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검은 안개 (1)
쐐액!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간 뒤였다.
블랙 라벨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나를 발견한 블랙 라벨은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괜찮으세요?!”
“…일단은.”
많이 놀란 것 같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무사해 보였다.
이민하의 방패는 모든 것을 차단할 수 있는 탓인지 통과할 수 없는 건가.
두 사람 앞에 서서 블랙 라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블랙 라벨은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네 공격을 피한 거야?”
전에 만났을 때랑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블랙 라벨은 가만히 서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짐작 가는 게 있지만, 틀렸으면 좋겠네요.”
블랙 라벨은 저번 전투에서 완전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엔 공격을 막다가 나중엔 내 가드를 통과하는 형태로 공격해 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공격을 굳이 피했다는 건 아마 내가 가진 약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겠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덤벼오지 않는 블랙 라벨은 상당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 가지고 있는 거냐?”
“……?!”
전에 들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완전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블랙 라벨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역시 약물에 대해 알고 있군.
블랙 라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순히 정신적인 성장만 해 온 게 아니다.
연구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험관 안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약물의 존재를 아는 것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넌 뭐지? 인간의 외형을 가진 몬스터인가?”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난 인간이거든?!”
발끈해서 소리치자, 블랙 라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군. 저번에 네놈은 내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어째서 멀쩡히 살아 있는 거지?”
내 능력을 모르는 블랙 라벨의 입장에선 지금 이 상황이 당혹스럽겠지.
죽였던 적이 다시 앞에 나타났으니까.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블랙 라벨이 약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나 역시 쉽게 움직일 수 없다.
만약 놈에게 약물을 뿌리는 데 실패한다면 다신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다.
“깨어나기 전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도 없잖아.”
내 말에 블랙 라벨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약물을 사용해 블랙 라벨과 전투를 벌이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블랙 라벨을 정말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어리석은 말이군. 애초에 날 먼저 공격한 게 누구였지?”
“그건! 네 정체를 모르니까 그런 거라고. 이런 던전에서 갑자기 새까만 놈이 다가오면 당연히 싸울 수밖에 없지.”
블랙 라벨이 아군이 되진 못하더라도 중립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싶었다.
약물을 그에게 사용하는 데 실패하면 던전 공략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니까.
“애초에 네 목적은 뭐지?”
“…….”
내 질문에 블랙 라벨은 조금 더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목적? 목적이라…. 만약 시험관에서의 기억이 없다면 지금 인간을 위해 몬스터와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날 만든 인간들은 나를 그저 무기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내 정신이 깨어 있어서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거겠지.”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블랙 라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도구로 나를 사용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내게 지능을 주고, 동료로 만들 거란 헛소리를 해 댔는지 묻고 싶다고.”
“그건…….”
아마도 지능을 가진 쪽이 더 강하니까.
명령만으로 움직이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에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명령이 오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싸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지금 블랙 라벨에게 할 순 없었다.
“그들은 과거의 망령들일 뿐이지. 이미 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변하는 건 없다.”
“그럼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가?”
어쩌면 정말 블랙 라벨과 중립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블랙 라벨은 내 물음에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
“약물을 내놔라.”
“뭐?!”
깜짝 놀라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블랙 라벨이 조금씩 다가왔다.
“인간과 싸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네가 그 약물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나를 죽일지 모른다. 그러니 약물을 내놓는다면 나도 인간을 공격하지 않겠다.”
화도를 꽉 움켜쥐며 인상을 구겼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블랙 라벨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인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겠지.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우리에게 넌 너무 위험한 존재야. 만약 약물을 너에게 넘겼는데, 네가 우리를 공격해 오면 우린 대항할 수단이 없어.”
“최현 씨?!”
솔직한 내 말에 뒤에 있던 채하나가 놀랐다.
대놓고 블랙 라벨에게 약물만 아니면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말해 준 거나 다름없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허세를 부리며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그와 최선의 관계를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서로 같은 생각이군. 인간은 탐욕스럽고 더러운 종족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이용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
블랙 라벨이 인간을 혐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물러나지. 하지만 다음에도 약물을 넘기지 않는다면… 한쪽은 죽을 거다.”
그렇게 말한 블랙 라벨은 마치 벽에 스며들듯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다.
긴장감 때문에 막혀 있던 숨통이 그제야 트였다.
“후우…….”
뒤에서도 이민하가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통로가 좁진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반갑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셀렌, 안내 부탁해.”
퍼엉!
연기와 함께 튀어나온 셀렌이 앞장서서 날아가며 말했다.
“맡겨 둬!”
“……?!”
셀렌을 처음 보는 이민하와 채하나의 눈이 동그래져서 내게 설명을 바라는 눈을 하고 있었다.
유적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두 사람에게 셀렌에 대해 설명해 줬다.
그리고 책에서 읽었던 내용과 셀렌과의 계약을 했던 것도 모두 말해 줬다.
“몬스터라고 하기엔 너무 귀엽게 생겼는데요?”
“역시 보는 눈이 있네.”
채하나와 셀렌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동안 이민하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약물의 존재를 블랙 라벨이 알고 있다는 거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맞아 주진 않을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마 다음에 블랙 라벨을 만나더라도 큰 이변이 없다면 서로 양보하는 일은 없겠지.
마음 같아선 블랙 라벨과 싸우는 일이 없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약물을 넘길 순 없다.
블랙 라벨은 우리에게 대재앙과도 같은 존재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 봐야죠.”
그에게 약물을 넘긴다는 선택지를 완전히 지운 건 아니다.
만약 넘기지 않고 전투를 벌였는데 토벌에 실패한다면 블랙 라벨은 우리를 적으로 돌리고 학살이 시작되겠지.
그럴 바엔 오히려 그를 믿고 약물을 넘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중대한 사안이기에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 도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 형씨!”
“이건……!”
“피 냄새?!”
채하나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유적 밖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역겨워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진한 피 냄새에 우리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달려갔다.
유적을 뒤덮고 있는 초록색 숲을 붉은 피로 칠해 놓은 듯 사방에 피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유적 냄새 때문에 전혀 몰랐어. 블랙 라벨의 짓인가?”
“14층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이죠. 일단 서둘러서 9층으로 가죠.”
***
“아군인지 적인지 알 수가 없군.”
“몬스터는 당연히 적으로 봐야죠! 놈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도진욱이 발끈하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욱은 씩씩거리며 당장에라도 싸우러 갈 태세였다.
“만약 약물을 넘겼는데 놈이 우리를 공격해 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합니다. 세상에 몬스터의 말을 믿는 헌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어떡하죠?”
SS급 헌터를 비롯해서 주요 길드의 마스터들이 모인 자리였다.
다들 진지한 얼굴로 이번 사안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나도 총지휘관이자 SS급 헌터로 회의에 참석했고, 다른 헌터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실패할 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요? 지금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겁먹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건 좋지만, 상황에 따른 대안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안 돼요. 항상 일들이 계획대로 풀리진 않으니까요.”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건 정보라와 도진욱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려는 정보라와 달리, 도진욱은 패기 있게 블랙 라벨과 싸워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토론을 다른 헌터들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섣불리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최현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중에선 유일하게 블랙 라벨과 만나셨잖아요.”
백진철은 내 의견을 물어 왔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쏠렸다.
어쨌든 혼자서 블랙 라벨과 싸운 경험이 있고, 가디언에게서 약물을 가져온 것도 나였다.
내 의견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블랙 라벨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몬스터의 말에 인류 전체의 운명을 맡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요.”
“역시!”
내 말을 듣자마자 도진욱이 이겼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저희가 먼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약물도 있으니 당장 토벌하기 위해 팀을 꾸리면…….”
“정보라 씨가 말씀하신 대로 저희에겐 대안이 없습니다. 약물의 존재를 블랙 라벨이 알고 있는 한, 쉽게 당해 주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약물의 성분을 분석하고 추가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지 기다려 보죠.”
대안만 있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늘어난다.
지금처럼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거다.
“저도 최현 씨의 말에 동감이에요. 도진욱 씨도 아까 얘기 들으셨죠? 블랙 라벨은 혼자서 12층과 13층에 있는 몬스터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우리는 14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를 발견했다.
블랙 라벨은 10층에서 모습을 감추고 그 후로 12층과 13층의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가 14층으로 갈 땐 운이 좋게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블랙 라벨의 그런 행동은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몬스터는 게이트를 파괴하지 않는 한 다시 늘어날 겁니다.”
블랙 라벨은 게이트는 손대지 않았기에 몬스터의 수는 다시 늘어날 거다.
하지만 블랙 라벨의 그런 행동은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블랙 라벨은 몬스터입니다. 반드시 토벌해야죠.”
“……!”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재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 화이트 소드에게 맡겨 주신다면 완벽하게 처리해 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