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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168화 (168/176)

168화 : 검은 안개 (2)

“아직 토벌이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인류에 위험한 존재인 게 틀림없는데, 그냥 둘 순 없죠.”

이재문은 날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뻔하다.

아포칼립스 이후로 화이트 소드의 입지는 단숨에 헌터계에 자리매김했다.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헌터 협회와 달리, 화이트 소드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하지만 백진철이 협회장이 되고 나서는 뛰어난 운영 능력으로 화이트 소드는 헌터 협회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몬스터 따위의 말에 동요하고 흔들리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만약 블랙 라벨의 말을 듣고 약물을 넘겼는데 놈이 배신하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죠?”

이재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정보라가 반박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블랙 라벨의 토벌에 실패했을 때도 똑같은 위험성이 있는 거 아닌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이재문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보라를 바라봤다.

“물론 같은 위험성을 가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약물을 넘기면 언제 배신해 올지 모르는 후환을 남겨 두지만, 놈을 토벌하면 그대로 모든 게 끝입니다. 선택지는 누가 봐도 당연한 거 아닙니까?”

“…….”

입을 다무는 정보라를 보고 이재문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들 토벌에 실패할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니까 저희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확실히 이번 일은 부담감이 컸다.

기회가 오직 한 번이라는 건 누구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이재문이 먼저 나선 건 그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라도 다시 화이트 소드의 입지를 되찾겠다는 도박을 하는 거다.

“이대로 블랙 라벨을 방치하면 던전 공략은 불가능하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이재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정확히 급소를 파고들었다.

지금 공략이 멈추면 흐름이 끊기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이트 소드에게 맡기는 건 불안한데.

“최현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블랙 라벨을 토벌해야 한다면 제가 직접 나서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보는데요.”

기회는 한 번뿐.

사람 수가 많다고 블랙 라벨이 약물에 더 잘 맞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나나, 차윤지가 약물을 사용하는 게 정답이다.

“저는 블랙 라벨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있습니다. 믿고 맡겨 보시죠.”

“막을 수 있는 수단이요?”

“어떻게든 약물을 블랙 라벨에게 맞힐 수 있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가만히 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백진철이 앞으로 나섰다.

“좋습니다. 그럼 블랙 라벨의 토벌은 전적으로 화이트 소드에게 맡기도록 하죠. 협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모두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진철과 악수를 한 이재문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바로 준비에 들어가기 위해 가 보겠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백진철에게 다가가 물었다.

“협회에서는 정말 화이트 소드에게 이번 일을 일임할 생각인가요?”

백진철이라면 이재문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리가 없다.

“저는 협회장입니다. 블랙 라벨이 던전 공략의 장애물이고, 그걸 처리하는 게 현재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질 따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죠.”

“…….”

“회의는 이걸로 마칩니다. 추가로 전달 사항은 길드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다들 뭔가 석연찮은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마지막까지 남은 건 나와 차윤지였다.

“…블랙 라벨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는 건…….”

“글쎄요. 허세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수단이 있는 건지 모르죠.”

이재문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도박에 나설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만, 문제는 블랙 라벨을 그걸로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느냐다.

“12층과 13층의 몬스터를 블랙 라벨이 모두 처리해 뒀어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12, 13층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블랙 라벨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위협적이지만, 그가 다른 몬스터를 모조리 학살한 건 새로운 기회였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나오기 전에 12층과 13층 공략에 들어가면 다른 층보다 빠르게 공략할 수 있다.

“차윤지 씨 시간 있으신가요?”

“……?”

***

차윤지를 데리고 간 곳은 안형석이 있는 대장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회의가 길어져서 늦었네요.”

그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더니 뒤에 있는 차윤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윤지 씨도 같이 오셨군요. 두 분을 한 번에 뵙다니, 영광이네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내부가 우리를 반겼다.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들은 모두 안형석이 직접 만든 가구라고 한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찻잔을 내왔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야?”

“이재문 씨가 블랙 라벨을 처리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했을 때 대안을 만들어 둬야죠.”

차윤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안형석이 내가 준 검을 가져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검을 다시 만들거나 완전한 수리는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본 적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검이에요. 아마 아직 던전에서 발견되지 않은 거겠죠.”

사실 그 부분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안형석이 했던 말처럼 다른 금속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이 검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보수는 성공했습니다.”

“…! 그럼 이 검은 다시 쓸 수 있다는 건가요?”

안형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검을 강제로 더 쓸 수 있게 한 게 전부라는 겁니다. 내구도는 전보다 훨씬 약해졌고, 무게는 늘었습니다.”

안형석에게 검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검집에서 뽑았다.

스르릉.

확실히 검의 무게가 전보다 는 게 느껴졌다.

“예리함도 떨어졌습니다. 검의 빈 부분을 다른 금속으로 채웠으니 모든 걸 베는 게 일단 가능하지만, 수리하기 전이랑은 다르겠죠.”

그래도 블랙 라벨을 벨 수 있는 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 걸음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약물을 블랙 라벨에게 뒤집어씌우는 데 실패한다면 이 검을 써서 벨 수밖에.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더 뛰어났다면…….”

“아뇨. 안형석 씨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검 비용은 제가 반드시…….”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 써 주시는 데 돈까지 받을 수는 없죠. 이미 최현 씨에겐 갚지 못할 빚이 있으니까요.”

그의 이런 따듯한 점도 좋았다.

물론 검을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다.

“나는 여기에 왜 데려온 거야?”

차윤지가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끼어들었고, 그녀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

“이 검은 차윤지 씨가 쓸 거니까요.”

“뭐?!”

놀란 차윤지가 멍하니 검을 내려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차선책일 뿐이에요. 화이트 소드가 블랙 라벨에게 약물을 맞히는 데 실패하면 바로 공격할 겁니다.”

“그럼 네가 쓰면 되잖아.”

내가 버프 스킬을 쓴 상태에서 차윤지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놈을 속이기 위해선 차윤지 씨가 쓰는 게 맞아요. 화이트 소드가 실패하면 저는 또 다른 약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블랙 라벨을 위협할 겁니다. 놈은 반드시 절 경계하겠죠.”

처음 화이트 소드가 사용한 약물이 가짜일지도 모르니 블랙 라벨은 나를 경계하며 움직일 거다.

죽어도 살아날 수 있는 나라면 미끼 역할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서 가짜 약물을 던진다면, 놈은 그게 진짜라고 믿을 테니까.

“그 사이 차윤지 씨가 검으로 블랙 라벨을 베는 겁니다. 단순히 제가 미끼라서 차윤지 씨에게 맡기는 것만은 아니에요. 이 검이 블랙 라벨에게 통한다는 걸 알면 블랙 라벨은 더욱 경계하며 움직이겠죠.”

그때 차윤지의 ‘간파’라는 초월 능력이 빛을 발할 거다.

일격에 놈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결과가 없을 테니까.

“…내겐 너무 무거운 일이야.”

차윤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그녀도 알고 있을 거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라는 것을.

“그런데 왜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야? 아까 회의에서 말했으면 좀 더 좋은 방법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기왕이면 이 계획은 저와 차윤지 씨, 둘만 알고 있는 거로 하고 싶거든요. 다른 대안이 있다는 걸 알면 화이트 소드가 필사적으로 덤비지 않을 테니까요.”

우린 어디까지나 플랜B다.

첫 번째 작전이 성공하는 것보다 좋은 결과물은 없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굳이 이 계획을 공개할 필요는 없지.

“하하, 저도 듣고 있는데요?”

멋쩍게 웃는 안형석을 보고 엄지를 세웠다.

“안형석 씨는 괜찮습니다. 이번 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그가 검을 수리해 주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계획조차 불가능했다.

“잠깐!”

“……?!”

앞에서 연기와 함께 튀어나온 셀렌이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앉았다.

“엑스를 너무 얕보고 있는 거 아니야?!”

치이익…….

“으아악! 탄다!”

다급히 셀렌을 테이블에서 떼어 놓았다.

셀렌은 불덩이 같은 존재였기에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다행히 나는 계약자라서 셀렌의 불에 전혀 영향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그건 뭐야?!”

“몬스터?!”

당연하게도 차윤지와 안형석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음… 블랙 라벨과 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인공 몬스터예요. 지금은 저랑 계약한 상태지만.”

“말했잖아. 엑스는 무적의 존재라고.”

셀렌은 주변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엑스라는 건…….”

“블랙 라벨의 원래 이름이에요. 이름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르지만.”

다시 셀렌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이 작전으론 블랙 라벨을 죽일 수 없다는 거야?”

“맞아. 블랙 라벨을 이루고 있는 입자들은 베어도 다시 붙을 수 있어. 검으로 베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야. 약물을 닿으면 입자들이 모든 힘을 잃지만,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해.”

“그럼 약물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셀렌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엑스도 핵이 존재하거든. 물론 평소엔 벨 수 없지만, 그 검이 모든 걸 벨 수 있는 검이라면 핵도 벨 수 있겠지.”

“뭐야, 그럼 가능하잖아!”

차윤지의 간파라는 초월 능력은 상대의 약점을 바로 보여 준다.

핵도 금방 찾을 수 있겠지.

“문제는 그 핵이라는 게 엄청 작다는 거야. 심지어 놈은 자유롭게 핵의 위치를 몸 안에서 이동시킬 수 있지.”

“……!”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돼.”

검을 꽉 움켜쥔 차윤지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어쩐지 괜히 그녀에게 짐을 안겨 준 것 같아서 미안한 기분이었다.

“분명 해냈을 거야.”

“네?!”

“내 스승님이나 너의 스승님이라면 분명 해냈을 거라고.”

방금과는 전혀 다른 결연한 얼굴의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차윤지의 스승이었던 귀검, 그리고 내 스승님이었던 서진욱.

두 사람이라면 가능했을 거다.

“그러니까 나도 해내야 해. 그래야 두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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