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라이프x9999 (1)
13층까지 던전 공략 복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백진철의 힘이 컸다.
막상 내가 총지휘관이 된 이후로 성과가 나와서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는 건 백진철이었다.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에 대해 이상적인 답을 내놓는 건 내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 답을 현실로 만드는 게 백진철이다.
“아래층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헌터의 수도 늘어나고 있고, 전체적인 헌터들의 실력도 상향 평준화되었으니까요.”
헌터 사관 학교 교장을 맡은 최현식이 서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거의 모든 몬스터를 공략하는 전투 방식에 대해 교육을 하고 있어서 현재는 큰 변수가 없으면 몬스터 토벌에서 희생이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엔 옐로우 라벨까진 몬스터에 대한 명확한 정보와 공략법이 존재했지만, 그린 라벨부터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많은 전투를 반복하며 몬스터의 특징과 공략법을 연구해야 하는데, 블루 라벨은 애초에 만나는 경우도 적었으니까.
그나마 그린 라벨의 정보가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아포칼립스가 발동한 거다.
“현재는 10명이 한 팀으로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으며, 새로 프로가 된 헌터들도 착실하게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당장 현재 공략도 중요하지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은 모든 층에서 무작위 몬스터가 나오다 보니 블루 라벨과 그린 라벨, 그리고 네이비 라벨의 몬스터도 가끔 출현해 정보를 모으고 있다.
덕분에 블루 라벨의 몬스터까진 여러 안전한 공략법이 만들어졌다.
“이대로 진행하면 위층 공략은 식은 죽 먹기네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저희가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도 많거든요.”
묘하게 들뜬 회의실의 분위기는 내 말 하나로 차갑게 식어 버렸다.
과거 류설영을 처음 만났을 때 상위층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몬스터를 많이 만났다.
지금이야 어느 층에서든 무작위 게이트가 생겨서 비슷한 몬스터들이 출현하지만, 아포칼립스 전에 상위층에 살고 있던 몬스터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다시 새로운 공략법과 전략을 준비해야겠지.
“14층 공략은 제대로 시작하고 있나요?”
“네. 아무래도 14층은 지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지금까지보다 신중을 기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백진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 쪽까지 가는 길은 내가 지형을 외운 상태지만, 그 외에는 정보가 없으니 섣부르게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지.
현재 공략은 무난하게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략을 진행하다가 큰 사고라도 발생하면 새로운 헌터가 들어오는 것도 힘들어지고 공략에도 차질이 생기겠지.
“유적 기지화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든 결정은 회의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내 의견이 영향력이 큰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 백진철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다.
합리적이면서 객관적인 정보만을 신용하는 백진철의 말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었다.
“글쎄요. 시간과 자원만 낭비될 뿐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럼 그 유적을 그대로 방치한다고요?!”
백진철의 말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욱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도진욱은 머리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어린 탓인지 사리 분별이 잘 안 돼서 많은 헌터들의 눈 밖에 나고 있었다.
뭐, 그래도 실력은 출중한 사람이니까.
“14층 바로 위엔 15층이 있습니다. 15층 역시 10층과 마찬가지로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으며 전진 기지로 삼기 좋은 지형이죠. 굳이 14층에 전진 기지를 구축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
백진철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도진욱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안보다 최현 씨가 이번에 제안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의 백진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자서 위층으로 올라가겠다는 게 무슨 말이죠?”
“…….”
동시에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쏠렸다.
“어째서요?! 굳이 그런 선택을…….”
정보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마 14층과 15층까진 큰 이변이 있지 않으면 공략이 무난하게 진행될 겁니다. 하지만 16층부터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에요. 목숨이 많은 제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정보를 수집하면 좀 더 수월하고 공략이 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요! 자기 목숨을 소모품으로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정보라의 날카로운 일침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딱히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정보라를 보고 있으면 가끔 채하나가 떠오른다.
느낌은 다르지만, 하는 말이나 다른 사람을 챙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인가.
“분명 죽는 건 괴롭고 겪고 싶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그만큼 다른 동료가 죽어 가는 것도 괴롭습니다. 많은 정보가 있을수록 실제로 공략을 진행할 때 희생되는 헌터의 수가 줄어들겠죠. 그리고 저의 최종 목표는 던전의 완전 공략입니다.”
과거엔 내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도 이젠 제대로 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3층까지 공략에 성공했고, 점점 공략은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저기서 완전 공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 더 이상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는 거겠지.
“20층이 꼭대기고 그곳에 던전에 있는 어떤 몬스터보다 강한 몬스터가 있어요. 저는 그 몬스터를 만나 보고 와야겠습니다.”
블랙 라벨을 만든 인간은 20층에 있는 몬스터를 보고 그 몬스터를 이기기 위해 블랙 라벨 연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블랙 라벨과 견줄 정도의 강한 몬스터일 테고, 그런 몬스터와 아무런 대책 없이 싸울 수 없는 노릇이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15층까지 공략을 진행해 주세요. 16층부터 20층까지 정보를 공유하고 그다음 다시 공략을 진행한다면 던전의 완전 공략도 멀지 않았습니다.”
“던전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아무리 최현 씨라고 해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요.”
“제게 위험한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겐 더 위험하겠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고, 그건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정보라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도 반대야. 어째서 굳이 혼자 가려고 하는 거야? 저번처럼 SS급 헌터가 함께 움직이면…….”
“아뇨. SS급 헌터라고 목숨이 여러 개는 아니잖아요. 저 빼고.”
씨익 웃는 날 보고 차윤지에게서 살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애써 그녀의 매서운 눈을 무시한 채 시선을 돌렸다.
“크흠. 갑작스레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SS급 헌터의 손실은 던전 공략 전체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심각한 일이며, 자리를 비우면 15층까지 공략도 늦어질 거예요. 저 혼자 가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
다들 마음으론 날 걱정하고 있지만,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거겠지.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죠?”
백진철의 물음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이요.”
“……?!”
“미리 준비는 마쳐 뒀어요. 애초에 별로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20층에 있는 몬스터가 어떤 몬스터인지 궁금해서 미칠 거 같았다.
블랙 라벨만큼 강한 몬스터라니…….
블랙 라벨의 전투에서 차윤지가 갖고 있던 검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안형석은 그런 치열한 전투에서 그만큼이나 검이 버텨 준 게 기적이라고 했다.
부러지기 전에 블랙 라벨을 쓰러뜨린 게 천만다행이지.
“다음 세대에 저희가 겪은 끔찍한 희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위로 올라가겠어요.”
***
“저도 갈래요!”
“하아… 벌써 10번도 넘게 말했잖아요.”
울먹이며 졸졸 따라오는 채하나를 떨어뜨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제 목숨은 스스로 지킬 테니까 데려가 줘요!”
“안 된다니까요! 너무 위험해요.”
“최현 씨도 위험하잖아요!”
“차라리 제가 다치면 다쳤지, 채하나 씨가 다치는 건 절대 안 돼요.”
내 말에 눈이 동그래진 채하나는 어쩐지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그 이후로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다시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얼굴이 붉어졌다.
“죽지 말라곤 안 할게. 조금만 죽고 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더 다른 사람처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봐 주세요.”
신아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짜악!
“푸하하하! 걱정은 무슨. 너한테 죽을 몬스터들이 걱정이지.”
“하여간 말을 해도…….”
그런 신아람의 태도가 오히려 더 마음에 들지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인벤토리엔 음식과 필요한 장비를 모두 챙겼고, 준비도 완벽하다.
지금은 14층까지 공략이 진행되어 있어서 14층부터는 몬스터를 뚫고 이동해야 한다.
류설영에게 대략적인 계단 위치를 받아서 17층까진 그래도 빠르게 갈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어떤 정보도 없다.
“괜찮아, 형씨. 나도 있잖아!”
“정 힘들면 나도 도와줄게.”
“엄청 든든하네.”
발렌과 셀렌이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다.
만약 20층에 있는 몬스터를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럴 셈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던전 공략은 끝이라고 봐도 되겠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14층 전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진철이 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그 말만 건네고 악수를 한 뒤 바로 사라졌다.
단순하면서도 백진철다운 인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없어도 백진철이 있으면 공략은 아무 탈 없이 진행되겠지.
전선을 지나자마자 주변에 깔린 수많은 몬스터가 보였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벌써 지겹네. 20층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몬스터랑 싸워야 하는 거야?”
“…형씨가 선택한 거잖아. 내가 최대한 후각으로 몬스터 없는 길을 알려 줄게.”
그나마 발렌의 후각이 위안이 되어 줬지만, 이 위로는 몬스터가 없는 길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우글거린다.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런데 주인은 대체 목숨이 얼마나 많은 거야? 정말 계속 죽어도 부활해?”
아직 내 능력을 제대로 모르는 셀렌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마 올라가면서 죽고 부활하는 걸 셀 수 없이 많이 볼걸? 걱정하지 마. 늙어서 죽을 때까진 네게 기력을 줄 수 있으니까.”
“그건 다행인데…. 라이프 개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지 않았어?”
과거엔 라이프가 적어서 허덕였지만, 각성 스킬을 얻고 나선 어떤 몬스터를 사냥해도 라이프가 늘어났다.
평소엔 스킬도 제대로 쓰지 않으니 라이프 개수를 늘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지금은 몇 개 있는데?”
셀렌의 물음에 만족스러운 입꼬리를 올린 내가 대답했다.
“99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