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라이프x9999 (3)
[System : ‘즉시 부활’을 발동하셨습니다!]
당황해서 이모탈을 쓰지도 못한 탓에 즉시 부활로 바로 다시 살아났다.
18층은 넓지 않은 탓에 부활하자마자 멀찌감치 칼리만이 보였다.
“방금… 뭐야?!”
“폴리모프 상태인데 저 정도야. 카룬이랑은 비교도 안 돼.”
전에 만났던 드래곤인 카룬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폴리모프 상태에선 나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드래곤 형태를 버리고 다른 종족의 형태로 변하는 건 그만큼 힘을 억눌러야 하기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때 만났던 드래곤은 반만 인간이었지.”
“마법의 수준도 차이가 심한가 봐.”
카룬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덩치도 크고 피부도 드래곤과 같은 형태였으며 꼬리까지 달려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칼리만은 온전히 인간과 같았다.
드래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로 감쪽같다.
“그래서? 저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셀렌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여기서 놈과 싸워야 한다는 건 확정이다.
놈은 반드시 나를 죽이고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이고, 내가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서 멈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아래로 데려가는 건 재앙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놈이 내가 가진 수를 모두 알고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 여기서 내 행보를 지켜봤으니 내 스킬이나 검술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자, 작전 회의는 끝났나?”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칼리만이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인사는 끝났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상대방 가슴에 구멍을 뚫는 걸 인사라고 하진 않거든.”
주먹을 꽉 움켜쥐는 칼리만을 보고 버프를 사용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쓴다면 놈의 속도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겠지.
파앗!
“……?!”
그 순간 나와 칼리만 사이를 막아선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 이 여자도 드래곤인가.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 역시 칼리만처럼 완전히 사람과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정장과 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은 그와 반대로 하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칼리만 님께서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제 선에서 끝내도록 하죠.”
나이만 보면 채하나와 비슷해 보이는 그녀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키도 그리 크지 않았다.
안경까지 쓰고 있는 그녀는 정말 인간의 모습이었다.
“쥬엘, 미안하지만, 지금은 방해하지 말아 줄래? 아직 9998번 더 죽여야 하거든. 아, 스킬을 썼으니까 라이프가 줄어서 더 조금 남았나?”
역시 내 스킬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칼리만 님은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인간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거라면 좀 더 확실한 임팩트가 필요하죠.”
“…음 그런가? 임팩트는 쥬엘이 더 크긴 하지. 그럼 오랜만에 쥬엘도 즐기도록 양보할게.”
“저는 즐기는 게 아니라…….”
귀찮다는 듯이 칼리만이 손을 휘휘 젓는 모습에 쥬엘이라고 불린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칼리만 님과 달리 편안한 죽음을 드리진 않을 겁니다.”
양손에 단검 두 자루를 들고 있는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쌔앵-!
캉!
“……!”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난 쥬엘의 속도에 놀랐고, 반대로 그녀는 내가 막았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버프를 사용했으니 칼리만에게 당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치가 상승한 상태다.
빠르긴 하지만, 차윤지와 비슷한 정도.
버프 상태에선 내가 위다.
“여기까지 온 인간답군요.”
“쥬엘, 그 인간 보통 아니야. 폴리모프 상태론 힘들걸?”
“…….”
칼리만의 말에 눈썹이 꿈틀거린 그녀는 다시 매섭게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캉! 카칵! 캉!
매 공격이 매섭긴 했지만, 적응할수록 막기 수월했다.
속도와 힘은 분명 인간과 동떨어진 수준이다.
하지만 검술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충분히 막아 낼 만했다.
2수식, 연화.
쥬엘이 검을 휘두르기 직전 찌르기로 검을 막아 버렸다.
“……?!”
“발렌! 셀렌!”
그리고 동시에 옆에 발렌과 셀렌을 소환했다.
화르륵!
기다렸다는 듯이 셀렌이 그녀를 향해 불을 토해 냈고, 화염에 휩싸인 쥬엘을 향해 발렌이 묵직한 검을 내리쳤다.
카앙!
“…확실히 인간의 모습으론 힘들겠군요.”
“……!”
한쪽 팔이 드래곤 형태로 변한 쥬엘은 손으로 발렌의 검을 막고 있었다.
점점 덩치가 커진 쥬엘이 온전히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나 본데?”
“도망쳐!”
발렌은 소환한 후에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죽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검을 들고 쥬엘의 앞을 막아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카룬과 싸울 때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도와줘서 이겼는데, 이런 괴물을 혼자서 상대하는 게 가능할까.
“주인, 그걸 쓰면 되잖아.”
라이프 룰렛.
더 이상 선택지는 없다.
저쪽이 사기적인 스펙으로 덤빈다면, 나도 사기적인 스킬을 사용하는 수밖에.
쿠웅!
묵직한 쥬엘의 팔이 바닥에 냅다 꽂혔고, 옆으로 살짝 피한 나는 쥬엘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슨 수작을!”
쥬엘이 바로 다시 공격해 오려고 했지만, 이미 상당히 멀리까지 거리를 벌렸다.
“드래곤도 결국, 몬스터일 뿐이잖아. 죽이면 죽는다는 거지.”
트드듯!
라이프 룰렛을 발동시켜 활시위를 당겼다.
쥬엘은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듯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안 돼! 쥬엘, 위험해!”
뒤에서 칼리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활시위는 내 손을 떠난 후였다.
파앙-!
금색의 화살은 허공을 가로질러 쥬엘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고, 쥬엘은 하찮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콰직!
“……?!”
그러나 이미 표적이 된 쥬엘은 그대로 화살이 등에 명중했다.
“크에에엑!”
쥬엘에겐 발톱만 한 화살이지만, 그 대미지는 터무니없는 수준.
7천의 대미지가 그대로 쥬엘에게 꽂혔다.
여전히 체력이 ‘????’로 적혀 있어서 몇인지 알 수 없지만, 아르티아의 체력이 5만 대였던 걸 생각해 보면 7천이란 대미지가 적진 않을 거다.
한 방에 그 정도의 대미지를 먹었다는 건 충격적이겠지.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저 화살은 라이프에 비례한 고정 대미지를 입히는 스킬이야. 지금은 상대를 쫓는 유도 효과까지 붙어 있어.”
칼리만은 라이프 룰렛의 효과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놈들이 본격적으로 2:1로 덤벼오면 승산이 없다.
빨리 쥬엘을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이기는 건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다.
안타깝게도 라이프 룰렛엔 쿨타임이 존재한다.
연속으로 계속 대미지를 입힐 순 없지만, 라이프 룰렛의 존재만으로 놈들에게 충분히 압박감을 줄 수 있겠지.
“발렌, 일단 조금 쉬고 있어.”
라이프 룰렛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발렌을 다시 시스템에 집어넣었다.
“짓이겨 주마!”
쿠웅!
아까보다 격앙된 목소리의 쥬엘이 주먹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고, 주변 땅이 일그러지며 지형이 파괴되었다.
단숨에 땅이 솟아오르며 나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위로 뛰어오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쥬엘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브레스?!”
“공중에서 피하긴 힘들겠지!”
안타깝지만, 브레스는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고.
갑옷을 바로 칠흑의 묵갑으로 바꿔서 블링크를 사용했다.
파앙-!
쥬엘의 입에서 발사된 브레스는 던전의 벽을 뚫고 나가는 게 보였다.
“이 자식!”
“이번엔 내 차례지?”
블링크로 이동한 곳은 쥬엘의 등 위였다.
브레스 직후엔 반동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건 알고 있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미친 듯이 화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의 등을 헤집어 놓고 다니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촤악! 촤작! 촤자작!
검으로 바닥을 찢어발기듯 발아래에 있는 쥬엘의 등을 갈기갈기 찢었다.
“크아악!”
쥬엘의 비명과 동시에 앞에 칼리만의 얼굴이 보였다.
“……?!”
반사적으로 이모탈을 사용했고, 칼리만의 발차기가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정신을 차렸을 땐 한참 떨어진 바닥에 내리꽂힌 상태였다.
이모탈 덕분에 죽진 않았지만, 라이프가 깎인 거로 봐선 한 방에 체력이 바닥난 건가.
괴물 같은 자식.
“뭐야, 하나씩 덤비려던 거 아니었냐? 비겁한 도마뱀 자식들.”
“그럴 생각이었는데, 쥬엘은 내가 아끼는 아이거든. 너무 괴롭히는 건 좋지 않아.”
바닥에 몸을 붙인 쥬엘이 숨을 크게 헐떡였고, 칼리만은 거기서 내려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주인, 뒤에 있는 드래곤은 지금 처리해야 해. 드래곤의 생명력은 엄청나니까.”
“나도 알지만, 저 자식이 버티고 있으면 다가갈 수 없어.”
쥬엘의 체력이 많이 깎였다는 건 알 수 있다.
칼리만이 직접 나선 게 그 증거겠지.
“나한테 맡겨 줘. 잠깐만 저 금발 드래곤의 시선을 끌어 주면 돼.”
“말이 쉽지!”
부웅!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칼리만의 주먹이 얼굴 옆을 훑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 셀렌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 스킬은 죽어도 라이프만 깎이는 거 맞지?”
“완전 내 사생팬 수준인데?”
이모탈은 죽지도 않을뿐더러, 입는 대미지에 대한 통증까지 없애 주지만, 죽지 않는다는 건 내게 위험한 요소이기도 했다.
“지금 죽이면 쉬지 않고 라이프를 깎을 수 있다는 거네?”
“……!”
빠악!
그의 주먹이 매섭게 복부를 후려쳤다.
라이프가 깎이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화도를 휘둘렀다.
쌔앵-!
그러나 화도는 아무것도 베지 못한 채 허공을 갈랐고, 자세가 무너진 순간 이미 칼리만의 다음 공격이 들어왔다.
무릎이 턱을 쳐올려 잠시 시야가 돌아가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대미지도 없는데 이 정도 충격이라니…….
“뭐야, 쥬엘을 상대할 때처럼 힘 좀 내보라고!”
매섭게 쏟아지는 공격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냥 놈의 샌드백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한동안 셀렌과 같이 싸우면서 셀렌의 화력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느꼈다.
그리고 그 화력은 내 기력을 연료로 하고 있어서, 많이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
“셀렌! 기력은 아낌없이 써도 되니까!”
“……?!”
어차피 죽을 때마다 기력은 회복한다.
이모탈이 발동하면서 칼리만에게 죽을 때마다 기력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그때마다 셀렌에게 먹이로 주면 화력은 충분하겠지.
“너 이 자식! 설마!”
처음으로 칼리만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셀렌은 쥬엘 입으로 들어간 후였다.
밖에선 피부 때문에 대미지를 줄 수 없지만, 내부에선 얘기가 다르지.
“쿠에에엑!”
바닥에 쓰러져 있던 쥬엘이 벌떡 일어나 고통에 몸부림쳤고, 입에서 불과 함께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다시 1: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