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블랙라벨 (1)
“완전히 고치는 개념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내구도를 돌릴 수 있는 거죠?”
“검이라는 건 쓸 때마다 충격으로 인해서 내구도가 깎여 나가는 구조죠. 많이 쓸수록 검에 대미지가 점점 쌓이게 됩니다.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칼날이 무뎌지게 되죠.”
그렇게 말한 안형석은 내가 준 검을 들고 쭉 훑어봤다.
“수리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정확히는 보수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원래 이 검이 만들어진 구조를 알 수 없으니 다른 금속으로 균열을 메꾸는 겁니다.”
“그래도 원래 검이 가진 능력은 유지되나요?”
내 물음에 안형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해 보지 않고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대로 검을 버리는 것보단 도전해 보는 쪽이 좋겠죠.”
“이미 안형석 씨에게 드린 물건이니 어떻게 할지는 안형석 씨가 결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제대로 보수가 된다면 제가 꼭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하하하, 그건 물론이죠. 최현 씨가 써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안형석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뒤 뒤를 돌아서자, 차윤지가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지나쳐서 안형석에게 걸어갔다.
“부탁드려요.”
“아… 알겠습니다. 모레쯤 찾으러 오시면 될 겁니다.”
나와 즐겁게 대화했던 안형석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안형석에게 검을 맡긴 차윤지는 바로 걸음을 돌렸고, 안형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원래 이런 분위기인가요?”
“하아, 어쩐지 대하기 어려운 분이에요. 항상 저 말만 하고 사라지시니까.”
“그래도 안형석 씨에게 검을 맡긴다는 건 그만큼 실력을 인정했다는 거니까 기뻐하셔도 좋을 거예요. 차윤지 씨는 검에 대해선 까다로운 분이거든요.”
“하하하, 그건 다행이네요.”
안형석에게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서둘러서 차윤지를 따라갔다.
그녀의 바로 옆으로 붙으며 물었다.
“원래 안형석 씨에게 검을 맡기셨어요?”
“이름 있는 헌터들 사이에선 유명하니까.”
그녀는 내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쉬지 않고 일을 하느라 차윤지를 만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차윤지는 신월 길드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총지휘관이라는 위치에 있으면 각 팀의 보고를 받을 수 있기에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는지도 금방 알 수 있다.
은퇴한 이재문을 제외하고, 다른 4명의 SS급 헌터들 중에서 차윤지의 팀이 압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물론 그녀의 팀은 차윤지 원맨팀이 아니라 팀원 전체가 실력자라는 이유도 있겠지.
“너, 검술 연습은 제대로 하고 있어?”
“네? 실전에서 많이 휘두르니까…….”
“…연습이랑 실전은 다르잖아. 자세를 고정시키고 잘못된 자세를 고치려면 연습은 필수야.”
걸음을 멈춘 차윤지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다 금방 나한테 다시 따라잡힐걸.”
“……?”
말을 마친 차윤지는 어쩐지 화가 난듯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괜히 따라가 봐야 욕만 먹을 것 같아서 그대로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차윤지를 앞섰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차윤지가 따라잡힌다고 말하니까 묘한 기분인걸.
***
“자, 그럼 계획대로 우리는 E-7 구역까지 진행한다. 큰 이동 경로는 같지만, 양쪽으로 나뉘어서 움직일 거야. 시야를 넓히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네!”
신아람의 지휘로 다시 던전 공략에 들어갔다.
총지휘관이지만, 직접 전투에 들어갈 땐 신아람이 길드 마스터기에 그녀의 오더를 따른다.
팀을 두 개로 나눈 건 다 같이 이동하다가 한 번에 함정에 빠지거나 하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1팀은 이 길을 따라서 이동하고, 2팀은 빙 돌아서 이렇게 따라가.”
바닥에 넓게 펼쳐진 지도로 우리의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확실히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층이라 다른 층에 비해 진행 속도가 빨랐다.
1팀은 신아람과 유미래, 이민하, 공명준이 한 팀이었고, 2팀은 나와 장수주, 그리고 채하나가 한 팀이었다.
“10분 간격으로 미래가 2팀에 통신 걸 테니까 2팀은 통신 때마다 필요한 것들 보고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힘차게 움직여 보자고!”
“화이팅!”
10층은 던전이라고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아름다운 숲, 그리고 흐르는 냇가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10층을 공략하면 이곳에 전진 기지를 만들 수 있기에 공략에 서둘러야 했다.
“정면에 오우거 두 마리 발견했습니다.”
“2팀에서 처리하라고 하시네요.”
“오케이.”
유미래의 통신으로 오더를 받고 바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System : 속도 버프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39% 상승합니다. -4:57-]
채하나의 버프와 동시에 오우거가 우리를 발견하고 몸을 돌렸다.
거대한 몸체의 오우거는 한 손에 들고 있는 몽둥이를 내 쪽으로 힘껏 휘둘렀다.
쿠웅!
위협적인 파괴력이었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장수주 씨!”
“네!”
카드드득!
바닥에 내리친 오우거의 몽둥이는 장수주의 능력 때문에 그대로 땅과 연결되어 얼어 버렸다.
무기가 땅에 붙어 버리자 당황한 오우거가 몽둥이를 떼려고 안간힘 쓰는 동안 그의 팔을 계단 삼아 타고 올라갔다.
스르릉!
화도를 뽑고 손에 움켜쥐는 순간, 희열이 몸을 감쌌다.
실제 전장에서 직접 쓰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오랜만이네. 이 느낌.”
촤아아악!
오우거의 팔에 검을 꽂은 채로 위로 쭉 달리자, 피부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쏟아져 나왔다.
“쿠에에엑!”
그대로 어깨까지 뛰어올라 팔을 몸쪽으로 당겼다.
4공식, 매화.
쐐앵!
단번에 팔을 튕기듯 앞으로 펼쳤고, 깔끔하게 선회한 검이 오우거의 목을 베었다.
손에 감기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비숍에게서 뺐었던 검은 분명 사기적인 힘을 가졌지만, 손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오우거의 몸체가 옆으로 쓰러지는 동안 뒤에 있던 다른 오우거로 옮겨 탔다.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나를 보고 당황한 오우거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으아아! 떨어진다!”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는 내게 오우거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카앙!
“……!”
정확하게 내 앞에 펼쳐진 베리어가 오우거의 공격을 막았고, 덕분에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덕분에 괜찮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하시지 바로 옮겨 가면 어떡해요?!”
“하하, 잔소리는 나중에 부탁해요.”
채하나의 잔소리에서 도망치듯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준비됐어?”
“언제든 가능하지.”
4층과 5층을 공략하자마자 가장 먼저 발렌의 의족 재료를 확보했다.
덕분에 신아람은 제대로 된 발렌의 의족을 만들 수 있었다.
퍼플 스톤을 써서 만든 의족은 더 이상 내구도가 약하지 않았고, 발렌의 어떤 움직임에도 망가지지 않는 튼튼한 장비였다.
“간다!”
발렌은 항상 몽둥이가 손에 익는다고 같은 무기를 써 왔지만, 둔기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새로운 무기를 장만해 주었다.
내 키보다 조금 작은 그레이트 소드는 발렌에게 딱 어울리는 무기였다.
“흐랴아앗!”
발렌이 있는 힘껏 오우거의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에엑!”
사실 이건 벤다고 하기보단 힘으로 찢어 버린다고 하는 게 어울렸다.
발렌의 무식한 파괴력에 발이 뜯겨 나간 오우거는 균형이 흔들렸지만, 발렌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어림도 없지!”
카앙!
매화는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는 검술로, 적의 가드를 무너뜨릴 때 쓰는 기술이지만, 이렇게 수직으로 오는 공격을 막을 때도 유용했다.
외형으로만 보면 오우거의 공격이 훨씬 묵직하지만, 크다고 전부가 아니다.
바로 이어서 오우거의 손목을 베어 버렸고, 몽둥이를 쥔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한쪽 발을 잃은 오우거가 뒤로 쓰러지자, 발렌이 그쪽으로 미리 달려가고 있었다.
“자, 어서 오라고!”
부웅-!
떨어지는 오우거의 목을 향해 그레이트 소드를 휘두르자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좋아! 정리 끝!”
짜악.
발렌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우리에게 장수주와 채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둘 다 여기가 전장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죠?”
“남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피를 뒤집어쓰고 왜 좋아하는지.”
두 사람의 반응에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아까 오우거 목을 벨 때 최현 씨가 웃고 있어서 조금 소름 끼쳤어요.”
“그… 그건 오랜만에 화도를 썼더니 만족스러워서 그런 거라고요!”
“…….”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잖아!”
공략의 기본은 안전이 최고지만, 사실 딱히 두려운 요소가 없었다.
내심 차윤지 팀보다 더 빨리, 더 멀리까지 공략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게 된다.
“마스터가 까불지 말고 속도 맞추래요.”
“…알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신아람의 제지가 들어온다.
이런 부분만 보면 신아람이 나보다 뛰어난 리더라는 건 확실했다.
10층 공략은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이었고, 추가로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빠르게 공략하고 싶었다.
“일단 잠시 휴식이야.”
“그래도 벌써 E-5 구역까지 왔네요.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는데요?”
채하나의 말에 신아람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길드도 어느 정도 호흡이 잘 맞게 되었으니까. 다들 실력도 엄청 늘었고 말이지.”
확실히 처음 레이브 길드에 왔을 때보다 다들 월등히 성장한 게 눈에 들어왔다.
특히 장수주는 이제 완벽하게 자신의 능력을 다룰 수 있기에 그녀의 능력은 우리 길드의 중요한 전력이 되었다.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상당히 중요하니까.
“그런데 저희 길드는 인원 더 안 늘리나요?”
유미래의 물음에 신아람은 썩 반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길드원이 늘어나면 공략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지고, 더 안전하게 전투가 가능해지겠지. 그만큼 공략 보수라던가 몬스터를 처리해서 얻는 전리품도 많아질 테고. 그래도 별로 끌리지 않는달까.”
“저는 지금도 좋아요. 너무 사람이 많아지면 복잡하고…. 지금은 뭔가 가족 같아서 더 정이 가요.”
채하나는 다른 가족이나 친구가 없기에 길드에 대한 애착이 더 컸다.
다른 길드원들도 단란한 가족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상황이니까.
어쩌면 신아람이 그런 것까지 배려해 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그럼 잠시 주변 좀 둘러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와.”
몬스터의 기습이 있을 수 있으니 주변 정찰은 필수였다.
발렌의 후각이라는 사기적인 정찰 능력을 보유한 내가 움직이는 게 가장 확실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채하나가 내 뒤를 따라왔고, 숲 주변을 돌아서 천천히 이동했다.
“10층엔 몬스터의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까 아무래도 이 주변에는 없는 모양이네요.”
“없는 쪽이 좋긴 하죠.”
“아무 냄새도 안 나. 이 주변엔 없는 것 같아.”
발렌의 확인까지 받고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채하나의 손가락이 먼 곳을 가리켰다.
“저건 뭐죠?”
“어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새까만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