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검은 안개 (3)
화이트 소드에서 블랙 라벨을 토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기까지 2주일.
그 후로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던전 공략을 이어 갔다.
다시 2주라는 시간 동안 블랙 라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 위층으로 올라간 걸까요.”
“아뇨. 곧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채하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블랙 라벨의 입장에서 약물의 존재는 상당히 거슬리겠지.
우리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블랙 라벨이 가만히 둘 리 없다.
10층까지 공략을 마치고 일단 공략을 멈췄다.
“11층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12층과 13층 몬스터의 수는 예전보다 적은 상태니까 공략하기 수월하지 않을까요?”
채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12층과 13층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몬스터의 수는 많지 않다.
블랙 라벨이 한 번 휩쓴 덕분에 아직 전보다 공략하기 좋은 상태다.
“10층은 중요한 위치에요. 외부와 연결된 길을 만들 수도 있고, 게이트가 발생하지도 않는 층이니 안전한 전진 기지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죠. 일단 여기를 사수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더 위층을 공략하기 위해선 10층이 안정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포칼립스 이후로 헌터계는 크게 변화했다.
정찰 팀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헌터의 가장 큰 가치 판단 기준이 전투력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층별로 다른 수준의 몬스터가 출현하는 게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게이트를 공략할 때도 과거보다 더 많은 인원으로 레이드 식으로 공략하는 게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블랙 라벨만 토벌하면 그 후로는 빠르게 공략이 가능할 겁니다.”
모든 층에서 무작위 라벨의 몬스터가 나오는 건 아래층에선 힘들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좋다.
1층이나 11층이나 무작위인 건 마찬가지니까.
“기다리는 것도 힘들군요.”
뒤에서 나타난 이재문이 평소처럼 꿍꿍이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블랙 라벨만 찾으면 되는데, 이렇게 꼭꼭 숨어 버렸을 줄이야.”
“…블랙 라벨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하셨죠? 정말인가요?”
내 물음에 이재문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최현 씨는 제가 걱정되시는 모양이군요. 아무리 썩어 빠진 인간이지만, 모든 게 걸려 있는데 허세를 부릴 정도로 노망이 들진 않았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선 나 역시 생각이 같다.
이재문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그의 능력은 틀림없는 진짜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이트 소드라는 길드가 최정상의 자리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블랙 라벨을 토벌하는 방식은 죄송하지만,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왜죠?”
즐거운 듯 미소를 띠고 있던 이재문의 입꼬리가 축 처지는 게 보였다.
“최현 씨도 얼마 전까지 몬스터가 아닌, 인간들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인간이란 추악하고 더러운 종족이죠. 단지 그걸 인정하는 인간과 자신은 다르다고 외면하는 인간만이 존재할 뿐.”
“…….”
“그럼 저는 다시 일을 처리하러 가 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사라지는 이재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블랙 라벨을 토벌하는 작전에 대해 그가 입을 다무는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앙그라마이뉴는 몬스터를 이용해서 권력을 잡으려고 했고, 레인은 초월 능력을 마음대로 다루며 돈을 벌기 위해 사용했다.
누군가 블랙 라벨을 도와 그를 이용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법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네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토해 냈다.
***
카앙-!
“방금 움직임은 너무 뻔했어요.”
“…알겠어.”
10층에서 안정적인 전진 기지 구축이 끝날 때까지 게이트 공략만 주야장천 하고 있다.
공략 난이도가 낮은 게이트는 헌터 사관 학교에서 예비 헌터들의 실전 훈련용으로 사용된다.
새로 헌터가 된 신입 헌터들의 수가 부쩍 늘어난 덕분에 내 일이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패턴을 바꿔 보는 게 어떨까요?”
“좋아. 그럼 상대방 움직임을 따라 해 보자. 서로 자신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오, 그거 괜찮은데요?”
그리고 남는 시간 동안 이렇게 차윤지와 대련을 하며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
과거에 그녀가 내 검술 훈련을 해 줬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다.
5분 버티는 것도 죽기 살기로 해야 했는데, 이젠 버프가 없어도 그녀와 아슬아슬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카앙! 캉!
수도 없이 대련한 탓에 서로의 움직임은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덕분에 상대방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것도 가능했다.
“……!”
쐐액!
날카롭게 검 끝이 내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제대로 갈고 닦은 월하백화식이 아니라 그 예리함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움직임은 유사했다.
검술 천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군.
파앙!
이번엔 반대로 내가 그녀에게 역습을 가했다.
차윤지 특유의 검술은 매섭게 쏟아지는 검 끝이었다.
마치 펜싱과 비슷한 날카로운 찌르기는 거리를 예측할 수 없다.
“난 그렇게 둔하지 않아.”
“차윤지 씨랑 비슷한 속도거든요?!”
“아니. 전혀 다른데.”
“차윤지 씨도 월하백화식이랑 전혀 다른데요.”
항상 대련의 끝은 이런 식이다.
혼자서 훈련을 하는 것보다 그녀와 대련을 하는 것으로 실력이 더 빠르게 는다는 건 확실했다.
그녀도 그렇게 느끼니까 나와 대련을 반복하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 차윤지는 블랙 라벨과의 전투에 있어 부담감을 안고 있다.
예전에도 무지막지한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거의 잠도 자지 않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뭐?”
수건으로 땀을 닦던 차윤지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실전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해요.”
“걱정하지 마. 하루 이틀 헌터 일을 한 게 아니니까. 내 컨디션 조절 정도는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하긴,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윤지 걱정을 하다니…….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
“죽은 사람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잖아. 이미 그 사람들이 이룬 것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최초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블랙 라벨을 쓰러뜨리면 스스로에게 떳떳해질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말한 차윤지는 들고 있는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최현 씨 들리세요?! 지금 어디세요?”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유미래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한데 목소리 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블랙 라벨이 나타났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이 동그래져서 차윤지 쪽을 바라봤고, 차윤지는 바로 무슨 일인지 직감한 표정이었다.
“방금 11층 계단에서 내려와서 지키고 있던 헌터 둘을 죽이고 이동하고 있어요.”
“방향은?!”
“그건 모르겠어요. 아직 다른 헌터들에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걸 봐선 계단 근처에 있는 모양이에요.”
유미래의 말을 듣자마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차윤지는 내 옆으로 따라붙었고, 서둘러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은 계단과 그리 멀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로 찾고 있었던 모양이네.”
얼마 달리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난 블랙 라벨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G-3 구역, 블랙 라벨 발견.”
“…! 알겠습니다.”
유미래에게 통신을 넣고 바로 허리춤의 화도를 뽑았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내 물음에 블랙 라벨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내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었지.”
“몬스터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닌걸.”
“인간이 만든 몬스터니까 그럴 수밖에.”
일단 화이트 소드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이곳에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중요하다.
블랙 라벨은 내가 약물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섣불리 공격해 오진 않을 거다.
“그래서 그 고민에 대한 정답은 찾았나?”
“난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선 그 전에 태어난 이유를 끝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말은…….”
“약물만 넘긴다면 인간과 함께 몬스터를 토벌하지.”
잠깐의 정적.
전혀 예상 밖의 말에 나와 차윤지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중립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 싸우겠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어이가 없군. 몬스터 따위가?”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화이트 소드 쪽으로 블랙 라벨의 시선이 돌아갔다.
“우린 몬스터의 힘을 빌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건방진 놈.”
선두에 서 있는 이재문은 평소 입던 정장을 버리고 화이트 소드의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이 도와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한 건 나뿐인 것 같군.”
어쩐지 괜히 블랙 라벨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네놈이 언제 어떻게 배신할 줄 알고 우리가 등 뒤를 맡기지?! 몬스터는 헌터의 적이고 인류의 적이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완전히 지워 주마.”
동시에 달려드는 하얀 제복의 화이트 소드를 보고 나와 차윤지는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가 블랙 라벨을 공격하는 건 어디까지나 비상사태일 뿐이다.
지금은 화이트 소드가 준비해 온 작전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 역할이다.
“지금이다!”
뒤따라온 화이트 소드의 길드원들이 하얀 방패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방패 같은 건 소용 없어요! 블랙 라벨은 모든 걸 뚫고 움직일 수 있다고요.”
“후후, 아무리 블랙 라벨이라도 뚫을 수 없는 게 존재하죠. 던전의 벽입니다.”
“……?!”
확실히 던전의 벽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절대적인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저희 화이트 소드의 모든 과학력을 동원하여 던전의 벽을 갈아서 가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모아서 만든 방패죠.”
저만한 방패 하나를 만들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써야 하는 거야?!
징그럽다는 생각과 함께 이재문이라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 라벨이 계단을 통해서 층을 이동하는 걸 보면 이재문의 생각대로 벽을 뚫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정말 움직임을 막는 게 가능할지도…….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은 존재군.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 블랙 라벨은 얇고 긴 기둥 모양으로 변해서 위로 솟아올랐고, 단숨에 날카로운 송곳으로 방패를 들고 있는 헌터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
“으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방패를 들어서 막은 헌터보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수가 더 많았다.
몇 년간 준비한 것들이 단숨에 무너지는 걸 보고 어쩌면 블랙 라벨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방패는 시선을 끄는 도구일 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간 이재문이, 아직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 블랙 라벨을 향해 약물을 뿌렸다.
촤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