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블랙라벨(3)
“…던전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쓰러뜨릴 수 없는 블랙 라벨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우리는 14층까지 올라왔다.
14층은 아직 지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한참을 헤맸다.
이틀이나 걸렸지만, 발렌의 후각이 있기에 그나마 몬스터들과의 전투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게 유적인가요?”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현재 공략된 층은 9층까지라, 10층부터는 몬스터들이 던전에 깔렸다.
다수로 움직이는 건 오히려 몬스터에게 발각될 위험이 커서 나와 채하나, 그리고 이민하 셋이 움직이기로 했다.
유적은 흰색의 거대한 건축물에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모습이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져서 찾기 힘들었지만, 그 모습은 가히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상당히 넓은데요?”
“그러게. 누가 무슨 이유로 던전에 이런 걸 만든 걸까.”
무슨 건물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쪽에 계단이 있어요!”
채하나의 목소리에 이민하와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 말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아마 이 계단은 류설영이 말했던 곳일 거다.
그는 블랙 라벨이 이 계단을 지키고 있어서 아래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들어갈 거야?”
불안한 표정의 이민하의 물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10층에서 나와의 전투 이후로 블랙 라벨은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춰 버렸다.
9층 계단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블랙 라벨이 내려가지 않았기에 10층 위쪽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했다.
놈이 마음먹고 내려온다면 모든 전력을 뒤로 후퇴해야 했기에 아래쪽은 긴장된 상태였다.
“서두르죠.”
당연히 총지휘관인 나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 유적이었으니까.
“어때, 발렌?”
“…틀렸어. 유적 전체에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해서 다른 냄새를 찾을 수가 없어.”
발렌의 후각에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
어쨌든 이 유적은 블랙 라벨이 원래 있던 장소다.
블랙 라벨과 비슷하거나 같은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역시 혼자 오는 게 나았겠네요.”
“그런 말 하지 마.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거니까.”
이민하와 채하나는 내가 몇 번이고 반대했지만, 고집을 부려 따라왔다.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든든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만약의 사태에 위험할 수 있기에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엄청 넓은데요?”
계단을 따라 쭉 내려오자 커다란 통로가 우리를 반겼다.
10명이 줄 서서 이동해도 될 정도로 넓은 통로는 이 지하가 얼마나 큰지 과시하는 듯했다.
“이쪽에 룬 문자가 적혀 있어.”
“발렌.”
랜턴을 통로의 벽 쪽에 비추니 이민하의 말대로 룬 문자가 보였다.
발렌은 룬 문자를 어느 정도 읽는 게 가능해서 블랙 라벨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틀렸어.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이상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야. 암호 같기도 하고…….”
꽝인가.
“일단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죠.”
커다란 통로는 우리가 걸을 때마다 발소리가 울려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문?”
통로 옆쪽에 사람 하나가 기어서 들어갈 만한 작은 문이 있었다.
“어쩌죠?”
“일단 제가 들어가 볼게요. 위험할 수 있으니 두 분은 물러나 계세요.”
작은 문고리를 당기자 문은 가볍게 열렸고, 안쪽을 랜턴으로 비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나.
“조심하세요.”
엉금엉금 기어서 문을 통과하자 다시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이번엔 복도 같은 느낌이라 원래 우리가 있던 큰 통로에 비하면 상당히 좁았다.
콰앙!
“……!”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내가 통과한 문이 닫혔다.
“채하나 씨! 이민하 씨!”
쿵쿵!
문을 밀고 잡아당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목소리까지 닿지 않는 건가.
마치 나를 다른 두 사람과 떨어뜨리려는 것 같아서 더 불안해졌다.
두 사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블랙 라벨 같은 놈을 만나면 위험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봐야겠어.”
여기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서둘러서 움직이는 수밖에.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지하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도는 깔끔한 느낌이었다.
바닥엔 체크무늬 타일이 깔려 있었고, 땅굴이라기보단 저택의 복도 같았다.
벽 사이사이에 놓인 촛등은 원래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보여 주는 듯했다.
“형씨, 다시 문이야.”
“들어가 봐야겠지?”
미로같이 얽혀 있는 지하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끼이익.
문을 열면서 바로 허리춤의 화도에 손을 가져갔다.
언제든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벨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은 방구석에 있는 유골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누군가 서재로 쓴듯한 방은 책상과 서랍장, 그리고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뼈는 아닌 거 같은데?”
어린아이 정도의 키를 가진 유골은 두개골이 너무 커서 아이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뼈의 형태 자체도 내가 아는 것과는 달랐다.
“아까 그 작은 문은 이 사람을 위한 건가.”
“책을 좀 읽어 보는 게 어때?”
발렌이 룬 문자를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 혼자 왔다면 아무런 정보도 없을 수 없었을 테니까.
책상 위에 있는 책의 먼지를 걷어 내고 펼쳐서 발렌에게 보여 줬다.
“…틀렸어. 아무래도 이건 일기인 거 같아.”
“일기?”
“이 지하 건물을 청소한 내용이랑, 뭘 먹었는지 같은 일상 내용이야.”
그럼 이 일기의 주인은 이곳을 관리하던 관리자 같은 건가?
“여기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읽어 줘.”
“완벽하게 해석하지는 못하니까 내가 의역해 볼게.”
세상에 룬 문자를 읽어 주는 오크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니까.
“‘오늘은 주인님이 오랜만에 방에서 나오셨다. 전에 봤을 때보다 피곤해 보이신다. 그것이 완성되려면 멀었으니 앞으로도 한참 이런 생활을 반복하시겠지.’라는데.”
이곳의 주인은 학자 같은 건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것’이라는 존재였다.
만약 블랙 라벨을 말하는 거라면 블랙 라벨은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라는 의미다.
나는 서랍에 있는 다른 책들을 꺼내서 발렌에게 보여 줬지만, 14층 숲에 있는 약초에 관한 내용이라던가 요리에 관한 내용이 전부였다.
“다른 방으로 가 보자.”
복도를 따라 이동하자 정면에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로 만들어진 문은 문고리에 쇠사슬이 걸려 있던 흔적이 보였고, 사슬은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듯 절단면이 깔끔했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랜턴을 비추고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유리관이 깨져 있는 게 보였다.
“무언가 여기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게 아닐까?”
“그게 블랙 라벨이라는 거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이곳은 상당히 오래된 곳으로 보이는데 왜 이제야 블랙 라벨이 밖으로 나와서 날뛰고 있는지, 블랙 라벨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왜 그런 놈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형씨! 저기도 책이 있어.”
연구실로 보이는 방구석에 책상과 그 위에 책이 보였다.
서둘러 책을 펼쳤고, 룬 문자를 가만히 읽던 발렌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찾은 것 같아.”
***
“그러니까 이 지하 공간을 만든 게 인간이라는 거지?”
책에 있는 내용이 전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굳이 거짓말로 이런 연구 일지를 남겨 뒀을 리가 없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아까 일기에서 봤던 주인이라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마치 길드 같은 조직이라는 건가.”
이 책에 나온 ‘흑일’이라는 조직은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집단이었다.
던전의 완전 공략.
아주 먼 과거에 만들어졌던 그 조직은 인간은 절대 몬스터에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최강의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앙그라마이뉴랑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이군.”
앙그라마이뉴는 몬스터를 컨트롤해서 세상을 멋대로 주무르려고 했다면, 이들은 직접 몬스터를 만들어서 던전을 공략하려고 했다.
어떤 몬스터보다 강한 몬스터를 만든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고, 모든 사람이 반대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흑일’은 이곳에 몰래 비밀 연구소를 만든 것이다.
“여러 몬스터에게서 얻은 재료와 던전 내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인위적인 몬스터를 만든 거야.”
“어떤 몬스터에게도 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는 건가.”
그들이 만들어 낸 건 블랙 라벨이 확실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도 공격할 수 있는 무적의 존재.
확실히 블랙 라벨은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초에 안개처럼 공격이 통과하는 적을 무슨 수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10년이라기엔 이 건물은 더 오래된 것 같지?”
연구 일지에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블랙 라벨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기록을 보면 연구를 시작한 후로 30년이나 흐른 뒤였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연구는 진행 중이었다.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지만, 흑일이라는 조직은 블랙 라벨의 완성을 직접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진 듯했다.
한참 뒤에 깨어난 블랙 라벨은 이제야 날뛰기 시작한 거고.
“만약 연구가 성공했다면 정말 블랙 라벨로 던전 공략이 가능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들의 계획에서 가장 신기한 점은 블랙 라벨을 강제로 컨트롤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류설영의 생각대로 블랙 라벨은 이성이 존재하고, 지능이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 블랙 라벨은 시간에 따라 사고가 성장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흑일은 직접 블랙 라벨을 키우며 그의 사고 능력과 함께 흑일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시키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이 흑일이라는 조직은 어떻게 14층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던 거지?”
“던전 내부로 이동할 수 있는 초월 능력을 가졌겠지.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곳보다 숨기기 좋은 장소는 없으니까.”
유한성의 능력이나, 비숍의 능력처럼 던전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최고의 은신처가 된다.
“문제는 여기에도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적혀 있지 않다는 건데.”
블랙 라벨의 정체를 확인했지만, 정작 어떻게 쓰러뜨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그걸 모르는 이상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연구실에서 나가려는 순간, 뒤쪽에 붉은색 빛이 보였고, 깜짝 놀라서 검을 뽑았다.
“……!”
“잠깐!”
화도로 공격하려는 순간,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빛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여간 인간은 성격이 급하다니까.”
그의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작은 도마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