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블랙라벨 (2)
검은 그림자, 정확히 표현하자면 새까만 안개가 한곳에 뭉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건 키도, 모습도 완전히 사람과 같은 형태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류설영이 내게 말해 줬던 ‘블랙 라벨’ 뿐이었다.
“물러서세요.”
채하나를 뒤로 당기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직 저 그림자가 블랙 라벨이라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그 블랙 라벨이라면 여기 있는 우리 둘은 물론이고, 다른 길드원들까지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다.
“발렌, 아무 냄새도 안 났다며.”
발렌의 후각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온 적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내가 형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저거 몬스터라기엔 아무런 냄새도 안 나. 정말 몬스터가 맞긴 해?”
“냄새가 없다고?!”
발렌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놈은 아주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반대로 뒷걸음질 쳤다.
“채하나 씨. 도망치세요.”
“네?!”
“일단 마스터에게 가서 알리는 게 중요해요. 상황에 따라서 도망치지 못할지도 몰라요.”
류설영은 저 ‘블랙 라벨’이라고 부른 놈이 유적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4층은커녕 10층에서 나타났다.
또 어떤 변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면으로 레이드 하는 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서두르세요. 제가 반드시 지켜 드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잠시 망설이던 채하나는 내 표정을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만났던 류설영이 둘보다 강하다고 했다.
순식간에 나는 물론이고 채하나까지 죽을지 모른다.
[System : 공격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공격력이 45% 상승합니다. -5:51-]
[System : 속도 버프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39% 상승합니다. -7:19-]
[System : 방어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방어력이 33% 상승합니다. -6:14-]
채하나는 버프를 다 걸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따 봬요.”
“…….”
난 대답 대신 시선을 앞에 있는 블랙 라벨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나가 멀어지는 걸 살짝 흘겨본 뒤, 화도를 뽑았다.
어떤 물리 공격도, 마력계 공격도 먹히지 않았던 놈을 어떻게 쓰러뜨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야 모르지.”
“……?”
발렌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적을 상대인걸.
“일단은 5개 정도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이 거만해졌네. 나는 20개 정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당연하게 내 라이프로 적의 전투력을 판단하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농담이 아니라는 게 슬플 뿐이다.
타다닷!
다가오는 블랙 라벨을 향해 단숨에 달려가 거리를 좁혔다.
오히려 내가 접근하자 블랙 라벨은 움직임을 멈췄다.
쌔엥-!
화도를 뽑으며 동시에 놈에게 휘둘렀다.
5공식, 화왕.
“……?!”
원래 놈의 팔이었던 게 둥근 방패 모양으로 바뀌어서 검을 가볍게 막아 냈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감각이 아니라, 충격 자체가 흡수되어 버린 느낌이다.
일단 한 걸음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고, 방패 모양이던 팔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왕에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어.”
“보통 놈은 아니네.”
화왕은 월하백화식 중에서 가장 빠른 기술이었다.
심지어 채하나의 버프까지 받은 상태였는데 허무하게 막혔다는 게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공격이 막힌다는 건 벨 수 있다는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는걸.”
류설영은 그림자를 베는 듯한 감각이라고 말했다.
아예 공격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런 상태라면 놈은 어째서 굳이 팔을 방패로 바꿔서 막은 거지.
이해할 수 없다.
“형씨, 온다!”
이번엔 놈이 나를 덮쳐 왔다.
달린다기보단 땅을 미끄러진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듯했다.
양팔이 검의 모양으로 바뀐 놈은, 나를 찢어발길 듯이 팔을 휘둘러 댔다.
쐐액! 쌔액!
쉬지 않고 휘두르는 두 팔은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허접했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정확히 내 급소를 노리고 파고들었지만, 어디를 노리는지 뻔하게 보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나… 너… 죽인다.”
“……!”
부웅-!
팔을 검으로 쓰는 만큼 거리가 좁았고, 놈의 공격이 빗나간 순간, 역습을 가했다.
그러나 화도는 아무것도 베지 못한 채 놈을 관통해 지나갔다.
“방금 이 자식 말한 거지?”
“발렌이 있어서 다행이야. 혼자 들었으면 환청인 줄 알았을 테니까.”
마치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저런 무서운 말을 중얼거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말한 거야?!
류설영은 이 녀석이 말을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발렌도 그렇고, 상위 몬스터들 중에선 말을 하는 놈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르티아나 리치왕처럼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 몬스터들은 대체로 지능이 높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스킬은 쓰지 않는 거야?”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이번 전투에서 놈을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서 스킬은 아껴 두는 게 좋다.
라이프를 몇 개 정도 소모할 각오를 하고서라도 지금은 이 자식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놈의 공격은 확실히 타격 기술인데, 어째서 내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거지?”
블랙 라벨이 나를 벨 수 있다는 건 물체라는 의미인데, 반대로 내 공격은 들어가질 않는다.
그리고 아까 처음 내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죽… 죽어!”
여전히 어린 아이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팔이 긴 낫의 형태로 변해 단숨에 허공을 찢었다.
쌔엑-!
놈의 공격을 받아 내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최현 씨! 제 말 들리세요? 지금 상황이 어떤가요?”
유미래의 목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블랙 라벨의 공격을 피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날아갈 상황입니다. 일단 10층에 있는 전력은 모두 9층으로 내려보내 주세요.”
“그 정도인가요?!”
공격은 통하지도 않고, 무기를 바꾸며 달려드는 놈을 무슨 수로 이기란 거야?!
짧은 전투만 했을 뿐이라 놈이 어떤 공격 수단을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무리해서 싸우는 것보단 물러나서 정보를 얻어야 해요.”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다.
좀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 내가 여유를 두고 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알겠어요! 마스터한테 그렇게 보고할게요.”
채하나가 대략적인 정보를 전달했을 테니까 신아람이 알아서 해 주겠지.
어쨌든 나는 던전 공략 총지휘관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다.
협회에서도 긴급 상황이라면 충분히 움직여줄 거다.
“문제는… 어떻게 놈을 이기느냐는 건데.”
“마력계는 전격만 통하지 않았던 거 아니야? 불로 태우거나, 얼려 버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발렌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가진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류설영이 말해 준 게 전부였고, 그 정보조차 틀렸다.
유적 근처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기까지 내려왔다.
“뭐든 가능한 건 다 시험해 보는 수밖에.”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기다란 낫이 나를 향해 사선으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화도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뭐?!”
원래라면 화도와 닿아서 막혀야 할 공격이 닿는 부분만 관통해서 그대로 낫이 내 목에 닿았다.
쌔-엥!
내 목이 잘린 뒤에도 놈은 미친 것처럼 몸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최악의 죽음이군.
절대로 복습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다.
마지막 순간은 짧았지만, 상상하기도 싫었다.
“끄으윽.”
떨리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자, 발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괜찮은 거야?”
“정신은 전혀 괜찮지가 않네.”
즉시 부활로 바로 부활했지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니.
잠깐의 전투로 알게 된 게 있다면, 놈은 원할 때 원하는 부분을 실체화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검을 관통하는 동안은 그림자 상태로 있다가 관통한 직후에 실체화해서 내 목을 베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그렇게 공격해 오지 않은 거지?
“정신 차려, 형씨. 일단 여긴 너무 위험해. 다시 놈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고.”
발렌은 불안한 듯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후각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언제 어디서 놈을 만날지 모른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자.”
***
다시 길드원들과 합류했고, 상황을 협회에 전달했다.
협회는 이 상황에 대해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놈을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진 않겠지만.
“유미래 씨, 준비됐나요?”
“네. 제가 전달해 드릴 테니까 말하시면 돼요.”
유미래에게 류설영과 통신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나마 놈과 싸운 경험이 있는 류설영이라면 새로운 것을 알려 줄지 모르니까.
나는 천천히 놈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하나하나 전달했다.
방패로 공격을 막은 것부터 아이 목소리를 낸 것, 그리고 방어를 뚫고 공격을 해 온 것까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만, 어쩌면 놈은 정말 어린애일지도 몰라. 라고 하시네요.”
유미래가 류설영의 말을 전달해 줬고,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애요?”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야. 그래서 처음 네 공격을 막기 위해 방패 모양으로 바꾼 거지.”
유미래는 억양이나 말투까지 흉내 내며 류설영처럼 말했다.
“그 말은 전투하는 동안 저를 쓰러뜨리기 위해 성장했다는 의미인가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물체를 관통하는 법을 몰랐다가, 나와 싸우다가 그걸 깨달았다는 건가.
이보다 더 최악의 가정은 없었다.
문제는 류설영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점이다.
그게 아니면 놈의 행동들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내게 어린아이 목소리로 소리친 모습은 놈이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거나 가지고 논 건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
“나랑 싸웠을 땐 말을 한 적도 없어. 그사이에 성장했다는 의미지. 어쩌면 유적에서 멀어진 것도 그것과 연관된 일일 수도 있고.”
만약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놈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놈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거니까.
일단 블랙 라벨이 가진 능력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사기라 놈이 제대로 다루게 되면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다.
“다른 마력계 공격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능성은 있지만, 너무 위험해. 지금 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만약 시험을 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공격이 통한다면 다행이지만, 전격처럼 대미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면 놈을 막을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떻게…….”
“유적에 가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