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라이프x9999 (2)
[최현 Lv.88
체력: 8850/8850 마나: 880/880 기력: 30/30
힘: 221 민첩: 144 지능: 97(사용 가능 포인트:0)
라이프 : 9999개]
지금까지 오랜 시간 전투를 거듭한 덕분에 현재 내 능력치는 이렇다.
1레벨일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능력치라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달까.
가지고 있는 스킬 전부를 마스터했고, 라이프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기 스킬 하나가 생겼다.
[Active - 라이프 룰렛 Lv.Max -각성-
남아 있는 라이프의 개수 중 랜덤 수치만큼 적에게 대미지를 준다.
라이프를 2개 소모한다.
표적이 된 적이 있으면 유도탄으로 바뀐다.
마나-50 쿨타임-40분]
각성 스킬로 바뀌고 나서 새로운 효과가 생겼다.
바로 ‘유도탄’ 능력.
내 손에 닿은 적은 자동으로 ‘표적’이 생긴다.
그 후에 라이프 룰렛을 사용하면 표적을 추적하는 유도탄으로 바뀐다는 거다.
“주인, 이상하게 웃고 있어.”
“…시끄러.”
현재 내가 있는 곳은 17층.
설원 지형이라 시도 때도 없이 눈보라가 몰아치고,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결국, 지금은 동굴에 숨어서 몸을 피하는 중이다.
“그래도 셀렌이 있어서 다행이네.”
“내가 주인 기력을 먹고 살긴 하지만, 먹는 만큼 일을 한다고!”
셀렌과 계약을 한 덕분에 빙결의 갑옷을 입지 않아도 추위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웬만한 뜨거운 불에도 대미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상 빙결과 화염 속성은 내게 의미가 없어졌다는 거다.
“17층까진 금방 오긴 했는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네.”
발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17층의 지형 자체가 극악이었다.
주변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눈밭이고, 눈보라 속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끔찍한 악몽 같았다.
이틀이나 17층을 방황하고 다녔지만, 1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아직 발견하지도 못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일반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한참 떨어져 있다.
그래서 벽을 따라 이동하고 있으니 길을 잃진 않겠지만, 빙 돌아가는 형태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던전 가운데에 있는 거 아니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만약 그렇다면 정말 일주일은 여기서 더 썩을지도…….
인벤토리에서 패드를 꺼내 지금까지 내가 온 길을 대충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혼자 여기까지 올라온 건 20층에 있는 몬스터를 만나기 위해서도 있지만, 지형을 미리 파악해 두고 싶었다.
“…형씨, 그림 되게 못 그리네.”
“시끄러! 많이 는 거야!”
17층은 다른 층보다 지도에 표시하기가 어려웠다.
지평선처럼 펼쳐진 넓은 설원 지형이라 중간중간 이정표가 되어 줄 만한 포인트가 부족했다.
그래도 이동한 거리라도 표시해 두면 좋으니까.
“그럼 다시 출발해 볼까.”
바람이 쉬지 않고 부는 덕분에 발렌의 후각이 활약하기 좋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반대에서 적이 튀어나오면 어쩔 수 없지만.
쿵! 쿵!
“하아, 또 저 녀석인가.”
17층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몬스터가 바로 ‘스노우맨’이다.
딱히 강한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크기와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점이 있다.
블루 라벨인 것 치곤 내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부탁할게, 셀렌.”
“맡겨 주라고!”
거대한 덩치로 점프를 하며 다가오는 스노우맨을 처음 봤을 땐 충격이었다.
심지어 검으로 공격해도 대미지가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내 앞에 듬직하게 자리 잡은 셀렌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화르르륵!
셀렌이 앞으로 힘껏 숨을 토해 내자, 어마어마한 불길이 단숨에 스노우 맨을 녹여 버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스노우맨에게 셀렌은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System : 블루 스톤x1, 눈 조각x2 얼음 결정x1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톤 외에 다른 아이템은 인벤토리만 차지하기에 버리고 가기로 했다.
언제까지 위층에 있을지 모르는 이상, 다른 중요한 아이템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고했어.”
“이 정도쯤이야!”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리는 셀렌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발렌과 셀렌이 있어 준 덕분에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았다.
“그래도 셀렌이 불태우면 다른 몬스터가 몰려들지 않아서 다행이야.”
셀렌의 불은 여러모로 몬스터를 쓰러뜨리기 좋았다.
타는 냄새는 몬스터들이 싫어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태워서 죽이면 피 냄새가 나질 않으니 다른 몬스터를 불러올 일도 없었다.
“형씨, 피 냄새가 나.”
“뭐?!”
내가 처리한 몬스터의 피 냄새가 아니라면, 아마 다른 몬스터끼리 싸워서 생긴 냄새일 거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발렌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변했다.
“피 냄새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건 부상을 당한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야?”
“아니, 이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모조리 죽이고 있다는 거야.”
흠칫 놀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고, 발렌의 후각처럼 바람이 부는 방향이 아니면 몬스터를 찾을 수도 없다.
심지어 17층은 설원이라 몬스터의 수가 많지도 않아서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이렇게 빨리 찾아서 죽이고 있다고?
스르릉.
언제든 놈이 기습해 와도 싸울 수 있도록 화도를 뽑았다.
아마 우리의 위치도 이미 파악하고 있겠지.
“…피 냄새가 한곳으로 이어지고 있어. 어떡할래?”
“초대해 주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오라는 신호.
놈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한 무시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발렌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조금 이동하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펜리르의 시체가 보였다.
블루 라벨인 펜리르는 블루 라벨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했다.
주변엔 아이스 골렘의 잔해와 펜리르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이번엔 긴장해야겠는데?”
시체들이 이어진 곳 끝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마치 내게 18층으로 올라오라는 듯한.
“18층에서 싸우는 게 더 자신 있다는 건가?”
나선형으로 이어진 익숙한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놈은 뛰어난 감지 능력과 더불어 나를 도발할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
이쯤 왔으니 아르티아 같은 퍼플 라벨의 몬스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 왔다.”
“……?!”
18층은 지금까지 봤던 지형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얀색 사각형의 타일이 바닥에 쭉 깔려 있었고,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정말 던전 내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풍경이었다.
심지어 게이트조차 보이지 않아서 더욱 이질감이 느껴졌다.
“당신은 뭐지?”
금발의 청년은 마치 인도 터번 같은 걸 머리에 두르고 있었고, 하얀색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다.
푸른색의 눈은 보석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 것만 같았다.
“네가 최현이구나.”
“……!”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단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난 이 탑의 왕이야.”
환하게 웃는 그를 보고 언제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인간과 똑같은 외형과 인간의 언어, 그리고 내가 누군지까지 알고 있다.
“드래곤인가?”
그런 비정상적인 행위가 가능한 건 존재는 드래곤 밖에 없다.
“오, 눈치가 빠르네. 나는 에이션트 드래곤이자, 이 탑의 왕. 네가 날 찾아온다고 해서 나도 너와 만나기 위해 마중 나왔어.”
해맑게 웃고 있는 그는 전혀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한 청년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날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는 건가?”
“맞아. 인간은 너무 건방지거든. 마치 탑이 자신들의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처음으로 그에게서 미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내 이름은 ‘칼리만’. 지금부터 인간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널 죽일 생각이야.”
칼리만이 내뿜는 살기는 지금까지 느껴 본 살기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날 위협하는 게 아닌, 무겁고 응축되어 조금씩 집어삼키는 듯한 살기.
“던전의 왕이라는 건 뭐지? 네가 이 탑의 주인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 나도 이 던전에서 태어난 생명체인걸? 다른 몬스터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인간 따위가 탑에 기어올라서 자기들의 영역인 것처럼 멋대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칼리만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너희들이 던전 안에서만 있었다면 우리도 굳이 던전을 공략하지 않았겠지.”
“정말? 확신할 수 있어? 인간은 탐욕스럽고 추악한 생명체야. 던전에는 수많은 자원이 있어. 몬스터들이 인간을 위협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어떻게든 던전을 삼키려고 했겠지.”
“…….”
칼리만의 정론에 반박하지 못한 채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 던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나도 침범할 수 없어. 어째서 던전이 인간에게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특수한 힘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칼리만이 말하는 건 초월 능력이나 특수계 능력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이 던전의 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내가 나선 거지. 내 힘으로 던전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거든. 지금까지 네가 해 온 일들은 모두 지켜봤어.”
“썩 좋지 않은 취미를 가진 드래곤이군.”
“수명도 길고 할 것도 없어서 그런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심심해 죽을 거라고.”
씨익 입꼬리를 올린 칼리만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던전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보인다.”
“뭐?!”
“인간 중에 가장 강한 네가 처참하게 죽는 걸 보여 줘야 인간이 더 이상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건방진 소리를 하지 않겠지.”
놈의 체력바를 빤히 보고 있어도 체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종 보스라는 느낌을 노골적으로 풍기는군.
“그거 좋네. 내가 던전에서 가장 강한 놈을 죽이는 걸 모두에게 보여 주면 공략도 더 쉬워질 테니까.”
“하하하! 그런 허세는 재밌네. 네 능력은 수많은 목숨을 가진 거지?”
지금까지 내 행동을 지켜보고 들었다면 내 모든 능력이 그에게 공개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싸우는 방식이 변하진 않는다.
“네가 9999번 죽는 걸 보여 주면 인간들도 절망이 뭔지 느끼겠지.”
“관음증 말고 또 무슨 능력이 있나 보여 주라고.”
파앙-!
“…?! 쿨럭!”
목을 타고 올라온 피가 단숨에 입에서 튀어나와 하얀 바닥을 적셨다.
“자, 일단 한 번.”
흐릿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내 배에 뚫려 있는 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칼리만의 주먹…….
놈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도 못했고, 겨우 주먹질 한 방에 내 배가 뚫려 버린 것이다.
“이제 9998번 남았네.”
씨익 웃는 칼리만의 미소와 함께 오랜만에 보는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