인데 놈은 멀쩡히 살아 있다.
“일단 18층에서 도망치자. 지금은 다른 사람들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그건 안 돼.”
칼리만은 단순히 체력이 높은 게 전부가 아닐 거다.
자신의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회복 마법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칼리만의 체력은 여전히 물음표라서 몇인지 알 수 없지만, 체력바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놈의 남은 체력은 20% 정도.
즉, 회복하는 양보다 입히는 대미지가 많다는 거다.
“지금 도망치면 놈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는 거밖에 안 돼.”
순수하게 칼리만이 회복에 집중한다면 지금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를 막기 위해 마법을 계속 사용하기에 회복에 집중할 수 없는 거겠지.
아마 정신력 자체의 한계도 존재할 거다.
분명 칼리만은 강하지만, 나 역시 웬만한 마법을 맞아 줄 만큼 나약한 놈은 아니다.
즉, 칼리만도 높은 수준의 마법을 사용하느라 정신력 소모가 크다는 거다.
“지겹군. 언제까지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할 셈이지?”
역시 예상대로 칼리만은 내가 체력바를 볼 수 있다는 걸 모른다.
놈이 날 엿봤다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 지켜보고 있진 않았다는 거다.
슬슬 초조하겠지.
“내 회복 마법은 네놈의 대미지를 뛰어넘는다. 아무리 이런 짓을 반복해도 의미가 없다는 거지.”
그리고 의미 없는 허무한 시간을 반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앞으로 뛰쳐나가자 칼리만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왔다.
바닥에 슬라이딩하며 놈의 주먹을 피하고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5공식, 화왕.
쐐액!
매섭게 화도가 놈의 복부를 향해 뿜어졌다.
[-619]
이런 식으로 빈틈을 노리면 가끔 큰 대미지를 주는 것도 가능했다.
다른 곳은 힘들지만, 발렌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이 상처 때문에 놈은 아래쪽 방어가 약하다.
그렇다면 끈질기게 이쪽을 노리는 수밖에.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파지지직!
바닥을 타고 전격이 나를 집어삼켰고, 혈관이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System : ‘즉시 부활’을 발동하셨습니다!]
즉시 부활은 시전 직후에 잠깐 무적 효과가 붙어 있다.
지금까지 이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 없이 놈에게 죽으며 놈이 가진 기술과 그 기술의 간격을 외우고 있었다.
전격을 쓴 지금은 놈에게 큰 기술이 남아 있지 않다.
바로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사용했다.
파악!
부활하자마자 하늘에서 고드름 비가 쏟아졌고, 내 온몸을 관통했다.
그러나 무적이라는 말이 걸맞게 내 몸에 닿은 고드름은 가루로 변해 버렸다.
계속 스킬을 아껴 뒀었고, 큰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이 놈을 죽일 수 있는 기회다.
“벌레 같은 자식!”
내 스킬을 알고 있는 칼리만은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바로 앞에 벽을 세웠다.
바닥에서 솟아난 벽은 너무 높아서 덩치가 큰 칼리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후우웁.”
무적인 상태는 10초.
벽을 뚫고 나갈 때부턴 무적이 아니다.
쌔엥-!
땅을 끌어 올려 만든 벽은 보기에만 단단해 보일 뿐, 가볍게 벨 수 있었다.
내 무적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칼리만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신력 소모가 큰 기술을 마구잡이로 쏟아붓지 않는 거겠지.
부웅!
“……!”
벽에서 나오자마자 칼리만의 꼬리가 내게 날아오고 있었다.
줄넘기하듯 높게 뛰어서 꼬리를 피했고, 이어서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이제 이 끔찍한 싸움의 끝을 보자고!”
칠흑의 묵갑으로 블링크를 써서 칼리만의 앞까지 이동했다.
4식, 매화.
쐐액!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며 검식을 이어 가는 게 바로 월하백화식.
1식, 목란.
이어서 6식 송화.
버프까지 사용한 상태였기에 상당히 빠르게 여러 검식을 순식간에 사용했다.
“너 지금 한계지?”
“……?!”
푸욱!
아주 잠깐이라도 놈을 당황시킬 수 있으면 충분하다.
발렌이 만든 상처에 화도를 쑤셔 넣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게 치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쉽게 비늘이 뚫린다는 건 상처는 그대로라는 의미였다.
“크아악!”
검을 쑤셔 넣은 상태로 앞으로 힘껏 내달렸고, 상처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찢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칼리만이 옆으로 쓰러졌다.
“셀렌!”
기다리고 있던 셀렌이 바로 상처 부위에 푸른 불꽃을 토해 냈다.
화르르륵!
“끄에에엑!”
칼리만의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고통에 몸을 바닥에 비비는 칼리만의 체력은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주지 않기 위해 놈의 목에 화도를 꽂아 넣었다.
푸욱!
“…어째서… 어째서 네놈은 정신이 망가지지 않는 거지?”
“예전에도 이미 이런 건 겪었었거든. 그때 이런 싸움을 했다면 분명 자아를 잃고 망가져 버렸겠지만, 지금의 난 그때와 달라.”
발렌이 지탱해 준 덕분에 그때를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발렌은 없지만, 발렌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1000번쯤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게이트에 갇혔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가뿐한 정도다.
물론 칼리만은 내가 싸웠던 누구보다 강한 몬스터였다.
최강의 헌터 자리에 있는 나를 1000번이나 죽일 수 있는 몬스터다.
처음에 쥬엘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놈들을 이기는 방법은 없었겠지.
“인간은 결국 타락한다. 이 던전을 놓고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칼리만의 옆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마 그렇겠지. 인간이 탐욕스러운 동물이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런 반복 속에서 좀 더 나은 형태로 변화하는 게 인간이야.”
“…그런가. 오히려 어리석은 건 내 쪽이었나.”
푸른색의 눈을 감은 칼리만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이내 몸이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System : 블랙 스톤x2 드래곤의 비늘x3 드래곤 하트x1 금빛 갈기x2을 획득하셨습니다!]
진짜 블랙 라벨은 이 녀석이었나.
존재하긴 하는 거였군.
“주인 굉장해! 진짜 드래곤을 이겼다고!”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셀렌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긴 건가.
아예 펫 시스템 아이콘이 사라진 걸 보고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떨궜다.
…이제 울어도 되는 거겠지.
“흐아아악!”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은 한동안 끝나지 않았다.
***
“와아아아! 영웅! 영웅이다!”
“뭐야, 다들 왜 여기에…….”
17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많은 헌터가 나를 반겨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현 씨가 드래곤에게 진다면 조금이라도 저희가 시간을 벌기 위해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내게 다가온 백진철은 어째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항상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그였기에 그런 그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정말 멋진 싸움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 칼리만 자식이 한 말이 진짜였어요?!”
“마지막까지 최현 씨를 믿고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도 몰살당할 게 뻔하니까요.”
나를 압박하기 위해 다른 헌터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 진짜로 보여 준 건가.
화악!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채하나가 바로 내게 안겨 왔다.
“진짜…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미안해요.”
내가 천 번 넘게 죽는 걸 채하나가 보고 있었다면 그녀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하나 막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몇 번이나 올라가겠다고 악을 지르던지…….”
한숨을 내쉰 신아람이 내게 다가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수고했어. 잘했어.”
“…그게 다인가요?”
“이거면 됐지!”
털썩.
“괘… 괜찮아?!”
당황한 채하나가 바로 회복 기술을 내게 사용했지만, 지금 내 체력은 가득 차 있었다.
“하하, 이제야 마음이 놓여서 그런 거 같아요. 괜찮아요. 다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지금은 다치지 않았지만, 엄청 많이 다쳤잖아요! 진짜… 차라리 제가 다치는 게 속 편했어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채하나를 보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오랜 시간을 싸워 온 게 헛수고가 아니었구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투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잘라 낸 건가.
“영웅! 던전 영웅이다!”
“와아아! 정말 던전 완전 공략이 가능할 줄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백진철의 부축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감사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16층이랑 17층은 공략도 안 됐잖아요. 축제를 벌이기엔 이릅니다.”
“으… 눈치 없는 녀석.”
“잠깐은 축하해도 좋잖아요.”
“되게 재미없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이제 돌아가죠.”
아직 던전 완전 공략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도, 발렌이 더 이상 내 옆에 없다는 것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게 반복되더라도 우린 좀 더 나은 형태로 변화한다.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