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검은 안개 (4)
“끝났군.”
“…….”
이재문이 뿌린 약물은 정확히 블랙 라벨에게 명중했다.
하지만 끝났다고 여유롭게 떠드는 건 이재문이 아닌, 블랙 라벨 쪽이었다.
약물은 몸에 닿으면 단숨에 블랙 라벨의 모든 입자로 퍼져서 실체화시킨다.
그걸 알고 있는 블랙 라벨은 약물이 닿기 직전에 위험한 부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약물은 그게 전부겠지. 날 만든 인간들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만든 약물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약물을 더 만들진 못했을 테니까.”
정답이다.
연구소에서 약물을 분석했지만, 알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블랙 라벨이 떨어져 나온 몸체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더 이상 너희들이 날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가만히 중얼거리는 블랙 라벨의 목소리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작전이 실패한 이재문은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고, 황급히 그의 앞으로 방패를 든 헌터들이 벽을 세웠다.
“어쩌지?”
좋든, 싫든 이제 블랙 라벨과 싸우는 수밖에 없다.
믿을 수 있는 건 차윤지가 들고 있는 검 하나뿐이다.
몸체 반을 떼어 낸 블랙 라벨은 말 그대로 크기가 반만 해졌다.
“내 존재 이유가 몬스터를 토벌하고 던전을 공략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위층에 있던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다녔지.”
“…….”
“그런데 인간들의 대답은 겨우 이런 거였나.”
꿈틀거리는 새까만 형체에 화이트 소드의 헌터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사실상 작전은 실패고 이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악만이 남았을 뿐이다.
“…결정했다. 인간은 악이다. 모든 인간을 죽이고 다시는 나 같은 존재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몬스터 따위가!”
촤아악!
단숨에 뻗어 나간 블랙 라벨의 검은 팔은 이재문 앞에 있는 방패의 아래로 파고들어 그의 팔을 베어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이재문의 팔이 잘려 나갔고, 그를 중심으로 모든 헌터가 경악에 물들었다.
“으아아악!”
이재문의 비명과 함께 블랙 라벨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데로 모조리 베어 버렸고, 방패를 들고 있어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블랙 라벨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사… 살려 줘!”
“괴물이다!”
몸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블랙 라벨은 헌터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놈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헌터들의 목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졌고, 잠깐 사이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차윤지 씨!”
내 말에 흠칫 놀란 차윤지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블랙 라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주변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화이트 소드 특유의 하얀 제복은 모조리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넌 나를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촤악.
자신의 팔에 꽂혀 있던 헌터를 바닥에 던져버린 블랙 라벨이 나를 보고 말했다.
“어쩌면 날 만든 인간 중에선 진심으로 나와 함께 싸우려고 했던 인간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내 착각이었군.”
발렌과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던 나였기에 블랙 라벨이 그런 눈을 봤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에게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로 등진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군.”
“그러게. 유감이네.”
쐐액!
블랙 라벨의 공격에 버프를 사용하며 단숨에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모탈까지 사용한 상태라 공격을 받아도 죽진 않겠지만, 지금은 놈에게 쉽게 당해 줄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내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걸 어필해야 하니까.
“약물을 더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했지?”
인벤토리에서 처음 얻은 약물과 똑같이 생긴 병을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매섭게 공격해 오던 블랙 라벨의 움직임이 멈췄고, 정적이 흘렀다.
“허세군. 그 짧은 시간에 같은 약물을 만들어 냈다고?”
“그 옛날이랑 같은 과학력이라고 생각해?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데. 못 믿겠으면 맞아 보시던지!”
아마 블랙 라벨은 이렇게 말해도 내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다.
만약 이게 정말 약물이었다면 이렇게 보여 주지 않고 기습으로 사용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게 진짜일 확률이 1%라도 있다면 블랙 라벨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와아아! 약물이 남아 있다! 아직 우리가 진 건 아니야!”
약물을 들고 있는 날 보고 주변 분위기가 바뀌었다.
절망 가득했던 분위기에서 어쩌면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위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작전을 설명해 두지 않았기에 모두들 믿는 눈치였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 블랙 라벨은 점점 내가 들고 있는 약물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겠지.
“준비되셨죠?”
“…….”
작게 옆에 있는 차윤지에게 속삭이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파앙!
약물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단숨에 블랙 라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으로 벨 수는 없지만, 움직임만으로는 블랙 라벨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쐐액!
“……!”
블랙 라벨의 공격을 살짝 흘리며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군.”
“칭찬으로 알지.”
놈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지만, 피하는 건 가능하다.
약물의 존재를 의식하는 듯 블랙 라벨은 거리를 주지 않고 먼 거리에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언제든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 낼 속셈이겠지.
그리고 놈의 경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차윤지 씨!”
“……!”
기척을 지우고 뒤에서 튀어나온 차윤지의 검이 블랙 라벨을 찢어발겼다.
“무슨?!”
약물에 당하지도 않았는데 블랙 라벨의 팔이 찢어져 나갔고,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는 블랙 라벨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차윤지의 검이 뿜어졌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고, 그건 우리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의미했다.
첫 기습으로 블랙 라벨을 완전히 죽이려고 했기에 차윤지의 검이 블랙 라벨의 핵을 부수지 못했다는 거다.
“그 검은 뭐지?”
“이제 어쩔 수 없어요! 몰아쳐요!”
차윤지를 거들어서 블랙 라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공격은 통하지 않지만, 잠깐이라도 놈의 형체를 무너뜨리는 건 가능했다.
“어떻게 날 벨 수 있는 거냐!”
이리저리 차윤지의 검을 피하는 블랙 라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핵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
“……!”
차윤지의 말을 들은 블랙 라벨은 더욱 놀라서 우리와 거리를 벌리려고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블랙 라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빈틈… 한 번의 빈틈만 만들 수 있다면!
인벤토리에서 약물을 꺼냈고, 칠흑의 묵갑으로 놈의 뒤로 이동했다.
“이 자식!”
파캉!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서 약물을 피해 냈지만, 예상대로 블랙 라벨에게 한 번의 빈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차윤지의 검이 블랙 라벨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하아… 하아…….”
정적과 함께 멈춰 버린 블랙 라벨을 보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차윤지의 검이 블랙 라벨의 핵에 명중했다는 것을.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손에 의해 사라지는 건가.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군.”
안개처럼 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재로 변해서 바람에 흩어지듯, 블랙 라벨의 몸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어쩐지 블랙 라벨이 죽어 가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파앙-!
내 옆에서 튀어나온 셀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블랙 라벨이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같은 곳에서 만들어져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으니 기분이 묘하겠지.
“엑스가 죽은 건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마지막은 내가 지켜봐야 해.”
셀렌이 가디언에 대한 존재와 블랙 라벨에 관한 것들을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블랙 라벨은 토벌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셀렌이 그런 것에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
블랙 라벨의 토벌은 성공했으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결과였다.
화이트 소드의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자신만만하게 블랙 라벨의 토벌을 외쳤던 이재문은 팔을 잃고 전과 다른 생기도 잃은 채 길드 마스터 직위에서 내려왔다.
분명 블랙 라벨이라는 위험한 존재를 없앴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누구 하나 우리가 이겼다고 말하지 못했다.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야?”
“저도 쉴 시간은 있어야죠.”
“그러니까 쉬는 시간에 왜 여기 있냐고.”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던 차윤지가 내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언제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시려고요?”
“…….”
블랙 라벨을 쓰러뜨리고 우리는 다시 던전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마음 같아선 태세를 가다듬고 싶었지만, 블랙 라벨은 그가 말한 것처럼 위층의 몬스터를 모조리 죽여 놓았다.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기습에 실패한 탓인가요?”
“…뭐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신 거잖아요. 이렇게 휴가까지 내고 전장에 나오지 않는 건.”
지금까지 항상 전장에서 활약했던 차윤지가 한 달이나 10층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부족한 탓이었어. 만약 그 후에도 네가 약물로 빈틈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르지.”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차윤지 씨의 전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계시잖아요.”
13층까지 한 달 만에 공략할 수 있었던 건 게이트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없는 던전 필드에서 게이트만 하나씩 공략하며 전진하는 건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다.
나 혼자서 하루에 5개의 게이트를 공략할 정도로 공략에 속도를 올렸고, 아포칼립스 전의 공략 위치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하아.”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걸음을 돌렸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지한 아저씨가 내 표정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봐, 안된다고 했지?”
“아저씨가 말 좀 해 주세요.”
담배 연기를 뱉어 낸 유지한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안 되면 우리도 안 되는 거야.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널 더 의지하니까.”
“차윤지 씨가요? 설마…….”
“아무튼, 너도 바쁘잖아. 돌아가 봐. 윤지는 내가 다시 한번 말해 볼게.”
“…감사합니다.”
현재 SS급 헌터로는 나와 정보라, 그리고 도진욱만 활동하고 있었기에 전력이 부족했다.
특히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게 차윤지라서 그녀의 빈자리가 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유지한 아저씨와 인사를 마치고 헌터 협회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다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13층까지 공략을 이뤄 낸 게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내게 경의를 표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진철이 내게 다가와 살짝 인사를 건네 왔고, 그와 악수를 한 뒤 바로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던전 완전 공략 회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